사마랑(司馬朗)은 자가 백달(伯達)이고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사람이다.
 

사마표서전에서 이르길: 사마랑의 조부 사마준(司馬儁)은 학식이 넓었으며 고대의 유풍을 좋아하였고, 독립하려는 정신이 투철하였으며 도량이 컸다. 신장이 8척 3촌이나 되었고, 허리두레는 5척으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격이 있어 향리 일족들은 모두 그에게 의존했다. 영천태수까지 올랐다.


사마랑의 부친은 사마방(司馬防: 149-219)으로 자가 건공(建公)이다. 성격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공정하였고, 한가하게 있을 때도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평소 ≪한서≫<명신열전(名臣列傳)> 을 좋아하여 수십만 번 낭송하였다. 젊어서 주와 군의 관리가 되었고, 낙양의 령(令)∙경조의 군(君)을 역임했는데, 말년에 기도위로 전임되었다. 그는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았다. 자식들은 서인이 되었지만,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앉지 못했으며, 가르켜 질문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고, 부자 사이는 숙연했다. 71세(건안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여덟 명 있었는데 사마랑이 장남이고, 차남이 진선황제(晉宣皇帝: 사마의)이다.


아홉 살 때, 그의 부친
의 자(字)를 묻는 자가 있었는데 사마랑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부친을 모멸하는 자는 자신의 부친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빈객은 그에게 사과했다. 열두 살 때, 경서 시험을 보아 동자랑(董子郞)이 되었다. 시험을 감독하는 사람이 사마랑의 신체가 건장하고 컸으므로 사마랑이 나이를 속인 것이라고 의심하고는 심문하자 사마랑이 말했다.

"저의 아버님과 어머님 쪽은 대대로 신체가 장대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마음은 없습니다. 나이를 줄여서 일찍 성취하려는 것은 제가 뜻을 세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감독하는 사람은 그를 남다르게 여겼다. 후에 관동에서 병사들이 일어났다. 옛날에 기주자사였던 이소(李邵)는 야왕(野王)에서 살고 있었는데, 험한 산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온현(溫縣)으로 이주하려 했다. 사마랑이 이소에게 말했다.

"입술과 이빨이 서로 의지한다는 비유가 어찌 오직 우(虞)와 괵의 관계뿐이겠습니까? 온현과 야왕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그곳을 버리고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려고 하는데, 이것은 아침에 멸망할 시기를 저녁까지 피하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군국(郡國)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인데, 지금 적도 오지 않았거늘 먼저 달아난다면, 산을 둘러 사는 현의 백성들은 반드시 소란을 피울 것이고, 이와 같이 되면 민심이 동요되어 나쁜 일의 원인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군내(郡內)를 위하여 이 문제를 걱정합니다."

이소는 사마랑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산에 접해서 사는 백성들은 과연 소란을 일으켰고, 내지로 이주하고, 어떤 사람은 도적이 되어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이 때 동탁은 천자를 옮기고 장안을 수도로 세웠으며, 동탁 자신은 낙양에 머물렀다. 사마랑의 부친 사마방(司馬防)은 치서어사(治書御史)를 맡고 있었으므로 응당 서쪽으로 옮겨야만 했고, 사방이 구름처럼 혼란스러웠으므로 사마랑을 보내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의 현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어떤 사람은 사마랑이 도망가려 한다고 밀고를 하였으므로, 사마랑을 잡아 동탁에게 보냈다. 동탁이 사마랑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의 죽은 아들과 같은 또래이고, 체격도 거의 비슷하오!"

사마랑이 곧 말했다.

"명공께서는 세속을 뛰어넘는 덕에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몇 해에 걸친 전란을 만났지만, 사악한 무리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현명한 선비들을 대대적으로 천거하였으니, 이것은 확실히 마음을 비우고 지략을 발휘한 것으로서 장차 흥하여 태평성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위세와 덕행이 융성하고 공훈과 생업이 빛나지만, 전쟁이 매일같이 일어나 주와 군이 들끓고, 국경 안쪽에는 백성들이 편안히 사업을 할 수 없어서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비록 사방의 관소에서 금령을 설치하고 형벌을 무겁게 할지라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으니, 이것에 제가 걱정하는 이유입니다. 원컨대 명공께서는 지난 일을 살펴 적어도 세 번은 생각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영예로운 명성은 해와 달처럼 빛날 것이고, 이윤과 주공 또한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동탁이 말했다.

"나 또한 이것을 알고 있소. 그대의 말은 일리가 있소."

臣松之案朗此對,但為稱述卓功德,未相箴誨而已。了不自申釋,而卓便云「吾亦悟之,卿言有意」!客主之辭如為不相酬塞也。

사마랑은 동탁이 반드시 망할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억류될까 두려워 재물을 풀어 동탁 수하에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구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사마랑은 부로(父老 ; 마을에서 중심인물이 되는 노인)에게 말했다.

" 동탁은 천명을 거스르고 모반을 하여 천하 사람들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떨쳐 일어날 때인 것입니다. 하내군은 수도의 변방 땅과 서로 이어져 있고, 낙양 동쪽으로는 성고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황하에 이어져 있으므로, 천하의 의병을 일으킨 자들이 만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경우 그 세력은 반드시 이곳에서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사분오열하는 전쟁터가 될 것이고, 자력으로 안정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길이 아직도 통해 있는 틈을 타서 종족들을 동쪽으로 향하여 여양(黎陽)으로 옮기는 것만 못합니다. 여양에는 군영과 병사가 있고, 조위손(趙威孫)은 향리(鄕里)와 오래 전부터 혼인관계가 있으니 감영알자(監營謁者)가 되어 병마를 통솔하여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설령 후에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서히 또 관망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부로는 옛 땅을 사랑했으므로 사마랑의 건의를 따르지 않았다. 오직 같은 현의 조자(趙咨)만이 가족들을 이끌고 사마랑과 함께 여양으로 갔다. 

몇 달 후, 관동의 여러 주와 군에서 병사들이 일어났는데, 병력 수십만 명이 모두 형양(滎陽)과 하내로 모여들었다. 장군들은 서로 일관되게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군대를 풀어 약탈을 하여 백성들 중에서 죽은 자가 절반은 됐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관동의 군사들은 흩어졌고, 조조는 여포와 복양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사마랑은 가족들을 데리고 온현으로 돌아왔다. 당시 대기근이 닥쳐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었다. 사마랑은 동족을 어루만지고, 나이 어린 사람들을 가르치고, 말세였지만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마랑이 스물두 살 때, 조조는 불러 사공연속으로 삼고, 성고의 령(令)으로 제수했는데, 병 때문에 관직에서 떠났다가 다시 당양(堂陽)의 장(長)이 되었다. 그의 다스림이 관대하고 은혜로웠으므로 채찍과 곤장을 사용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금령을 범하지 않았다. 이 이전에, 백성들 중에서 도성 안으로 옮겨온 사람이 있었다. 후에 현에서 배를 만드는 일에 인력을 조달해야만 되었는데, 이주해 온 백성들은 사마랑에게 사용될 수 없을 것을 걱정하여 서로 사사로이 따라 돌아가서 그를 도왔으니, 그가 사랑을 받는 것은 이와 같았다.

사마랑은 원성(元城)의 현령으로 승진하였고, 중앙으로 들어가서 승상주부가 되었다. 사마랑은 천하가 붕괴된 상황은 진(秦)나라가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를 소멸하고, 군국(郡國)이 수렵 및 군사훈련으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비록 다섯 등급의 작위제도를 다시 실행할 수는 없을지라도, 주와 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동시에 설치하게 하여,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 민족의 침입을 막고, 안으로는 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책략 중에서 상책인 것이다. 또 정전제(井田制)[]를 마땅히 회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 주대(周代)의 농업정책으로서, 정방형의 9백 이랑의 밭을 우물정(井)자 형으로 아홉 등분하여, 그중 여덟 개를 사유지로 하고, 중앙에 있는 하나를 공유지로 하여 공동 경작하게 하여서 그 한가운데서 수확한 것을 조세로 징수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과거에 백성들은 각기 대대로 전해져 오는 일이 있었는데, 중도에 그것을 빼앗겨 어렵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지금 큰 혼란의 뒤를 이어 백성들은 흩어졌고, 토지에는 주인이 없고 모두 공전(公田)이 되었으니, 응당 이 기회에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사마랑의 건의는 시행되지 않았지만, 주와 군이 병사를 통솔하는 것은 사마랑이 원래 갖고 있던 뜻이었다. 사마랑은 연주자사로 승진하여 정치와 교화를 널리 시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칭찬했다. 사마랑은 비록 군대에서 직무를 맡고 있었지만, 항상 비루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었으며, 그의 검소함은 아랫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인물 평가와 고전을 좋아했다. 고향 사람 이적 등은 명성과 영예를 대단히 얻었는데, 사마랑은 항상 그들을 폄하하였다. 후에 이구 등은 패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그의 식견에 탄복했다. 종요와 왕찬이 지은 논문에서 말했다.

'성인이 아니고서는 천하를 태평하게 할 수 없다.'

사마랑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윤과 안 씨의 무리는 비록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수대에 걸쳐 서로 이어지게 했다면 태평스러움이 도래하게 했을 것이다.' 

魏書曰:文帝善朗論,命祕書錄其文

손성이 이르길: 종요의 주장은 이론적 근거를 잃었지만, 사마랑 또한 논리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옛날에 

'탕 임금은 이윤을 기용하여 어질지 못한 사람을 멀리 가게 했다' 

고 했다. 《역》〈계사전하〉에서는 

'안씨의 아들(안회)은 거의 성인에 가깝다. 마음에 착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었으며, 그것을 알고 다시 행한 적이 없다' 

고 했다. 이로부터 말하면, 성인과 위대한 현자는 출처와 나가고 물러나는 길이 동일하고, 도리로부터 천하를 다스려 풍화(風化)를 남긴 점에 차이가 있다. 태평스러운 시대의 도래를, 어찌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착한 사람이 백 년간 국가를 다스린다면, 포학함을 이겨 사형을 없앨 것이다-《논어》〈자로편〉' 

라고 했고, 또 

'옛 풍습을 추종하지 않는다면 또한 성인이 있는 곳까지 이르지 못한다.' 

고 했다. 수대를 필요로 하는 의론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착한 사람을 위대한 현인과 비교한다면 당연히 거리가 있다.

건안 22년(217)에 사마랑은 하후돈ㆍ장패 등과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거소(居巢)에 도착했을 때, 군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크게 퍼져 사마랑은 친히 순시하고 의약품을 보냈다. 그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는데, 이때 나이가 마흔일곱이다. 그는 임종하면서 베옷과 비단 두건으로 계절에 맞는 상복을 입히도록 명했다.

사마랑은 죽음을 앞두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사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만 리 밖으로 감독하는 사람으로 왔지만, 공업(功業)을 나타내지 못하고 병들었소. 스스로 구할 수 없는 것은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오. 이 몸이 죽으면 베옷과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입히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혀 절약하도록 하오. 나의 뜻을 어기지 마시오."

주의 백성들은 그를 추모했다. 명제가 즉위하여 사마랑은 아들 사마유(司馬遺)를 창무정후(昌武亭侯)로 봉하고 식읍 1백 호를 주었다. 사마랑의 동생 사마부(司馬孚)는 또 아들 사마망(司馬望)으로 사마랑의 뒤를 잇게 했고, 사마유가 죽자 사마망의 아들 사마홍(司馬洪)이 뒤를 이었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서 이르길:사마망(司馬望)의 자는 자초(子初)로,孚之長子。有才識,早知名。咸熙中位至司徒,入晉封義陽王,遷太尉、大司馬。時孚為太宰,父子居上公位,自中代以來未之有也。洪字孔業,封河間王。

처음 사마랑과 함께 여양으로 이주한 조자는 관직이 태상(太常)까지 올랐으며, 세상에서 평가받는 인물이 되었다.

咨字君初。子酆字子〔仲〕,晉驃騎將軍,封東平陵公。並見百官名(志)。

평하여 말한다. 

한말 이래로부터 자사가 각 군을 통솔하였고 원래 있던 권한 이외에 조세를 징수하고 정치를 폈으므로 이전 시대에 감독만 한 것과는 다르다. 조조는 국가의 기초를 창립했을 때부터 위나라의 대업이 완성될 때까지, 모두 아름다운 이름이 전했거나 명실상부한 사람들에게 의지했다. 그들은 모두 대업의 기틀에 정통하였고, 위업과 은혜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 리 사방을 엄숙하고 가지런하게 할 수 있었으며, 후세까지 일컬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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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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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1
21:52:19
(*.52.89.88)
주석 구분이 안 되어있기에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22
17:39:53
(*.104.141.18)
주석 추가했습니다. 하나는 이상하게 떨어져 있기에 합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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