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dragonrz님의 블로그



昔在唐堯,洪水滔天。
옛날 요임금이 중국을 다스릴 때 홍수가 하늘까지 닿았다.


鯀功無成(1),聖禹嗣興,導江疏河,百川蠲修;封殖天下,因古九囿以置九州島(2)。
곤(鯀)이 치수에 성공하지 못하자 우(禹)가 일을 이어받아 강하를 소통시켜 모든 강이 바르게 다스려졌다. 이후에 천하를 제후들에게 분봉하고 고대의 아홉구역을 본받아 9주를 설치했다.



仰稟參伐(3),俯壤華陽,黑水、江、漢爲梁州(4)。
위로는 삼수(參宿)에 해당하고 아래로는 화산의 남쪽(華陽)에 처했으며 흑수(黑水), 강수(江水), 한수(漢水) 사이에 있는 땅을 양주(梁州)로 삼았다.

 
厥土青黎。厥田惟下上。厥賦惟下中。
그 토지는 청흑색을 띄고 그 전답은 하상(下上)의 품질이고 부세는 하중(下中) 정도로 냈다.

 
厥貢璆、鐵、銀、鏤、砮、磬、熊、羆、狐、狸、織皮(5)。
그 공납품은 아름다운 옥(璆), 철(鐵), 은(銀), 강철(鏤), 돌로 만든 화살촉(砮), 경석(磬), 곰(熊), 큰곰(羆), 여우(狐), 살쾡이(狸), 직물과 피복(織皮) 이었다.

 
於是四隩既宅,九州島攸同,六府孔修,庶土交正,底財賦,成貢中國(6)。
이에 사방이 모두 안정을 찾았고 9주가 통일되어 6부(六府:고대의 土,木,水,草,器,貨 6가지의 조세 수납을 관장한 관청)가 갖춰지니 모든 사람이 올바름을 얻었으며 각 지방에서는 부세를 받들어 중국에 바치게 되었다.

 
蓋時雍之化,東被西漸矣(7)。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았으며 그 교화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주석1.사기 하본기에 이르길 "當帝堯之時,鴻水滔天,浩浩懷山襄陵,下民其憂。堯求能治水者,羣臣四嶽皆曰鯀可。堯曰:「鯀為人負命毀族,不可。」四嶽曰:「等之未有賢於鯀者,願帝試之。」於是堯聽四嶽,用鯀治水。九年而水不息,功用不成。"


주석2.蠲=善/춘추좌전 소공 9년에 이르길 "后稷封殖天下" 두예의 주석에 이르길 "修封疆,植五谷"/囿=구역/

九州는 기주(冀州), 연주(兖州), 청주(青州), 서주(徐州), 양주(扬州), 형주(荆州), 예주(豫州), 양주(梁州), 옹주(雍州)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서경 우공편에서 따왔는데 우공편은 전국시대에 지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라의 행정구역을 나타낸게 아니라 작자의 이상에 불과하다.


주석3. 參伐은 28수중의 參宿에 해당한다. 진서 천문지에 이르길 "參十星,一曰參伐"/ 고대의 사람들은 익주지역이 하늘의 별자리중 자(觜)와삼(參)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사기 천관서에 이르길 "觜觿、參,益州。" 또한 예문유취 6권에서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를 인용하길 "觜參流爲益州"라하고 또한 " 參伐流爲益"이라 하였으므로 仰稟參伐이라고 한것이다.
 

주석4.서경 우공편에 이르길 "華陽黑水惟梁州"  위공의 주에 이르길 "東至華山之南,西距黑水" 화산은 지금의 섬서성 화양현 남쪽에 있으니 우공에서 말한 옹주,양주,예주의 분기점으로 동쪽이 예주, 북쪽이 옹주, 남쪽이 양주이다. 양주(梁州)는 크게 지금의 사천,운남,귀주,감남,섬남으로부터 호북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하는데 이것이 화양국지가 언급하는 지리적 범위로 책의 이름을 화양으로 삼은것은 서경 우공편에 근거한것이다. 흑수(黑水)는 중국 서쪽에 흐른다고 생각된 전설속의 강이다. 서경 우공편에 이르길 "導黑水,至于三危,入于南海。"  자세한건 청조 이영폐(李榮陛)의 흑수고증(黑水考証)  참고 요망

 
주석5.서경 우공편에 이르길 "厥土青黎,厥田惟下上,厥賦下中三錯。厥貢璆、鐵、銀、鏤、砮、磬、熊、羆、狐、貍、織皮。"

 
주석6.서경 우공편에 이르길 "九州攸同,四隩旣宅;九山刊旅,九川滌源,九澤旣陂。四海會同,六府孔修;庶士交正,厎慎財賦,咸則三壤,成賦中邦。"/宅=안정/攸=皆/예기 곡례편에 이르길 "天子之六府:曰司土、司木、司水、司草、司器、司貨,典司六職。" 정현의 주석에 이르길 "府, 主藏六物之稅者"/ 孔=甚/庶=衆,交=俱/底=敬

 
주석7.서경 요전에 이르길 "協和萬邦。黎民於變時雍。" 의미는 요임금이 만방을 화목하게 하여 백성들로하여금 번식하여 서로 어울려 살게 했다는 뜻으로 時雍의 두글자를 취한것이다. /서경 우공편에 이르길 "東漸于海,西被于流沙;朔、南曁聲教,訖于四海。" 被는 뒤덮여 두루 미친다는 뜻이고 漸은 스며들고 전파된다는 뜻이다.

曆夏、殷、周,九州島牧伯率職(1)。
하(夏), 은(殷), 주(周)의 3대를 거치면서 9주의 장관들은 모두 자기의 직분을 다했다.

 
周文爲伯,西有九國(2)。
주나라 문왕이 서백을 칭했을 때 서쪽으로 9개의 국가가 있었다.

 
及武王克商,並徐合青,省梁合雍,而職方氏猶掌其地,辨其土壤,甄其貫利。迄於秦帝(3)。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공격해 이길 때 이르러서 서주(徐州)를 청주(青州)에 합쳤으며 양주(梁州)를 옹주(雍州)에 합쳤는데 직방씨(職方氏)가 여전히 이 토지를 관리하면서 토양을 변별하고 실리를 밝혔는데 진시황제에 이르기까지 의연했다.

 
漢興,高祖藉之成業。武帝開拓疆壤,乃改雍曰涼,革梁曰益。
한나라가 흥기했을 때 한고조(高祖:유방)가 이 땅을 근간으로 삼아 대업을 이루었다.

한나라 무제는 강역을 개척하여 옹주(雍州)를 양주(涼州)로 바꾸고 양주(梁州)를 익주(益州)로 바꿨다.

 
故巴、漢、庸、蜀屬益州(4)。
이런 이유로 파(巴), 한(漢), 용(庸), 촉(蜀) 지방이 익주(益州)에 속하게 되었다.

 
至魏鹹熙元年平蜀,始分益之巴、漢七郡置梁州(5)。治漢中(6)。
위나라 함희(鹹熙:원제 조환의 연호) 원년(264년)에 이르러 촉한을 평정하고 비로소 익주의 파(巴), 한(漢) 7군을 분리해 양주(梁州)를 설치하고 치소를 한중(漢中)에 두었다.

 
以相國參軍中山耿黼爲刺史。
상국참군(相國參軍) 중산(中山)사람 경보(耿黼)를 양주자사(梁州刺史)에 임명하였다.

 
元康六年,廣漢〔還〕益州(7),更割雍州之武都、陰平,荊州之新城、上庸、魏興以屬焉(8)。凡統郡十二,縣五十八(9)。
진나라 원강(元康:혜제 사마충의 연호) 6년(296년)에 광한(廣漢)을 익주에 속하게 하고 다시 옹주의 무도(武都), 음평(陰平), 형주의 신성(新城), 상용(上庸), 위흥(魏興)을 양주에 속하게 하였다. 무릇 군(郡)이 총 12개이고 현(縣)이 총 58개이다.

 
주석1.牧伯은 주(州)의 장관을 일컫는 말이다.  率職은 자기의 직분을 다했다는 뜻이다.


주석2.伯은 사기 은본기에 이르길 "紂乃許之,賜弓矢斧鉞,使得征伐,為西伯。"하였는데 제후들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다.  九國=多國

 
주석3.주례 하관 직방씨를 보건대 중국의 9주를 揚州,荊州,豫州,青州,兗州,雍州,幽州,冀州,并州라고 하였으니 또한 서경 우공편과 비교하건대 徐州를  青州 에 합쳤고 梁州를  雍州 에 합쳤으며  冀州 로부터  雍州 와  并州 가 나온것을 알수 있다. 옛날 사람들인 주례를 지은사람이 주공이라고 했지마 사실은 전국시대에 지어진 책이기 때문에 주나라의 실제 제도가 아닌 허구속의 이상적인 제도일 뿐이다.  

직방씨(職方氏)는 관직명인데 주례를 보면 그 직무에관해 이르길 "掌天下之圖,以掌天下之地。辨其邦國、都鄙、四夷、八蠻、七閩、九貉、五戎、六狄之人民,與其財用、九穀、六畜之數要,周知其利害。乃辨九州之國,使同貫利"라고 하고 있는데 당나라 가공언의 소에 이르길 "貫, 事也. 使同其事理,不失其所也."/견(甄)은 변별한다는 뜻이다.


주석4.한고조는 중국에 주(州)를 설치한적이 없고 한무제 원봉(元封) 5년에 이르러 전국에 13개주를 설치했다.

13개주는 곧 司隷,揚州,荊州,豫州,青州,兗州,幽州,冀州,并州,徐州,凉州,益州,交阯로 서경 우공편에 비해서  雍州 를  凉州로 梁州를 益州로 고쳤는데 진서 지리지에 이르길 "春秋元命包云:「參伐流為益州,益之為言阨也。」言其所在之地險阨也,亦曰疆壤益大,故以名焉。"이라 하여 益州라고 작명한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주석5.삼국지 위지 삼소제기에 이르길 경원 4년 12월 "壬子,分益州為梁州。" 이 다음해가 함희 원년인데 함희 원년 3월 위나라가 유선을 책명하는 조서의 일부분에 이르길 "朕永惟祖考遺志,思在綏緝四海,率土同軌,故爰整六師,耀威梁、益。"이라고 하였으니 화양국지에서 언급한 梁州를 설치한 일은 마땅히 경원 4년이라고 해야지 삼국지에 의거하면 함희 원년이라고 한것은 잘못된것 같다./巴、漢七郡이라 함은 자치통감 78권 호삼성 주석에 의하면 한중군, 재동군, 광한군, 배릉군, 파군, 파동군, 파서군이다.

 
주석6.환우기 133권에서 인용한 왕은의 진서에서 양주를 처음 건립했을때 치소를 한중의 면양(沔陽)에다 두었는데 태강 연간에 남정(南鄭)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석7. 廣漢〔還〕  益州  : 원문에는 廣漢益州라고 돼있는데 광한군은 본래 익주에 속해 있었고 경원 4년 양주를 설치할때 갈라져나와 양주에 속하게 되었다. 태강 3년에도 여전히 양주에 속하고 있었는데 화양국지에 이르길 원강 6년 무도등을 떼어내 양주에 속하게 하자 양주가 12개의 군을 통할했다고 했으니 이미 광한군이 여기에 없고 익주에 돌아간것을 알수 있다. 만약 여기에서 廣漢〔還〕  益州의 다섯글자가 없다면 뒷 부분이 凡統郡十二이 아니라 凡統郡十三이 되어야 하기에 還이라는 글자 하나를 보충해 넣어 이치에 맞게 한다.


주석8.晉志에 진나라 혜제가 다시 파서군을 나누어 탕거군을 설치하고 신성군, 위흥군, 상용군과 합쳐 4개의 군으로 양주에 속하게 했다고 했는데 화양국지를 살펴보건대 荊州之新城、上庸、魏興以屬焉은 이 내용을 가리키는것인듯 한다.

 
주석9.12군이라함은 한중군,재동군, 배릉군, 파군, 파서군, 파동군, 탕거군, 무도군,음평군, 신성군, 상용군, 위흥군을 일컫는 것이다. /縣五十八:원강 6년 이후 양주를 확대하고 나서 현의 숫자를 일컫는것이다. 화양국지 1권과 2권에 실린 현의 숫자를 세어보건대 63개로 진나라 초기에 폐지한 현의 숫자를 빼면 54개이다. 따라서 화양국지상의 기록만 놓고 보더라도 하나가 54개고 하나가 58개로 일치하지 않다. 생각하건대 오랜시간 동안 전해져 오는 과정에서나 베끼는 과정에서 모종의 오류가 있었던것 같다.


《洛書》曰:「人皇始出,繼地皇之後,兄弟九人,分理九州島,爲九囿。人皇居中州,制八輔。」
《낙서》에 이르길 「인황(人皇)이 지황(地皇)의 뒤를 이어 나왔는데 형제 아홉사람이 9주를 나눠 다스려 아홉 개의 구역을 이루었다. 인황은 가운데에 거처하면서 주위의 여덟 구역을 관리했다.」


華陽之壤,梁岷之域,是其一囿;囿中之國,則巴蜀矣。
화양(華陽)과 양산(梁山), 민산(岷山)이 있던곳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 구역에 파국(巴國)과 촉국(蜀國)이 있었다.

 
其分野,輿鬼、東井。其君,上世未聞。五帝以來,黃帝、高陽之支庶,世爲侯伯。
그 위치를 하늘의 별자리로 보면 여귀성(輿鬼星)과 동정성(東井星)에 해당한다. 그 군주는 오제(五帝)의 윗 세대에 관해서는 알려진게 없으나 오제 이래로 황제(黃帝)와 고양(高陽)의 자손들이 대대세세 후백(侯伯)을 맡았다.

 
及禹治水命州,巴、蜀以屬梁州。
우(禹) 임금이 치수를 할때에 이르러 9주를 구획했는데 파(巴)와 촉(蜀)은 양주(梁州)에 속하게 됐다.

 
禹娶於塗山,辛、壬、癸、甲而去。生子啟,呱呱啼,不及視。三過其門而不入室,務在救時。
우임금은 도산씨(塗山)와 결혼했는데 신일(辛)에 결혼하여 임(壬),계(癸)일을 지나 갑(甲)일에 집을 떠났다. 아들 계(啟)를 낳았는데 갓 태어나 우는 울음소리도 돌아보지 않았다. 3번 집 문 앞을 지나갔으면서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今江州塗山是也,帝禹之廟銘存焉。禹會諸侯於會稽,執玉帛者萬國,巴蜀往焉。
지금의 강주(江州) 도산(塗山)이 바로 여기로 제우(帝禹)의 사당과 비문이 있다. 우임금이 제후를 회계(會稽)에서 모아 회맹을 가졌는데 많은 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참석하였고 그 중에 파국과 촉국도 있었다.

 
周武王伐紂,實得巴蜀之師,著乎《尚書》。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할 때 파촉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았는데 《상서》에 기록 돼있다.

 
巴師勇銳,歌舞以淩殷人,殷人倒戈。
파국의 병사들은 용맹하고 예리하여 노래부르고 춤추면서 은나라 병사들을 공격했는데 은나라 병사들이 이기지 못하고 항복하여 오히려 자기편에게 창을 겨눴다.

 
故世稱之曰,「武王伐紂,前歌後舞」也。
그러므로 세상에서 이를 칭해 이르길 「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앞에서 노래부르고 뒤에서 춤췄다」 한 것이다.

 
武王既克殷,以其宗姬於巴,爵之以子。古者,遠國雖大,爵不過子。故吳楚及巴皆曰子。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그 일족을 파(巴)에 봉하여 자작으로 삼았다. 옛날에는 멀리 있는 나라가 비록 컸다고 하더라도 작위가 자작을 초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吳), 초(楚)와 파(巴)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작이었다.

其地,東至魚复,西至僰道,北接漢中,南極黔涪。
그 땅은 동쪽으로 어복(魚复), 서쪽으로 북도(僰道)에 이르고 북쪽으로 한중(漢中), 남쪽으로 검중(黔中)과 부릉(涪陵)에 이르렀다.

 
土植五榖。牲具六畜。
토지는 오곡을 심을 수 있고 육축을 키울 수 있다.

 
桑、蠶、麻、苧,魚、鹽、銅、鐵、丹、漆、茶、蜜,靈龜、巨犀、山雞、白雉,黃潤、鮮粉,皆納貢之。
뽕나무(桑), 누에(蠶), 삼(麻), 모시(苧), 물고기(魚), 소금(鹽), 동(銅), 철(鐵), 단사(丹), 옻(漆), 차(茶), 꿀(蜜), 신령한 거북(靈龜), 큰 물소(巨犀), 산 꿩(山雞), 흰 꿩(白雉), 가는 포(黃潤), 선분(鮮粉)을 모두 공물로 받쳤다.

 
其果實之珍者,樹有荔支蔓有辛蒟,園有芳蒻、香茗,給客橙、葵。
그 과실중에서 진귀한 것으로 나무에는 여지(荔支)가 있고 만생으로는 신구(辛蒟)가 있으며 동산에는 방약(芳蒻:蒟蒻,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향명(香茗:향기나는 차),급객등(給客橙:금귤), 아욱(葵)이 있었다.

 
其藥物之異者,有巴戟天、椒。竹木之貴者,有桃支、靈壽。
그 약물중에 독특한 것으로 파극천(巴戟天:부조초(不凋草)의 뿌리), 산초(椒)가 있고 나무중에 귀한것으로는 도지(桃支), 영수(靈壽)가 있다.

 
其名山有塗、籍、靈台、石書、刊山。
그 명산으로는 도산(塗山), 적산(籍山), 영대산(靈台山), 석서산(石書), 간산(刊山)이 있다.

 
其民質直好義。土風敦厚,有先民之流。
그 백성들은 질박하고 솔직하며 의기를 좋아한다. 풍속이 돈후하여 선민의 유풍이 있었다.

 
故其詩曰:「川崖惟平,其稼多黍。旨酒嘉穀,可以養父。野惟阜丘,彼稷多有。嘉穀旨酒,可以養母。」
그러므로 시에 이르길 「산천이 평탄하니 농사지음에 낟알이 많이 맺혔네. 미주와 가곡은 아버지를 봉양하기에 충분하네. 야외의 토산들에는 계곡이 많기도 하네. 가곡과 미주는 어머니를 봉양하기에 충분하네 」 한 것이다.

 
其祭祀之詩曰:「惟月孟春,獺祭彼崖。永言孝思,享祀孔嘉。彼黍既潔,彼犧惟澤。蒸命良辰,祖考來格。」
그 지방의 제사지내는 시에 이르길 「봄날의 한 달에 물가에 제기들을 진열하네. 영원토록 효도할 것을 생각하니 제사 지냄이 아주 아름답네. 저 기장은 깨끗하고 저 희생은 살이 쪘네. 길일을 택해 제사를 지내니 선조께서는 이곳에 도래하여 흠향하네. 」 한 것이다.

 
其好古樂道之詩曰:「日月明明,亦惟其名。誰能長生,不朽難獲。」
그 지방의 고풍을 좋아하고 성현의 도덕을 말한 시에 이르길 「해와 달이 밝으나 밤이 오는 시간이 있네. 그 누가 영원히 살겠는가? 영원히 살아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얻기 어려운 일이네」 하였다.

 
又曰:「惟德實寶,富貴何常。我思古人,令問令望。」
또 이르길 「덕행이 값진 것이지 부귀가 어찌 항상 있겠는가? 나는 고인(古人)의 아름다운 명망을 생각하네. 」 하였다.

 
而其失,在於重遲魯鈍。
그 단점은 둔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俗素樸,無造次辨麗之氣。
풍속은 소박하여 민첩한 행동이나 수려한 언변이 없었다.

 
其屬有濮、賨、苴、共、奴、獽、夷、蜑之蠻。
그에 속한 이민족으로는 복(濮), 종(賨), 저(苴), 공(共), 노(奴), 양(獽), 이(夷), 단(蜑) 등이 있었다.


周之仲世,雖奉王職,與秦、楚、鄧爲比。
주나라 중기 비록 모두 주왕을 받들고 있었으나 파국은 진(秦), 초(楚), 등(鄧)나라와 더불어 중원의 국가들에게 낮게 여겨졌다.

 
《春秋》魯桓公九年,巴子使韓服告楚,請與鄧爲好。
《춘추》 노환공 9년(기원전 703년) 파나라 왕이 사신 한복(韓服)을 보내 초나라 왕에게 등나라와 우호를 맺고 싶다고 청했다.

 
楚子使道朔將巴客聘鄧。
초나라 왕이 사신 도삭(道朔)을 파나라의 사신과 함께 등나라에 사절로 보냈다.

 
鄧南鄙攻而奪其幣。
등나라 남방의 사람들이 이들을 공격해 폐물을 탈취했다.

 
巴子怒,伐鄧,敗之。
파나라 왕이 노하여 등나라를 정벌해 패배시켰다.

 
其後巴師、楚師伐申。
그 후에 파나라의 군대와 초나라의 군대가 신나라를 정벌했다.

 
楚子驚巴師。
초나라 왕이 파나라 군대를 놀라게 하였다.

 
魯莊公十八年,巴伐楚,克之。
노나라 장공 18년(기원전 676년) 파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이겼다.

 
魯文公十六年,巴與秦、楚共滅庸。
노나라 문공 16년(기원 609년) 파나라와 진나라, 초나라가 같이 용나라를 소멸시켰다.

 
魯哀公十八年,巴人伐楚,敗於鄾。
노나라 애공 18년(기원전 477년) 파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여 우(鄾)에서 패했다.

 
是後,楚主夏盟,秦擅西土,巴國分遠,故於盟會希。
그 후 초나라 왕이 여름의 맹약을 주관하여 진나라는 서쪽의 지방을 다스리고 파나라는 변방의 먼 땅을 다스리기로 했는데 세 나라는 이때 희(希)에서 회맹을 가졌다.

 
戰國時,嘗與楚婚。及七國稱王,巴亦稱王。
전국시대에 이르러 파나라는 초나라와 통혼 하였다. 7개의 나라가 왕을 칭하던 때에 이르러 파나라도 역시 왕을 칭했다.


周之季世,巴國有亂。
주나라 말기에 파나라에 전란이 발생했다.

 
將軍蔓子請師於楚,許以三城。
장군 만자(蔓子)가 초나라에 군대를 청하면서 3개의 성을 주기로 약속했다.

 
楚王救巴。巴國既寧,楚使請城。
초나라 왕은 파나라를 도와줬고 파나라가 이미 안녕을 되찾자 사신을 보내 성을 요구했다.

 
蔓子曰:「藉楚之靈,克弭禍難。誠許楚王城。將吾頭往謝之。城不可得也。」乃自刎,以頭授楚使。
만자가 말하길 「초나라의 영명에 의지하여 화난을 극복했으니 진실로 초나라 왕에게 성을 주어야 합니다. 장차 내머리로 사죄할 터이니 성은 절대로 줄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칼을 꺼내들고 자신을 찔렀고 파나라 사람들이 만자의 머리를 초나라 사신에게 주었다.

 
〔楚〕王歎曰:「使吾得臣若巴蔓子,用城何爲!」乃以上卿禮葬其頭。
초나라 왕이 탄식하며 말하길 「만약 내가 만자같은 신하를 얻을 수 있다면 성 같은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고는 상경(上卿)의 예우로 만자의 머리를 장사지냈다.

 
巴國葬其身,亦以上卿禮。
파나라에서도 만자의 몸을 또한 상경(上卿)의 예우로 장사지냈다.


周顯王時,巴國衰弱。
주나라 현왕(顯王)때에 이르러 파나라가 쇠약했다.

 
秦惠文王與巴、蜀爲好。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파나라와 촉나라와 더불어 사이가 좋았다.

 
蜀王弟苴侯私親於巴。
촉나라 왕의 동생인 저후(苴侯)는 사사로이 파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巴蜀世戰爭,周慎王五年,蜀王伐苴。
파나라와 촉나라는 세세토록 전쟁을 하였는데 주나라 신왕(慎王) 5년(기원전 316년)에 촉나라왕이 저후를 정벌했다.

 
苴侯奔巴。巴爲求救於秦。
저후는 파나라로 도망갔고 파나라는 진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秦惠文王遣張儀、司馬錯救苴、巴。
진나라 혜문왕은 장의(張儀)와 사마조(司馬錯)를 보내 저후와 파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遂伐蜀,滅之。
마침내 촉나라를 정벌해 멸망시켰다.

 
儀貪巴、苴之富,因取巴,執王以歸。
장의는 파나라와 저후의 부귀를 욕심내 이로 인해 파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왕을 붙잡아 진나라로 돌아갔다.

 
置巴、蜀、及漢中郡。分其地爲四十一縣。
진나라는 파군(巴郡), 촉군(蜀郡)과 한중군(漢中郡)을 설치하고 이들 토지에 41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儀城江州。司馬錯自巴涪水,取楚商於地,爲黔中郡。
장의는 강주(江州)에 성을 쌓았고 사마조는 파나라의 배수(涪水)를 따라 초나라의 상(商) 지방을 탈취하여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했다.


秦昭襄王時,白虎爲害,自黔、蜀、巴、漢患之。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때에 백호가 사람을 해쳐 검중군, 촉군, 파군, 한중군에서 이를 걱정하였다.
 

秦王乃重募國中:「有能煞虎者邑萬家,金帛稱之。」
진나라 왕이 이에 무거운 현상금을 걸고 중국에서 사람을 모으며 말하길 「호랑이를 죽일수 있는 사람은 봉읍으로 1만호를 내리고 봉지를 원하지 않거든 이에 상응한 재물을 하사하겠다」 하였다.

 
於是夷朐忍廖仲、藥何、射虎秦精等乃作白竹弩於高樓上,射虎。中頭三節。
이에 이민족인 구인(朐忍)사람 요중(廖仲), 약하(藥何), 호랑이를 잘 쏘는 주정(秦精)등이 백죽노(白竹弩)를 만들어 높은 누대 위에 설치하고서 호랑이를 쐈는데 머리에 명중하여 3절이나 박혔다.

 
白虎常從群虎,瞋恚,盡搏煞群虎,大呴而死。
백호를 따라다니던 여러 마리의 호랑이가 있었는데 이때 백호가 분노하여 그들과 서로 치고 죽이더니 크게 포효하고 죽었다.

 
秦王嘉之曰:「虎曆四郡,害千二百人。一朝患除,功莫大焉。」
진나라왕이 그들을 칭찬하며 말하길 「호랑이가 4개의 군에 해를 끼쳐 1200여명의 사람을 죽였다. 하루아침에 해를 제거하니 이보다 더 큰 공로가 없구나.」 하였다.

 
欲如約,嫌其夷人。
약속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이민족인 것을 꺼렸다.

 
乃刻石爲盟要:複夷人頃田不租,十妻不算;傷人者,論;煞人雇死,倓錢。
그러므로 돌에 맹약을 새겼는데 이민족은 1경(頃)이하의 전답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고 많은 아내를 들여도 세금을 더 낼 필요가 없으며 사람을 상해하면 경중을 따라 논하고 사람을 죽이면 금전으로 속죄 할 수 있게 하였다.

 
盟曰:「秦犯夷,輸黃瓏一雙。夷犯秦,輸清酒一鍾。」夷人安之。
맹세하여 말하길 「진나라 사람이 이민족을 범하면 황룡(黃瓏) 한 쌍으로 갚아야하고 이민족이 진나라 사람을 범하면 청주(清酒) 한 병으로 갚으면 된다.」고 하니 이민족들이 안정을 얻었다.

 
漢興,亦從高祖定亂,有功。高祖因复之,專以射虎爲事。
한나라가 흥기할 때 이들은 한고조를 따라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었다. 한고조는 이로 인해 일전의 부세와 요역면제를 다시 해줬으며 이들은 대대로 호랑이 사냥을 업으로 삼았다.

 
戶歲出賨錢口四十。故世號白虎复夷。一曰板楯蠻。今所謂弜頭虎子者也。
해마다 한 사람에 40전씩 공물세를 바쳤는데 이로 인해 세상사람들은 백호복이(白虎复夷) 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판순만(板楯蠻)이라고도 불렀다. 지금 이른바 강두호자(弜頭虎子)라는 것이다.


漢高帝滅秦,爲漢王,王巴、蜀。
한나라 고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왕(漢王)이 되어 파촉(巴蜀)을 다스렸다.

 
閬中人範目,有恩信方略,知帝必定天下,說帝,爲募發賨民,要與共定秦。
낭중(閬中)사람 범목(範目)은 믿음과 모략이 있어 고조가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것을 알고 고조에게 종민(賨民)들을 모집해서 그들과 더불어 함께 진나라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秦地既定,封目爲長安建章鄉侯。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자 범목을 장안건장향후(長安建章鄉侯)에 봉했다.

 
帝將討關東,賨民皆思歸;帝嘉其功而難傷其意,遂聽還巴。
고조가 장차 관동을 토벌하려던 때에 종민들이 모두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니 고조는 그들의 전공을 가상히 여기고 그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마침내 파(巴)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謂目曰:「富貴不歸故鄉,如衣繡夜行耳。」徙封閬中慈鄉侯。
한고조는 범목에게 말하길 「부귀를 얻었으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것과 같다네」하고는 범목을 낭중자향후(閬中慈鄉侯)로 옮겨 봉했다.

 
目固辭。乃封渡沔侯。
범목이 굳게 사양하니 곧 도면후(渡沔侯)에 봉했다.

 
故世謂:「三秦亡【秦】,範三侯」也。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이 말하길 「삼진(三秦)이 망하니 범목이 삼후(三侯)가 됐다」 고 했다.

 
目複〔請〕除民羅、樸、昝、鄂、度、夕、龔七姓不供租賦。
범목은 다시 나(羅), 박(樸), 잠(昝), 악(鄂), 도(度), 석(夕), 공(龔)의 7성에게도 같이 조세와 요역을 면제 시켜줄 것을 청했다.

 
閬中有渝水。賨民多居水左右,天性勁勇;初爲漢前鋒,陷陣,銳氣喜舞。
낭중(閬中)에는 유수(渝水)가 흐르는데 종민들은 대부분 유수의 좌우에 거주했으며 천성이 과감하고 용맹했다. 애초에 한나라를 위해 전봉이 되어 적군의 진을 깨뜨리니 예리한 기운이 있었던 데다 가무를 좋아했다.

 
帝善之,曰:「此武王伐紂之歌也。」乃令樂人習學之。今所謂《巴渝舞》也。
고조가 이를 훌륭하게 여겨 말하길 「이것이 무왕이 주왕을 정벌 할때의 노래로구나」 하고 악인들에게 명하여 이를 배우게 했는데 지금 이른바 《파유무(巴渝舞)》라는 것이다.

 
天下既定,高帝乃分巴、蜀置廣漢郡。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한고조는 파와 촉을 나눠 광한군(廣漢郡)을 설치했다.

 
孝武帝又兩割置犍爲郡。
한나라 효무제(孝武帝) 때에 다시 파와 촉을 나눠 건위군(犍爲郡)을 설치했다.

 
故世曰「分巴割蜀,以成犍、廣」也。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이 말하길 「파촉(巴蜀)을 나눠 건광(犍廣)으로 삼았다」 한 것이다.


自時厥後,五教雍和,秀茂挺逸。
이후부터 오상의 교화가 널리 펴지고 우수한 인재가 많아졌다.

 
英偉既多,而風謠旁作。
영준한 인물이 이미 많아지니 민간의 풍요가 점점 흥기하게 됐다.

 
故朝廷有忠貞盡節之臣,鄉黨有主文歌詠之音。
그러므로 조정에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게 됐고 지방에는 불려지는 가요가 있게 됐다.

 
巴郡譙君黃,仕成哀之世,爲諫議大夫。數進忠言。
파군(巴郡)의 초군황(譙君黃)은 한나라 성제(成帝)와 애제(哀帝)때 벼슬을 했는데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수차례 충언을 올렸다.

 
後違避王莽。又不仕公孫述。述怒,遣使賚藥酒以懼之。
후에 왕망(王莽)을 꺼려 벼슬하지 않았고 또한 공손술(公孫述)에게도 벼슬하지 않으니 공손술이 분노하여 사자를 보내 독약 넣은 술(藥酒)을 주어서 두렵게 하였다.

 
君黃笑曰:「吾不省藥乎?」其子瑛,納錢八百萬,得免。
초군황이 웃으면서 말하길 「내가 여기에 독약이 든줄 모르겠는가?」 하니 아들인 초영(譙瑛)이 800만전을 뇌물로 바치고 위기를 모면했다.

 
國人作詩曰:「肅肅清節士,執德寔固貞。違惡以授命,沒世遺令聲。」
나라 사람이 시를 지어 이르길 「엄숙하고 청렴한 선비여 고집스럽게 자신의 덕행을 지켰네. 사악한 인간을 위배하여 목숨을 바치고 세세토록 아름다운 명성을 전하네.」라고 하였다.

 
巴郡陳紀山,爲漢司隸校尉,嚴明正直。
파군(巴郡)의 진기산(陳紀山)이 한나라의 사례교위(司隸校尉)가 되어 사람됨이 준엄하고 명백하며 정직했다.

 
西虜獻眩,王庭試之,分公卿以爲嬉。
서방의 이민족이 요술을 헌상했는데 조정에서 한번 시험삼아 해보게 했더니 공경(公卿)들이 이를 즐겁게 여겼다.

 
紀山獨不視。京師稱之。
유독 진기산만이 이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경사의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巴人歌曰:「築室載直梁,國人以貞真。邪娛不揚目,枉行不動身。奸軌辟乎遠,理義協乎民。」
파(巴)지방의 사람들이 노래 부르길 「집을 짓는 데는 곧은 대들보가 필요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올곧은 사람이 필요하네. 사벽한 오락에 눈을 돌리지 않으니 그른 행동에는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네. 간사한 사람이 멀리 피하니 의리가 백성들을 따라 생기네.」 하였다.



巴郡嚴王思,爲揚州刺史,惠愛在民。
파군(巴郡)의 엄왕사(嚴王思)는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어 백성들을 인애로 다스렸다.

 
每當遷官,吏民塞路攀轅,詔遂留之。
매번 다른 지방으로 부임해갈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멍에를 붙잡아 만류하므로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곳에 머무르게 했다.

 
居官十八年卒,百姓若喪考妣。
관직에 있은지 18년뒤에 죽었는데 백성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았다.

 
義送者賚錢百萬,欲以贍王思家。
영구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사람들이 100만전을 모아 엄왕사의 가속을 도우려고 하였다.

 
其子徐州刺史羽不受。送吏義崇不忍持還,乃散以爲食,食行客。
엄왕사의 아들인 서주자사(徐州刺史) 엄우(嚴羽)가 받지 않으니 호송하던 관리인 의숭(義崇)이 차마 돈을 도로 가지고 갈수 없어서 이에 음식을 장만하여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대접했다.

 
巴郡太守汝南應季先善而美之,乃作詩曰:「乘彼西漢,潭潭其淵。君子愷悌,作民二親。沒世遺愛,式鏡後人。」
파군태수(巴郡太守) 여남(汝南)사람 응계선(應季先)이 이를 선하고 아름답게 여겨 이에 시를 지어 이르길 「저 서한(西漢)강이여 담담하여 깊이를 측량 할 수 없네. 군자가 자신을 평범하고 가깝게하여 백성들의 부모가 되었구나. 세세토록 은애를 남기니 후대의 거울이 되었구나.」 하였다.


漢安帝時,巴郡太守連失道。
한나라 안제(安帝) 때에 파군태수(巴郡太守)가 연이어 덕을 잃었다.

 
國人風之曰:「明明上天,下土是觀。帝選元後,求定民安。孰可不念,禍福由人。願君奉詔,惟德日親。」
나라 사람들이 이를 풍자해 말하길 「밝고도 밝은 하늘이 아래의 땅을 굽어보네. 황제가 지방관을 뽑은 것은 백성들의 안녕을 구하려는 것이네. 그 누가 염려하지 않겠는가? 재앙과 복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 원컨대 군께서는 조서를 받들어 오직 날로 덕을 새롭게 하십시오. 」하였다.

 
永初中,廣漢、漢中羌反,虐及巴郡。
영초(永初) 연간에 광한(廣漢)과 한중(漢中)에서 강(羌)족이 반란을 일으켜 피해가 파군(巴郡)에 까지 미쳤다.

 
有馬妙祈妻義,王元憒妻姬,趙蔓君妻華 , 夙喪夫,執共姜之節,守一醮之禮,號曰「三貞」。
마묘기(馬妙祈)의 아내인 의씨(義氏)와 왕원궤(王元憒)의 아내인 희씨(姬氏), 조만군(趙蔓君)의 아내인 화씨(華氏)는 모두 일찍 남편을 여의고 공강(共姜)처럼 정절을 지켜 일생에 단 한번 결혼하는 예법을 고수했으니 칭하길 「3정(三貞)」 이라고 하였다.

 
遭亂兵迫匿,懼見拘辱,三人同時自沈於西漢水而沒。
난리를 만나 병사들이 핍박해오니 붙잡혀 능욕당할게 두려워 세 사람은 동시에 서한수(西漢水)에 투신해 자살하였다.

 
死,有黃鳥鳴其亡處,徘徊焉。
죽고 난 후 황조(黃鳥)가 죽은 곳에서 울며 맴돌았다.

 
國人傷之,乃作詩曰:「關關黃鳥,爰集於樹。窈窕淑女,是繡是黼。惟彼繡黼,其心匪石。嗟爾臨川,邈不可獲!」
나라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시를 지어 이르길 「관관(關關)히 우는 황조여 나무 위에 모였구나. 요조숙녀는 수놓은 비단처럼 아름답구나. 모습은 수놓은 비단이지만 마음은 바위와도 같구나. 아~! 흐르는 강물이여, 아득하여 붙잡을 수 없구나!」 하였다.

 
永建中,泰山吳資元約爲郡守,屢獲豐年。
한나라 순제(順帝) 영건(永建)연간에 태산(泰山)사람 오자(吳資:字 元約)가 군수가 되고 연이어 풍년이 들었다.

 
民歌之曰:「習習晨風動,澍雨潤乎苗。我後恤時務,我民以優饒。」及資遷去,民人思慕,又曰:「望遠忽不見。惆悵嘗徘徊。恩澤實難忘,悠悠心永懷。」
백성들이 이를 노래해 말하길 「새벽바람이 습습(習習)히 불고 때에 맞춰 내리는비가 곡식을 윤택하게 하네. 우리의 태수님은 시시각각 농사일에 마음을 쓰셔서 백성들로하여금 풍족을 누리게 하네」 하였는데 오자가 다른 부임지로 떠나게 되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말하길 「먼곳을 바라보니 홀연히 보이지 않게 되어 마음이 슬퍼져 배회하네. 은택은 실로 잊기 어려우니 유유(悠悠)히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네.」 하였다.


孝桓帝時,河南李盛仲和爲郡守,貪財重賦。
한나라 효환제(桓帝時)때에 하남(河南)사람 이성(李盛:字 仲和)이 군수가 되어 탐욕스럽게 재물을 긁어 모으고 부세를 무겁게 징수하였다.

 
國人刺之曰:「狗吠何諠諠,有吏來在門。披衣出門應,府記欲得錢。語窮乞請期,吏怒反見尤。旋步顧家中,家中無可與。思往從鄰貸,鄰人已言匱。錢錢何難得,令我獨憔悴!」
나라 사람들이 이를 풍자해 말하길 「개 짖는 소리가 어찌 이다지도 시끄러운가? 관리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구나. 옷을 걸쳐 입고 문을 열어 응접하니 관부의 문서를 들이밀고 돈을 요구하는구나. 할 말이 없으니 몇일의 기간을 청하자 관리는 화를 내면서 도리어 나를 책망하는구나. 걸음을 돌려 집안을 둘러봐도 집안에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네. 이웃집에 가서 돈 빌릴 생각을 해보지만 이웃들도 말하길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하는구나. 돈아! 돈아! 어찌 이다지도 얻기 어려워서 나를 근심스럽게 하는가! 」하였다.

 
漢末政衰,牧守自擅,民人思治,作詩曰:「混混濁沼魚,習習激清流。溫溫亂國民,業業仰前修。」
한나라 말기에 정치가 쇠퇴하니 지방의 수령들이 마음대로 다스려 백성들이 태평을 갈망하여 시를 지어 이르길 「혼탁한 못 속의 물고기, 서서히 흐르는 맑은 물이여. 온화한 난국의 백성은 노심초사 전대의 현인을 앙모하네. 」하였다.

 
其德操、仁義、文學、政幹,若洛下閎、任文公、馮鴻卿、龐宣孟、玄文和、趙溫柔、龔升侯、楊文義等,播名立事,言行表世者,不勝次載也。
그 중에 덕행과 인의,문학,정치적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낙하굉(洛下閎), 임문공(任文公), 풍홍경(馮鴻卿), 방선맹(龐宣孟), 현문화(玄文和), 조온유(趙溫柔), 공승후(龔升侯), 양문의(楊文義) 등이 있는데 명성이 멀리 퍼지고 입신하여 세상에서 칭해지던 사람들을 여기에 일일이 다 기재할 수는 없다.


孝安帝永初三年,涼州羌入漢中,殺太守董炳,擾動巴中。
한나라 효안제(孝安帝) 영초(永初) 3년(109년) 양주(涼州)에서 강족이 반란을 일으켜 한중(漢中)에 침입하여 태수 동병(董炳)을 죽이고 파(巴) 지방을 소란케 했다.

 
中郎將尹就討之,連年不克。益州諸郡皆起兵禦之。
중랑장(中郎將) 윤취(尹就)가 이를 토벌했으나 해를 이어도 이기지 못했다. 익주(益州)의 여러 군(郡)은 모두 병사를 일으켜 강족을 방어했다.

 
三府舉廣漢王堂爲巴郡太守。撥亂致治,進賢達士。
삼부(三府:三公)는 광한(廣漢)사람 왕당(王堂)을 파군태수(巴郡太守)태수로 추천했다. 왕당은 반란을 진압하고 이치에 맞는 정치를 하여 현달한 선비들을 등용했다.

 
貢孝子嚴永,隱士黃錯,名儒陳髦,俊士張璊,皆至大位。
효자인 엄영(嚴永), 은사인 황조(黃錯), 명성있던 유학자인 진모(陳髦), 걸출한 선비인 장문(張璊)을 추천하여 등용했는데 이들은 모두 높은 벼슬까지 이르렀다.

 
益州刺史張喬,表其尤異。徙右扶風。民爲立祠。
익주자사(益州刺史) 장교(張喬)가 그 훌륭함을 표주하니 우부풍(右扶風)으로 옮겼다. 백성들은 왕당을 위하여 사당을 건립했다.



孝桓帝以並州刺史泰山但望伯闔爲巴郡太守。
한나라 효환제(孝桓帝)가 병주자사(並州刺史) 태산(泰山)사람 단망(但望:字 伯闔)을 파군태수(巴郡太守)로 삼았다.

 
懃恤民隱。郡文學掾宕渠趙芬,掾弘農馮尤,墊江龔榮、王祈、李溫,臨江嚴就、胡良、文愷,安漢陳禧,閬中黃閶,江州毋成、陽譽、喬就、張紹、牟存、平直等,詣望自訟曰:「郡境廣遠,千裏給吏。兼將人從,冬往夏還。夏單冬複。惟踰時之役,懷怨曠之思。其憂喪吉凶,不得相見。解緩補綻,下至薪菜之物,無不躬買於市。富者財得自供。貧者無以自久。是以清儉,夭枉不聞。加以水陸艱難,山有猛禽;思迫期會,隕身江河,投死虎口。咨嗟之歎,曆世所苦。天之應感,乃遭明府,欲爲更新。童兒匹婦,歡喜相賀:『將去遠就近,釋危蒙安。』縣無數十,人無遠邇,恩加未生,澤及來世。巍巍之功,勒於金石。乞以文書付計掾史。人鬼同符,必獲嘉報。芬等幸甚。」望深納之。郡戶曹史枳白望曰:「芬等前後百餘人,曆政訟訴,未蒙感悟。明府運機布政,稽當皇極。爲民庶請命救患,德合天地,澤潤河海。開辟以來,今遇慈父。經曰:『奕奕梁山,惟禹甸之。有倬其道,韓侯受命。』比隆等盛,於斯爲美。」
그는 백성들의 질고를 안타깝게 여겼다. 군의 문학연(文學掾) 탕거(宕渠)사람 조분(趙芬), 연(掾) 홍농(弘農)사람 풍우(馮尤), 점강(墊江)사람 공영(龔榮), 왕기(王祈), 이온(李溫), 임강(臨江)사람 엄취(嚴就), 호량(胡良), 문개(文愷), 안한(安漢)사람 진희(陳禧), 낭중(閬中)사람 황려(黃閶), 강주(江州)사람 무성(毋成), 양예(陽譽), 교취(喬就), 장소(張紹), 모존(牟存), 평직(平直)등이 단망에게 이르러 하소연하길


「파군(郡)은 너무 넓고 멀어서 천리 밖에서 관리를 임명하는데 수행하는 사람을 부리면서 온다면 겨울에 왔다가 여름에 돌아가게 되고 여름에는 홑옷을 겨울에는 겹옷을 입게 됩니다. 또한 때를 넘는 요역으로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치고 집안에 큰 일이 있어도 서로 만나 제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아래로 나무를 때고 음식을 하는 물건들도 시장에서 사야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부자는 재물로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오래 버티기 힘듭니다. 그렇기에 청렴하고 검소한 사람이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됩니다. 더구나 육로와 수로가 모두 험난한데다 산속에는 맹수까지 있어 기한에 쫓겨 급하게 가다보면 혹 강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수도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하게 할만하니 이런 고통이 아주 오래됐습니다. 하늘이 이런 고통에 감응하여 명공을 보내셨으니 이를 갱신하고자 함입니다.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서로 기뻐하며 축하해 말하길 『장차 먼 곳을 가까이 바꾸고 위태로움을 풀어 안전하게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나의 군에 현이 10개이상 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멀리가지 않아도 되니 명공께서 베푸신 은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에게까지 미치고 복택이 내세까지 이르게 되는것입니다. 높고도 높은 공훈은 금석에 새겨지게 될것입니다. 청컨대 공께서는 조정에 상주할 문서를 계연사(計掾史)에게 주신다면 이는 사람과 귀신의 의사가 합치되는 것이니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을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조분등의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여길것입니다.」


하니 단망이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파군의 호조사(戶曹史) 지현(枳縣)사람 ?가 단망에게 말하길 



ps. 호조사(戶曹史)는 벼슬이름이고 지(枳)는 현의 이름이니 본래 枳라는 글자 뒤에 사람 이름이 있었지만 화양국지가 전승되는 과정중에 일실된것 같다.


「조분 등 백여 사람이 지금까지 여러번 태수에게 백성들의 질고를 아뢰었는데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명공께서 하늘의 형상을 보고 정무를 처리하셔서 자연의 원리에 합당하여 백성들을 위해 해로움을 제거해 주셨으니 덕은 천지와 부합하고 은혜는 온 세상을 윤택하게 했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 백성들이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관리를 만났습니다. 시경에 이르길 『높고 높은 양산(梁山)이여 우임금께서 다스리던 곳이구나. 탁월한 도덕은 한후(韓侯)가 받은 명령이라네.』라고 했는데 여기에 비교해서도 그 융성함이 비등하니 실로 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永興二年,三月甲午,望上疏曰:「謹按《巴郡圖經》境界南北四千,東西五千,周萬餘裏。屬縣十四。鹽鐵五官,各有丞史。戶四十六萬四千七百八十。口百八十七萬五千五百三十五。遠縣去郡千二百至千五百裏。鄉亭去縣,或三四百,或及千裏。土界遐遠,令尉不能窮詰奸凶。時有賊發,督郵追案,十日乃到。賊已遠逃,蹤跡絕滅。罪錄逮捕,證驗文書,詰訊,即從春至冬,不能究訖。繩憲未加,或遇德令。是以賊盜公行,奸宄不絕。郡掾龔榮等,及隴西太守馮含、上穀太守陳弘說:往者,至有劫閬中令楊殷、終津侯姜昊,傷尉蘇鴻、彭亭侯孫魯、雍亭侯陳巳、殷侯樂普。又有女服賊千有餘人,布散千裏,不即發覺,謀成乃誅。其水陸覆害,煞郡掾枳謝盛、蹇威、張禦,魚複令尹尋,主簿胡直,若此非一。給吏休謁,往還數千。閉囚須報,或有彈劾,動便曆年。吏坐踰科,恐失冬節,侵疑先死。如當移傳,不能待報,輒自刑戮。或長吏忿怒,冤枉弱民,欲赴訴郡官,每憚還往。太守行桑農,不到四縣。刺史行部,不到十縣。郡治江州,時有溫風。遙縣客吏,多有疾病。地勢剛險,皆重屋累居,數有火害。又不相容,結舫水居五百餘家。承三江之會,夏水漲盛,壞散顛溺,死者無數。而江州以東,濱江山險,其人半楚,精敏輕疾。墊江以西,土地平敞,姿態敦重。上下殊俗,情性不同。敢欲分爲二郡:一治臨江。一治安漢。各有桑麻丹漆,布帛魚池。鹽鐵足相供給。兩近京師。榮等自欲義出財帛,造立府寺。不費縣官,得百姓歡心。孝武以來,亦分吳蜀諸郡。聖德廣被,民物滋繁。增置郡土,釋民之勞,誠聖主之盛業也。臣雖貪大郡以自優暇,不忍小民顒顒蔽隔,謹具以聞。」

한나라 환제(桓帝) 영흥(永興) 2년(154년) 3월 갑오일 단망은 상소문을 올려 이르길


「신이 《(파군도경巴郡圖經)》을 살펴보니 파군의 경역은 남북으로 4000리 동서로 5000리 둘레가 10000여리입니다. 현이 14개고 염철(鹽鐵)관부가 5개이며 각각에 승(丞),사(史)를 두고 있습니다. 호수가 46만 4780호이고 인구는 187만 5535명입니다. 멀리 있는 현은 파군의 치소로부터 1200에서 1500여리 떨어져 있습니다. 향(鄉),정(亭)은 현성으로부터 3.4백리 혹 천여리 떨어져 있습니다. 토지의 경역이 너무 광활해서 현령이나 현위는 간사한 무리를 조사해 다스릴수 없습니다. 불시에 도적이 발생하더라도 독우(督郵)가 안건을 판별하려면 10일이 지나서야 사건이 발생한 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도적은 이미 도망가고 종적은 절멸해버립니다. 비록 체포해서 죄상을 검증하려고 해도 문서를 꾸미고 신문하다보면 봄에 시작해서 겨울이 당도해도 끝낼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도적에게 아직 법령의 준엄한 형벌이 미치기도 전에 혹 천하에 사면령이 내려져 풀려나고 맙니다. 이런 연고로 도적이 횡행하고 간사한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군연(郡掾) 공영(龔榮)등의 사람들과 농서태수(隴西太守) 풍함(馮含), 상곡태수(上穀太守) 진홍(陳弘)은 이전에 낭중령(閬中令) 양은(楊殷), 종진후(終津侯) 강호(姜昊)는 협박당하고 현위(縣尉) 소홍(蘇鴻), 팽정후(彭亭侯) 손노(孫魯), 옹정후(雍亭侯) 진사(陳巳), 은후(殷侯) 악보(樂普)를 해쳤습니다. 또한 여장을 한 도적 천여명이 천리에 분포되어 즉시 발각되지 않고 아주 오래 있다가 주살된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수륙으로 분포하여 사람을 해쳤는데 군연(郡掾)인 지현(枳縣)의 사성(謝盛), 건위(蹇威), 장어(張禦), 어복령(魚複令) 윤심(尹尋), 주부(主簿) 호직(胡直)같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훨씬 많습니다.


관리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수천리 길을 경유해야 합니다. 죄수가 판결을 받고 이에 불복하고자 하여도 몇 년이 걸립니다. 관리가 법을 지키지 않고 판결했다 하더라도 관리는 혹 겨울이지날까 두려워 의문점이 남아 있어도 먼저 죽입니다. 마땅히 상급 관리의 판결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받기도 전에 형을 스스로 먼저 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혹은 관리들이 자기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백성들을 억울하게 만들어 군관(郡官)에게 달려가 하소연 하고자 하여도 길이 너무 멀어 매번 탄식하고 되돌아옵니다. 태수가 농민들에게 농상을 권해도 그 도달하는 범위가 4개 현을 넘지 못하고 자사가 순행을 하더라도 10개현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파군의 치소가 있는 강주(江州)는 자주 불시에 역병이 번져 멀리서 부임해온 관리들이 이런 풍토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주는 지세가 험하고 좁아서 집을 지을 때 절벽 위아래로 층을 쌓아 짓는데 누차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또한 같이 살지 않고 배 위에서 거주하는 사람이 5백여집 정도 되는데 3개의 강이 모이는 지역에 있는지라 여름철에 홍수가 나면 배가 부서지고 전복되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강주의 동쪽은 빈강(濱江)으로 지역이 험저하며 주민들의 초나라 사람의 성정을 가지고 있어 돈후하고 점강(墊江)의 서쪽은 토지가 평탄하고 주민들이 총명합니다. 각 지방의 풍속과 주민들의 성격이 다르니 감히 바라건대 파군을 두 개의 군으로 나눠 하나의 치소는 임강(臨江)에 또 하나의 치소는 안한(安漢)에 설치하길 바랍니다. 이 두 지방에는 모두 뽕나무와 마,주사가 생산되고 포백과 어장이 충분하며 소금과 철을 충분히 서로 공급할수 있는데다 경사와도 비교적 가깝습니다. 공영(龔榮)등의 사람들은 스스로 헌금을 원하고 있으니 이 돈으로 관부를 짓는다면 국고를 쓰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을 기쁘게 할수 있습니다. 효무제 이래 또한 오군과 촉군을 분할한적이 있습니다. 천자의 성스러운 덕이 널리 펴지면 백성들을 포함한 만물이 윤택해지고 번성하는것이니 군현을 증치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풀어주는 것은 진실로 성스러운 군주의 위대한 사업입니다. 신은 비록 커다란 군을 탐내어 높은 대우를 받고 싶으나 백성들이 버려지고 고립되는 것을 간절히 걱정하는 것을 차마 볼수 없기에 삼가 실황을 갖추어 황상에게 보고드립니다.」


하였다.

 
朝議未許。遂不分郡。分郡之議,始於是矣。
조정이 의논한 결과 이 상소문을 채납하지 않아 끝내 파군을 나누지는 않았다. 그러나 파군을 나누자는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順桓之世,板楯數反。太守蜀郡趙溫,恩信降服。於是宕渠出九穗之禾,朐忍有連理之木。
순제와 환제의 치세 당시 판순(板楯)족이 수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파군태수 촉군(蜀郡)사람 조온(趙溫)이 은혜와 믿음으로 반란군을 항복시켰다. 이에 탕거(宕渠)에서는 이삭 9개 달린벼가 나왔고 구인(朐忍)에서는 연리목(連理木)이 나왔다.

 
光和二年,板楯複叛,攻害三蜀、漢中,州郡連年苦之。
한나라 영제 광화(光和) 2년(179년) 판순족이 다시 판란을 일으켜 삼촉(三蜀),한중(漢中)을 공격하니 주군(州郡)들이 해를 이어 전란의 고통을 받았다.

 
天子欲大出軍。時征役疲弊。問益州計曹,考以方略。
천자는 대군을 출병시키고 싶었으나 오랜기간의 원정으로 병사들이 피로할 것을 염려해 익주계조(益州計曹)에게 방법을 물었다.

 
益州計曹掾程包對曰:「板楯七姓,以射虎爲業,立功先漢。本爲義民。複除徭役,但出賨錢,口歲四十。其人勇敢能戰。昔羌數入漢中,郡縣破壞,不絕若線。後得板楯,來虜彌盡。號爲神兵。羌人畏忌,傳語種輩,勿複南行。後建和二年,羌複入漢,牧守遑遑。賴板楯破之。若微板楯,則蜀、漢之民爲左衽矣。前車騎將軍馮緄南征,雖授丹陽精兵,亦倚板楯。近益州之亂,朱龜以並涼勁卒討之,無功;太守李顒以板楯平之。忠功如此,本無惡心。長吏鄉亭,更賦至重;仆役過於奴婢,棰楚隆於囚虜;至乃嫁妻賣子,或自剄割。陳寃州郡,牧守不理。去闕庭遙遠,不能自聞。含怨呼天,叩心窮穀。愁於賦役,困於刑酷,邑域相聚,以致叛戾。非有深謀至計,僭號不軌。但選明能牧守,益其資穀,安便賞募,從其利隙,自然安集。不煩征伐也。昔中郎將尹就伐羌,擾動益部。百姓諺雲:『虜來尚可,尹將殺我!』就征還後,羌自破退。如臣愚見權之,遣軍不如任之州郡。」天子從之,遣太守曹謙,宣詔降赦。一朝清戢。
익주계조연(益州計曹掾) 정포(程包)가 대답하여 말하길


「판순족의 7부락은 호랑이 사냥을 업으로 삼아 한나라 초기에 공을 세웠습니다. 본래 이들은 의로운 백성들이라 요역을 면제하고 다만 1년에 한 사람당 인두세 40전 만을 징수했습니다. 판순족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해 일찍이 강족이 수차례 한중을 침입해 군현을 파괴했는데도 막아 낼수 없었지만 후에 판순족의 지원을 얻어 적군을 소멸시킬수 있었으니 이르길 신병(神兵)이라 하였습니다. 강족은 판순족을 두려워하여 자손들에게 남쪽으로 침략하지 말라고 당부 할정도 였습니다.


후에 건화(建和) 2년(148년) 강족이 다시 한중을 침략하였는데 수령은 당황스러워 할 뿐이었기에 다시 판순족에 의지해 이를 격파했습니다. 만약 판순족이 없었다면 촉한의 백성들은 이미 오랑캐의 지배를 받았을 것입니다. 옛날 거기장군(車騎將軍) 풍곤(馮緄)이 남정할 때 비록 단양정병을 인솔하고 있었으나 또한 판순족에게 의지하였습니다. 근래 익주의 반란에 주귀(朱龜)가 병주와 양주의 경병을 대동하고 토벌했으나 공로가 없었는데 태수(太守) 이옹(李顒)이 판순족을 이끌고 이를 평정했습니다. 판순족은 조정을 이런 충심으로 대했고 본래 무슨 악의가 없습니다. 다만 관리들이 세금을 너무 무겁게 징수하고 일을 시키는 것이 노비를 대하는 것 보다 더하고 매질하는 것이 포로보다 심하니 그들의 처자에 이르러서는 심하면 자살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주군에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려고 해도 수령은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고 조정과의 거리가 너무 먼지라 소식이 닿지도 않습니다.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하늘에다 고함치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다가 부역에 대한 근심과 가혹한 형벌이 초래한 곤란 때문에 각지의 판순족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반란이 된것입니다. 그들은 무슨 깊은 계획하에 이런 불경한 짓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현명한 수령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먹고 입는 것을 충족하게 하여 흔들리는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두터운 상을 내려 장사를 모집해 판순족 각 두령들 사이의 틈을 이용하여 와해시킨다면 저절로 편안해 질것이니 번거롭게 대군을 일으켜 정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옛날 중랑장(中郎將) 윤취(尹就)가 강족을 토벌하느라 익주를 놀라게 하니 백성들의 말에 『오랑캐들이 오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윤장군이 우리를 죽인다.』고 하였으니 윤취가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고 나서 강족은 저절로 흩어져 퇴각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에 의하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현명한 수령을 임명하는것만 못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니 천자가 이를 받아 들여 태수(太守) 조겸(曹謙)을 파견하여 조령을 선포하고 항복한 사람을 사면시키니 영제의 치세 때에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ps. 후한서 86권 남만서남이(南蠻西南夷) 열전을 보건대 이 일을 기록하고 뒤에 “至中平五年,巴郡黃巾賊起,板楯蠻夷因此復叛,寇掠城邑,遣西園上軍別部司馬趙瑾討平之。” 이런 내용이 있는걸로 봐서 영제의 치세에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獻帝初平六年,征東中郎將安漢趙穎建議分巴爲二郡。
한나라 헌제(獻帝) 초평(初平) 6년(195년) 정동중랑장(征東中郎將) 안한(安漢)사람 조영(趙穎)이 파군을 2개의 군으로 나눌 것을 건의했다.


穎欲得巴舊名,故白益州牧劉璋,以墊江以上爲巴郡,江南龐羲爲太守,治安漢。
조영은 파군의 옛 이름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에게 점강(墊江) 이상을 파군으로 하고 강남(江南)사람 방희(龐羲)를 태수로 삼아 안한(安漢)에 치소를 두자고 말했다.

 
璋更以江州至臨江爲永寧郡,朐忍至魚複爲固陵郡,巴遂分矣。
유장이 다시 강주(江州)에서 임강(臨江)까지를 영녕군(永寧郡)으로 하고 구인(朐忍)에서 어복(魚複)까지를 고릉군(固陵郡)으로 삼으니 파군이 드디어 갈라졌다.

 
建安六年,魚複蹇胤白璋,爭巴名。
건안(建安) 6년(201년) 어복(魚複)사람 건윤(蹇胤)이 유장에게 말해 파(巴)라는 이름을 뺏고자 했다.

 
璋乃改永寧爲巴郡,以固陵爲巴東,改羲爲巴西太守。
유장이 이에 영녕군을 파군으로 하고 고릉군을 파동군(巴東郡)으로 하며 방희를 파서태수(巴西太守)로 고쳤다.

 
是爲三巴。於是涪陵謝本白璋,求【以】〔分置〕丹興、漢發二縣,以涪陵爲郡。
이것이 3파(三巴)이다. 이때에 부릉(涪陵)사람 사본(謝本)이 유장에게 단흥(丹興), 한발(漢發) 2개의 현을 분치하여 부릉(涪陵)과 합쳐 하나의 군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璋初以爲巴東屬國。後遂爲涪陵郡。
유장은 애초에 부릉을 파동속국(巴東屬國)으로 삼았는데 이후 마침내 부릉군(涪陵郡)이 되었다.


巴郡,舊屬縣十四。郡分後,屬縣七,戶二萬。去洛三千七百八十五里。
파군(巴郡)은 옛날에 속현이 14개 있었는데 나눈 뒤에 속현이 7개고 인구가 2만호였다. 낙양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는 3785리이다.

 
東接朐忍。西接符縣。南接涪陵。北接安漢、德陽。
동쪽으로는 구인(朐忍)에 서쪽으로는 부현(符縣)에 남쪽으로는 부릉(涪陵)에 북쪽으로는 안한(安漢), 덕양(德陽)에 접했다.

 
巴子時雖都江州,或治墊江,或治平都。後治閬中。
파나라 왕이 다스릴 때 치소를 강주(江州)에 두기도 했고 혹은 점강(墊江)에 두기도 했고 혹은 평도(平都)에 두기도 했는데 이후에 낭중(閬中)으로 옮겼다.

 
其先王陵墓多在枳。其畜牧在沮,今東突峽下畜沮是也。
파나라 선왕들의 능묘는 대부분 지(枳)에 있었다. 목축을 저(沮)에서 했는데 그 지역이 지금의 동돌협(東突峽) 아래에 있는 축저(畜沮)이다.

 
又立市於龜亭北岸,今新市里是也。其郡東枳,有明月峽,廣德嶼,及雞鳴峽。故巴亦有三峽。
또한 귀정(龜亭)북안에 시장을 두었는데 지금의 신시리(新市里)이다. 파군 동쪽의 지현(枳縣)에 명월협(明月峽), 광덕서(廣德嶼)와 계명협(雞鳴峽)이 있으니 파군에도 3협이 있는 것이다.

 
巴楚數相攻伐,故置扞關、陽關及沔關。
파나라와 초나라가 자주 서로 침공했으므로 한관(扞關), 양관(陽關), 면관(沔關)을 설치했다.

 
漢世,郡治江州巴水北,有甘橘官,今北府城是也。後乃遷還南城。
한나라 때에 군의 치소가 있던 강주(江州)가 파수(巴水)의 북쪽에 있어 감귤관(甘橘官)을 두었는데 지금의 북부성(北府城)이다. 이 후 군부(郡府)를 남성(南城)으로 옮겼다.



劉先主初以江夏費瓘爲太守,領江州都督。
유비가 처음에 강하(江夏)사람 비관(費瓘)을 파군태수,령강주도독(領江州都督)에 임명했다.

 
後都護李嚴更城大城,周回十六里。
이후에 도호(都護) 이엄(李嚴)이 다시 큰 성을 건설했는데 둘레가 16리였다.

 
欲穿城後山,自汶江通水入巴江,使城爲州。
성 뒤의 산을 뚫어 문강(汶江)으로부터 물길을 파강(巴江)으로 통하게 하여 그 성이 하주(河洲)위에 건립되도록 하고자 했다.

 
求以五郡置巴州。丞相諸葛亮不許。
또한 5개군으로 파주(巴州)를 설치하고자 했는데 승상 제갈량이 허락하지 않았다.


亮將北征,召嚴漢中。故穿山不逮。然造蒼龍、白虎門。
제갈량이 장차 북벌하던때에 이엄을 불러 한중에 주둔시켰기에 산을 뚫는 일은 끝내 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창룡문(蒼龍門)과 백호문(白虎門)은 이미 만들었다.

 
別郡縣倉皆有城。嚴子豐代爲都督。豐解後,梓潼李福爲都督。
성중의 창고 속 식량은 다른 군현보다 많았고 모두 밖에 성을 쌓아 보호하고 있었다. 이엄의 아들인 이풍이 대신하여 도독이 됐다. 이풍이 해임된 후 재동(梓潼)사람 이복(李福)이 도독이 됐다.

 
延熙中,車騎將軍鄧芝爲都督,治陽關。
연희(延熙) 연간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등지(鄧芝)가 도독이 되어 치소를 양관(陽關)에 두었다.

 
十七年,省平都、樂城、常安。
17년(254년) 평도(平都), 악성(樂城), 상안(常安) 3개의 현을 폐지했다.

 
咸熙元年,但四縣。以鎮西參軍隴西怡思和爲太守,領二部守軍。
함희(咸熙) 원년(264년) 파군에 다만 4개현만 남아 있었다. 진서참군(鎮西參軍) 농서(隴西)사람 신이(辛怡:字 思和)를 파군태수로 삼고 이부수군(二部守軍)을 통령하도록 하였다.


ps.使城爲州에서 州는 원화지에 의거하던대 洲의 오자인 듯하다. 또한 鎮西參軍은 위나라 진서장군인 종회의 참군을 가리키는 말로 위나라 경원 4년 등애와 종회가 촉한을 평정했고 이해 12월에 익주를 나눠 양주를 설치했는데 파군이 양주에 속한바 새로 태수를 임명했다는건 응당 이때일것이다. 隴西아래에 바로 怡思和爲太守가 나오는데 의심하건대 분명히 이름이 怡이고 자가 思和인데 성이 탈루된것 같다. 사천통지에 의거하건대  辛怡가 농서 적도사람으로 마땅히 빠진 성은 辛일것이다.



江州縣  郡治。塗山,有禹王祠及塗后祠。
강주현(江州縣): 파군(巴郡)의 치소가 있다. 도산(塗山)에 우왕(禹王)과 도후(塗后)의 사당이 있다.

 
北水有銘書,詞云:「漢初,犍爲張君爲太守,忽得仙道,從此升度。」今民曰張府君祠。
도산의 북쪽에 흐르는 강의 일면에 비석이 있는데 그 위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한나라 초기에 건위(犍爲)사람 장군(張君)이 태수가 됐는데 홀연히 선도를 깨우쳐 이곳으로부터 등선하였다.」 현재 백성들이 이곳을 장부군사(張府君祠)라고 칭한다.

 
縣下有清水穴。巴人以此水爲粉,則膏暉鮮芳;貢粉京師,因名粉水。故世謂「江州墮林粉」也。
강주현 아래에 맑은 물이 나오는 동굴이 있는데 파인(巴人)들이 이 물로 분(粉)을 만드니 윤택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나서 경사에 진공해 이로 인해 분수(粉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이 말하길 「강주타림분(江州墮林粉)」이라고 하였다.

 
有荔支園。至熟,二千石常設廚膳,命士大夫共會樹下食之。
강주현에는 여지(荔支) 과수원이 있는데 여지가 익을 때쯤에 태수가 항상 연회를 베풀어 사대부들로 하여금 나무 밑으로 모여 음식을 먹고 마시도록 명했다.

 
縣北有稻田,出禦米;陂池出蒲蒻藺席。
강주현의 북쪽에는 논밭이 있어 황제에게 진상하는 쌀이 나왔고 못에는 방석을 만들 수 있는 포약(蒲蒻)과 인초(藺草)가 생산되었다.

 
其冠族有波、鈆、【毋】〔母〕、謝、然、蓋、楊、白、上官、程、常,世有大官也。
강주현의 세족으로는 파(波), 연(鈆), 모(母), 사(謝), 연(然), 개(蓋), 양(楊), 백(白), 상관(上官), 정(程), 상(常)씨 가문이 있어 대대손손 고관을 배출했다.


枳縣  郡東四百里,治涪陵水會。土地確瘠。時多人士。有章、常、連、黎、牟、陽,郡冠首也。
지현(枳縣): 강주현의 동쪽 400리 부릉수(涪陵水)가 만나는곳에 위치해있다. 토지가 아주 척박하다. 특별히 인사가 많은데 장(章), 상(常), 연(連), 려(黎), 모(牟), 양(陽)씨 가문 등이 군에서 가장 훌륭하다.

 
臨江縣  枳東四百里。接朐忍。
임강현(臨江縣): 지현의 동쪽 400리 구인(朐忍)에 접하는곳에 있다.

 
有鹽官,在監塗二溪,一郡所仰。其豪門亦家有鹽井。嚴、甘、文、楊、杜爲大姓。
염관(鹽官)이 설치돼 있고 감계(監溪), 도계(塗溪) 2개의 염정(鹽井)이 있는데 1군의 사람들이 모두 이 2개의 염정에 의지해 살고 있다. 이 지방의 호족들은 또한 가문에 염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엄(嚴), 감(甘), 문(文), 양(楊), 두(杜)씨 가문이 대성호족이다.

 
晉初,文立實作常伯,納言左右。楊宗符稱武陵。〔甘寧輕俠殺〕or〔甘寧亦縣〕人,在吳爲孫氏虎臣也。
진나라 초기에 문립(文立)이 상백(常伯)이 되어 좌우의 신하들에게 천자의 명령을 전달했다. 양종부(楊宗符)는 양무릉(楊武陵)으로 칭해졌다. 감녕(甘寧)은 경협으로 살인을 일삼았는데(감녕(甘寧) 또한 임강현사람인데) 오나라에서 장군이 되었다.

 
平都縣  蜀延熙時省。大姓殷、呂、蔡氏。
평도현(平都縣): 촉 연희(延熙)연간에 폐지됐는데 대성으로 은(殷), 여(呂), 채(蔡)씨 가문이 있다.

 
墊江縣  郡西北內水四百里。有桑蠶牛馬。
점강현(墊江縣): 강주현의 서북쪽으로 수로를 따라 400리에 위치해 있으며 누에를 치며 소와 말을 길렀다.

 
漢時,龔榮以俊才爲荊州刺史。後有龔揚、趙敏,以令德爲巴郡太守。
한나라때 공영(龔榮)이 뛰어난 재주로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됐고 이후에 공양(龔揚), 조민(趙敏)이 덕행으로 파군태수(巴郡太守)가 되었다.

 
淳于長寧雅有美貌。黎、夏、杜,皆大姓也。
순우장녕(淳于長寧)은 고상한 기풍이 있어 아주 우아했다. 려(黎), 하(夏), 두(杜)씨가 모두 대성이다.

 
樂城縣  在西州江三百里。延熙十七年省。
악성현(樂城縣): 강주현 서쪽 300리에 있으며 연희(延熙) 17년에 폐지 됐다.

 
常安縣  亦省。
상안현(常安縣): 악성현이 폐지 될 때 같이 폐지됐다.

ps. 청조 가경연간에 인쇄된 요본(廖本)을 보면 주석에 "按,此有誤也。考《三國志.甘寧傳》云:‘巴郡臨江人也。’當是人上脫 ‘甘寧縣’三字。”라고 하였으니 이미 당시에 人앞에 탈루된 글자가 있으며 임강현 사람으로서 오국의 대장이 된 인물은 감녕밖에 없다고 생각해 '甘寧縣'의 세글자를 보충해 넣었다. 임내강 선생은 감녕이 본래 임강현 출신의 도적이니 마땅히 폄어가 들어갔을거라고 여겨 人앞에 甘寧輕俠殺의 다섯글자를 보충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유림선생은 구본의 甘寧縣의 세글자 보충을 따르되 문장의 의미를 고려해 한글자를 추가해 甘寧亦縣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주장이 맞는지 알수 없어 두가지 견해를 모두 표시한다.


巴東郡,先主入益州,改爲江關都尉。
파동군(巴東郡):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고나서 강관도위(江關都尉)를 다시 두었다.

 
建安二十一年,以朐忍、魚複、漢豐、羊渠,及宜都之巫、北井六縣爲固陵郡。
건안(建安) 21년(216년) 구인(朐忍), 어복(魚複), 한풍(漢豐), 양거(羊渠)와 의도(宜都)의 무(巫), 북정(北井) 6현을 고릉군(固陵郡)으로 하였다.


武陵康立爲太守,治故陵溪會。
무릉(武陵)사람 강립(康立)을 태수로 하고 고릉계(故陵溪)가 합치는곳에 치소를 두었다.
 

章武元年,朐忍徐慮、魚複蹇機,以失巴名,上表自訟。先主聽複爲巴東。南郡輔匡爲太守。
장무(章武) 원년(221년) 구인(朐忍)사람 서려(徐慮), 어복(魚複)사람 건기(蹇機)가 파(巴)라는 이름을 잃은 것 때문에 표문을 올려 다퉜다. 유비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파동(巴東)으로 이름을 복구하고 남군(南郡)사람 보광(輔匡)을 태수로 삼았다.

 
先主征吳,於夷道還,薨斯郡。
유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러가서 이도(夷道)로부터 돌아와 파동군에서 죽었다.

 
以尚書令李嚴爲都督,造設圍戍。嚴還江州,征西將軍汝南陳到爲都督。
상서령(尚書令) 이엄(李嚴)을 영안도독으로 삼고 방어시설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이엄이 강주로 돌아간뒤에 정서장군(征西將軍) 여남(汝南)사람 진도(陳到)가 도독이 되었다.

 
到卒官,以征北大將軍南陽宗預爲都督。
진도가 임기중에 죽자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 남양(南陽)사람 종예(宗預)가 도독이 되었다.

 
預還,內領軍襄陽羅獻爲代。
종예가 내지로 돌아가자 내령군(內領軍) 양양(襄陽)사람 나헌(羅獻)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蜀平,獻仍其任,拜淩江將軍,領武陵太守。
촉한이 평정되자 나헌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능강장군(淩江將軍), 령무릉태수(領武陵太守)에 배임되었다.



ps.서한시대 어복현에 강관도위를 설치하고 파동군에 진수했는데 이제 유비가 구제에 의거하여 둔것이다.

강립(康立)이라는 사람은 역사서에 보이지 않는데 마땅히 요립의 오자일것이다. 삼국지 요립전을 보건대 요립은 무릉 원릉사람으로 건안 20년 유비에게 귀의해서 파군태수에 임명되었다 했으니 지금의 고릉군 역시 본래 파군에 속하는지라 진수가 세밀하게 분별하지 않은것 뿐이다. 진서 나헌열전을 보건대 이름이 나헌(羅憲)으로 기록되어 있다.


泰始二年,吳大將步闡、唐咨攻獻,獻保城。咨西侵至朐忍。
진무제 태시(泰始) 2년(266년) 오나라 대장 보천(步闡)과 당자(唐咨)가 나헌을 공격했는데 나헌은 도성을 보호했다. 당자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구인(朐忍)을 침공했다.

 
故蜀尚書郎巴郡楊宗告急於洛,未還,獻出擊闡,大破之。
그러므로 촉(蜀) 상서랑(尚書郎) 파군(巴郡)사람 양종(楊宗)이 낙양에 급한 사정을 고하니 돌아오기도 전에 나헌이 성문을 나가 보천을 공격하여 크게 깨트렸다.

 
闡、咨退,獻遷監軍、假節、安南將軍,封西鄂侯。
보천과 당자가 퇴각한후 나헌은 감군(監軍), 가절(假節), 안남장군(安南將軍)으로 옮기고 서악후(西鄂侯)에 봉해졌다.

 
入朝,加錫禦蓋朝服。
경성에 입조하자 어개(禦蓋:천자의 수레덮개)와 조복(朝服)을 하사받았다.

 
吳武陵太守孫恢寇南浦,安蠻護軍楊宗討之,退走。
오나라 무릉태수(武陵太守) 손회(孫恢)가 남포(南浦)를 노략질하니 안만호군(安蠻護軍) 양종(楊宗)이 이를 토벌해 퇴주시켰다.

 
獻因表以宗爲武陵太守,住南浦;誘恤武陵蠻夷,得三縣初附民。
나헌은 이 일로 인해 표를 올려 양종을 무릉태수로 삼고 남포에 주둔시킬 것을 청했다. 양종은 무릉의 이민족들을 잘 이끌고 어루만져 3개현의 백성들이 귀부해왔다.

 
獻卒,以犍爲太守天水楊攸爲監軍。
나헌이 죽자 건위태수(犍爲太守) 천수(天水)사람 양유(楊攸)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다.

 
攸遷涼州刺史,朝議以唐彬及宗爲代。
양유가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옮기자 조정은 당빈(唐彬)과 양종 중에서 후임자를 뽑고자 하였다.

 
武帝問散騎常侍文立曰:「彬、宗孰可用?」
사마염이 산기상시(散騎常侍) 문립(文立)에게 말하길 「당빈과 양종중에서 누가 쓸만한가?」하니

 
立對曰:「彬、宗俱立事績,在西不可失者。然宗才誠佳,有酒嗜。彬亦其人,性在財欲。惟陛下裁之。」
문립이 대답하여 말하길「당빈과 양종은 모두 공을 세웠기에 서쪽에서는 버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양종은 재주가 훌륭하지만 술을 좋아하고 당빈 역시 재주가 훌륭하나 천성이 재물을 탐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이를 헤아려 정하십시오.」하였다.

 
帝曰:「財欲可足。酒嗜難改。」遂用彬爲監軍。加廣武將軍。
사마염이 말하길 「재물을 탐하는 것은 만족시킬수 있지만 술을 좋아하는 것은 고치기 어렵다.」하고 마침내 당빈을 채용하여 감군(監軍)으로 삼고 광무장군(廣武將軍)을 더했다.

 
迄吳平後,省羊渠入南浦。
오나라가 평정된후에 파동군의 양거(羊渠)현을 폐지하고 남포현에 편입시켰다.

 
太康初,將巫、北井還建平,但五縣。
태강(太康)연간 초에 무현과 북정현을 건평군으로 되돌리니 파동군에는 현이 5개밖에 남지 않았다.

 
去洛二千五百里。東接建平。南接武陵。西接巴郡。北接上庸。其屬有奴、獽、夷、蜑之蠻。
파동군은 낙양으로부터의 거리가 2500리이고 동쪽으로 건평(建平)에 남쪽으로 무릉(武陵)에 서쪽으로 파군(巴郡)에 북쪽으로 상용(上庸)에 접했다. 그 소속으로는 노(奴), 양(獽), 이(夷), 단(蜑) 같은 이민족들이 있었다.



魚複縣  郡治。公孫述更名白帝。章武二年,改曰永安。
어복현(魚複縣): 군의 치소가 있는곳이다. 공손술(公孫述)이 백제(白帝)로 이름을 고쳤다. 장무(章武) 2년(222년) 영안(永安)으로 이름을 고쳤다.

 
咸熙初複。有橘官,鹽泉。又有澤水神,天旱,鳴鼓於旁即雨也。
함희(咸熙) 초에 어복현에 귤관(橘官)과 염천(鹽泉)이 있었다. 또한 택수신(澤水神)이 있어 가뭄이 들었을 때 물가에서 북을 두드리면 즉시 비가 왔다.

 
巴楚相攻,故置江關,舊在赤甲城,後移在江南岸,對白帝城故基。
파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공격했기 때문에 강관(江關)을 두었는데 옛날에 적갑성(赤甲城)에 있다가 후에 강남쪽의 언덕으로 옮겼는데 바로 백제성(白帝城)의 옛 터이다.



朐忍縣  郡西二百九十里。水道有東陽、下瞿數灘。
구인현(朐忍縣): 어복현의 서쪽 290리에 있다. 물길로는 동양탄(東陽灘)과 하구탄(下瞿灘)등이 있다.



山有大、小石城勢。故陵郡舊治,有巴鄉名酒、靈壽木、橘圃、鹽井、靈龜。
산에는 험저한 대석성산(大石城山)과 소석성산(小石城山)이 있다. 고릉군(故陵郡)의 옛날 치소가 있던 곳으로 명물로 파향명주(巴鄉名酒), 영수목(靈壽木), 귤포(橘圃), 염정(鹽井), 영귀(靈龜)가 있다.



湯溪鹽井,粒大者方寸。
탕계염정(湯溪鹽井)에서 나오는 소금의 알갱이는 크기가 사방이 한치에 이르는 것도 있다.

 
咸熙元年,獻靈龜於相府。
함희(咸熙) 원년(264년) 상부(相府)에 영귀(靈龜)를 헌상했다.

 
大姓扶、先、徐氏。漢時有扶徐,功在荊州,著名《楚記》。其屬有弜頭白虎複夷者也。
대성귀족으로는 부(扶), 선(先), 서(徐)씨가 있다. 한나라때 부서(扶徐)가 형주에 공이 있었는데 《초기(楚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소위 강두백호복이(弜頭白虎複夷)의 사람들도 여기에 속해있다.

 
漢豐縣  建安二十一年置。在郡西北彭溪原。
한풍현(漢豐縣): 건안(建安) 21년(217년)에 설치되었다. 어복현 서북쪽의 팽계(彭溪) 평원에 있다.

 
南浦縣  郡南三百里。晉初置武陵郡,主夷。
남포현(南浦縣): 어복현 남쪽 300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진나라 초기에 무릉군(武陵郡)을 설치하여 이민족을 주관하였다.

 
郡與楚接,人多勁勇,少文學,有將帥材。
무릉군은 초지방과 서로 인접해 있어 굳세고 용감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문학을 하는 선비가 적고 장수의 재목이 많았다.

 
〔羊渠縣  漢末置。平吳後省入南浦。
양거현(羊渠縣): 한나라 말에 설치되어 오나라를 평정한 이후 폐지되어 남포현에 편입되었다.

 
〔巫,北井  還屬建平郡。〕
무현(巫縣), 북정현(北井縣): 도로 건평군(建平郡)에 속하게 되었다.


涪陵郡,巴之南鄙。從枳南入,【折丹】〔溯舟〕涪水,本與楚商於之地接。
부릉군(涪陵郡)은 파군의 남쪽변방에 있다. 지현의 남쪽으로부터 들어가서 부수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본래 초나라의 상(商)지방과 접해있었다.


ps.折丹의 두글자를 유림선생의 견해에 의거하여 溯舟로 바꾼다.

 
秦將司馬錯取楚商於地爲黔中郡也。漢興恒有都尉守之。
진나라 장군 사마조(司馬錯)가 이곳에 이르러 상지방을 탈취하고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했다. 한나라 이후에 항상 도위(都尉)를 두어 주둔하게 했다.

 
舊屬縣五。去洛五千一百七十里。東接巴東。南接武陵。西接牂柯。北接巴郡。
옛날에 5개의 속현이 있었고 낙양으로부터 5170리 떨어져있다. 동쪽으로 파동군에 남쪽으로 무릉군에 서쪽으로 장가군에 동쪽으로 파군에 접하고 있다.

 
土地山險、水灘。人多戇勇,多獽蜑之民。
토지는 산이 험하고 물이 급한지라 사람중에 질박하고 용감한 사람이 많았다. 양(獽)족과 단(蜑)족이 많이 살았다.

 
縣邑阿黨,鬥訟必死。無蠶桑少文學。無蠶桑。惟出茶、丹、漆、蜜、蠟。
현의 사람들은 파당을 지어 다툼이 생기면 반드시 필사적으로 도왔다. 잠업을 영위하지 않고 문학을 배우지 않았으며 오직 차(茶), 단사(丹), 옻(漆), 꿀(蜜), 밀랍(蠟)을 생산했다.

 
漢時,赤甲軍常取其民。蜀丞相亮亦發其勁卒三千人爲連弩士,遂移家。
한나라때 적갑군(赤甲軍)으로 항상 부릉군의 주민들 선발했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 또한 경졸 3천명을 선발하여 연노(連弩)병으로 삼았으며 마침내 이들을 한중(漢中)으로 이주시켰다.

 
延熙十三年,大姓徐巨反。車騎將軍鄧芝討平之。
연희(延熙) 13년(277년) 대성귀족인 서거(徐巨)씨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거기장군(車騎將軍) 등지(鄧芝)가 토벌하여 평정했다.

 
見玄猿緣其山,芝性好弩,手自射猿,中之。猿子拔其箭,卷木葉塞其創。
검은 원숭이가 산에 있는 것을 보고 등지가 활 쏘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원숭이를 향해 화살을 발사해 명중시켰다. 화살을 맞은 원숭이의 새끼가 그 화살을 뽑고 나뭇잎을 말아 상처를 감싸주었다.

 
芝歎曰:「嘻!吾傷物之性,其將死矣。」
등지가 탄식하여 말하길 「아~! 내가 사물의 본성을 상하게 했으니 장차 죽게 되겠구나!」하였다.

 
乃移其豪徐、藺、謝、範五千家於蜀,爲獵射官。
곧 부릉군의 호족인 서(徐), 린(藺), 사(謝), 범(範)가문을 포함한 5천여가를 촉(蜀)으로 이주시키고 엽사관(獵射官)으로 삼았다.

 
分羸弱配督將韓蔣等,名爲助郡軍;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한사람들을 독장(督將) 한장(韓蔣) 등에게 배분하여 조군군(助郡軍)이라 하였다.

 
遂世掌部曲,爲大姓。
이로 인해 한 장들은 세세토록 부곡을 관장하는 대성이 되었다.

 
晉初,移弩士於馮翊蓮勺。
진나라 초기에 연노병들을 풍익군(馮翊郡) 연작현(蓮勺縣)으로 옮겼다.

 
其人性質直,雖徙他所,風俗不變。
그들의 사람됨이 질박하고 강직하여 비록 사는 땅을 옮겨도 풍속이 바뀌지 않았다.

 
故迄今在蜀、漢、關中、涪陵,及爲軍在南中者猶存。
그러므로 지금까지 촉(蜀), 한(漢), 관중(關中), 부릉(涪陵)에서부터 제갈량의 남정군으로서 그 지방에 남겨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풍속이 변하지 않았다.

 
山有大龜,其甲可卜;其緣可作釵,世號靈釵。
산에는 커다란 거북이 있는데 그 껍질로 점을 칠수 있다. 그 껍질의 주위로 비녀를 만들 수 있는데 세상사람들이 ‘영차(靈釵)’라고 부르는 것이다.


涪陵縣  郡治。
부릉현(涪陵縣): 군의 치소가 있다.


丹興縣  蜀時省。山出名丹。
단흥현(丹興縣): 촉국의 시대에 폐지했다. 산에서 유명한 단사가 생산된다.


漢平縣  延熙十三年置。
한평현(漢平縣): 연희(延熙) 13년(277년)에 설치했다.

 
萬寧縣  孝靈帝時置,本名永寧。
만녕현(萬寧縣): 효령제(孝靈帝)때에 설치했는데 본명은 영녕(永寧)이다.

 
漢發縣  有鹽井。縣北有獽、蜑,又有蟾夷也。
한발현(漢發縣): 염정(鹽井)이 있다. 현의 북쪽에 양(獽)족, 단(蜑)족과 섬(蟾)족이 산다.

 
〔漢葭縣  省入涪陵。〕
한가현(漢葭縣): 폐지되어 부릉현으로 편입되었다.


巴西郡,屬縣七。去洛二千八百一十五里。
파서군(巴西郡)은 속현이 7개로 낙양으로부터 2815리 떨어져있다.

 
東接巴郡。南接廣漢。西接梓潼。北接漢中、西城。
파서군은 동쪽으로 파군(巴郡)에 남쪽으로 광한(廣漢)에 서쪽으로 재동(梓潼)에 북쪽으로 한중(漢中), 서성(西城)에 접해있다.

 
土地山原多平,有牛馬桑蠶。
토지에 평원이 많고 소나 말을 키우고 누에를 쳤다.


其人,自先漢以來,傀偉俶儻,冠冕三巴。
파서군의 사람들은 한나라 이래로 덩치가 크고 재주가 빼어난 것으로 3파(三巴)에서 으뜸이었다.

 
及郡分後,叔布、榮始、周群父子、程公弘等,或學兼三才,或精秀奇逸。
파군이 분할된 이래로 숙포(叔布), 영시(榮始), 주군(周群) 부자, 정공홍(程公弘)등의 사람들이 천지인의 삼재를 깨우쳐 빼어나고 기이한 재주가 있었다.

 
其次,馬盛衡,承伯,才藻清妙;
그 다음으로는 마성형(馬盛衡), 승백(承伯)이 문채가 청묘하고

 
龔德緒兄弟,英氣曄然;
공덕서(龔德緒) 형제가 영명한 기운이 범인을 초월했고

 
黃公衡應權通變;
황공형(黃公衡)은 임시응변에 통달했으며

 
馬德信、王子均、勾孝興、張伯岐建功立事;
마덕신(馬德信), 왕자균(王子均), 구효흥(勾孝興), 장백기(張伯岐)가 공훈을 세워

 
劉二主之世,稱美荊楚。
유비와 유선이 다스리던 시절에 미명이 형초(荊楚)지방에 칭해졌다.

 
若乃先漢以來,範三侯、馮車騎、馬鎮南,皆植斯鄉,故曰「巴有將,蜀有相」也。
한나라 이래로 범삼후(範三侯), 풍거기(馮車騎), 마진남(馬鎮南)이 모두 이 지방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말하길 「파(巴)에서는 장군이 나고 촉(蜀)에서는 재상이 난다.」하였다.

 
及晉,譙侯修文於前,陳君煥炳於後,並遷雙固,倬群穎世。
진나라 때에 이르러 초후(譙侯)가 앞에서 문물전장을 닦고 진군(陳君)이 뒤에서 이를 밝히니 사마천, 반고와 더불어 할 만하고 일세에 빼어난 사람이었다.

 
甄在傳記,縉紳之徒,不勝次載焉。
전기를 싣는데 있어 벼슬한 사람들은 모두 실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閬中縣  郡治。
낭중현(閬中縣): 군의 치소가 있다.

 
有彭池大澤。名山靈台,見文緯書讖。
물을 끌어올 커다란 연못이 있다. 명산으로는 영대산(靈台山)이 있는데 문위서참(文緯書讖)에 기록되어 있다.

 
大姓有三狐、五馬,蒲、趙、任、黃、嚴也。
대성호족으로는 3개의 호(狐)씨, 5개의 마(馬)씨, 포(蒲)씨, 조(趙)씨, 임(任)씨, 황(黃)씨, 엄(嚴)씨 등이 있다.

 
西充國縣  故充國,和帝時置。有鹽井。大姓侯、譙氏。〔漢末分置南充國時改名。〕
서충국현(西充國縣): 옛날의 충국(充國) 한나라 화제때에 설치했다. 염정(鹽井)이 있다. 대성호족으로는 후(侯)씨, 초(譙)씨가 있다. 한나라 말 남충국(南充國)을 설치할 때 이름을 바꿨다.

 
〔南充國縣  漢末置。大姓張氏。〕
남충국현(南充國縣): 한나라 말에 설치한 현으로 대성호족으로 장(張)씨가 있다.

 
安漢縣  號出人士。大姓陳、範、閻、趙。
안한현(安漢縣): 차례로 인재가 나왔다. 대성호족으로 진(陳)씨, 범(範)씨, 염(閻)씨, 조(趙)씨가 있다.

 
平州縣  〔太康元年置。〕
평주현(平州縣); 태강 원년(280년)에 설치됐다.

 
其二縣爲郡。
파서군 중의 2개현(탕거현,한창현)으로 별개의 군(郡:탕거군)을 만들었다.


宕渠郡,蜀先主置。以廣漢王士爲太守。
탕거군(宕渠郡)은 유비가 설치하여 광한(廣漢)사람 왕사(王士)를 태수로 삼았다.

 
郡建九年省。延熙中複置。尋又省永興元年,李雄複置。今遂爲郡。
탕거군이 설치된지 9년후 폐지됐고 연희(延熙) 연간에 재설치 했다가 얼마 있다 영흥(永興) 원년(304년)에 폐지되고 이웅(李雄)이 다시 설치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다.

 
長老言:「宕渠蓋爲故賨國。今有賨城、盧城。」
노인의 말에 「탕거군은 대체로 옛날의 종국(賨國)이라서 지금 종성(賨城)과 노성(盧城)이 있다.」고 한다.

 
秦始皇時,有長人二十五丈見宕渠。
진시황 시대에 25장이나 하는 거인이 탕거(宕渠)에 나타났다.

 
秦史胡毋敬曰:「是後五百年外,必有異人爲大人者。」及雄之王,祖世出自宕渠,有識者皆以爲應之。
진나라의 태사령 호무경(胡毋敬)이 말하길 「이후 오백년 뒤 반드시 기인이 있어 왕을 칭할 것이다.」고 했는데 이웅이 왕이 되던때에 이르러 그의 선조가 탕거에서 나왔기에 식견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무경의 말이 효험이 있다고 여겼다.

 
先漢以來,士女賢貞。縣民、車騎將軍馮緄、大司農玄賀、大鴻臚龐雄、桂陽太守李溫等,皆建功立事,有補於世。
한나라 이래로 주민들이 모두 현명하고 올곧아 현민중에서 거기장군(車騎將軍) 풍곤(馮緄), 대사농(大司農) 현하(玄賀), 대홍려(大鴻臚) 방웅(龐雄), 계양태수(桂陽太守) 이온(李溫) 등의 사람들이 모두 공을 세워 세상에 도움이 되었다.

 
緄、溫各葬所在。常以三月,二子之靈還鄉里,水暴漲。
풍곤과 이온은 각각 그들의 부임지에 묻혔는데 항상 3월이 되면 두명의 영혼이 향리로 돌아가는지라 물이 거세게 들끓었다.

 
郡縣吏民,莫不於水上祭之。其列女節義在《先賢志》。
군현의 관리와 백성들이 물 위에서 그들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열녀의 절의에 관해서는 《선현지(先賢志)》에 기록되어 있다.

 
宕渠縣  郡治。有鐵官。石蜜,山圖所采也。
탕거현(宕渠縣): 군의 치소가 있다. 철관(鐵官)이 있다. 산도(山圖)가 채집한 석밀(石蜜)이 생산된다.

 
漢昌縣  和帝時置。大姓勾氏。
한창현(漢昌縣): 한나라 화제때에 설치됐고 대성호족으로 구(勾)씨가 있다.

 
宣漢縣  今省。
선한현(宣漢縣): 지금 이미 폐지 되었다.



右巴國,凡分爲五郡,二十三縣。
이상 파국(巴國)은 모두 5개의 군, 23개의 현으로 나뉘어졌다.

 
譔曰:巴國,遠世則黃【炎】帝之支封;在周則宗姬之戚親;故於春秋,班侔秦楚,示甸衛也。若蔓子之忠烈,範目之果毅;風淳俗厚,世挺名將;斯乃江漢之含靈,山嶽之精爽乎?觀其俗,足以知其敦壹矣。昔沙麓崩,卜偃言:「其後當有聖女興。」元城郭公謂王翁孺屬當其時。故有政君。李雄,宕渠之廝伍,略陽之黔首耳。起自流隸,君獲士民;其長人之魄,良有以也?
찬(譔)에 이르길 :파국(巴國)은 머나먼 옛날 황제의 자손이 봉해진 곳이고 주나라때에 왕실의 친족이 봉해진 곳이라 춘추(春秋)에서도 진나라나 초나라와 비슷한 반열에 두었으니 전복(甸服)과 위복(衛服)에 해당한다. 만자(蔓子) 같은 충렬지사와 범목(範目) 같은 과감한 사람이 나오고 풍속은 순후하며 세세토록 명장이 나오는 것은 강한(江漢)의 영기와 산악(山嶽)의 정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풍속을 관찰하건대 족히 돈후함을 알수 있다. 옛날 사녹산(沙麓山)이 무너졌을 때 복언(卜偃)이 말하길 「이후에 마땅히 성녀가 나타날 것이다.」하였는데 원성(元城)사람 곽공(郭公)이 왕옹유(王翁孺)에게 지금이 마땅히 그 때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정군(政君:왕옹유의 딸)이 황후가 되었다. 이웅(李雄)은 탕거현의 역을 담당한 사람이었는데 약양(略陽)의 평민이었다. 유민들속에서 일어나 군주가 되어 백성을 얻었으니 그 거인의 기백이 진실로 이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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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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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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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o

2013.09.02
12:08:20
(*.36.146.12)
강립이라니 요립이겠지

코렐솔라

2013.09.02
12:10:15
(*.166.245.166)
아래 주석이 있네요. 아마도 요립의 오기일 것이다라고 되어있군요

olo

2013.09.02
12:11:21
(*.36.146.12)
廖立 廖音理救反。字公淵,武陵臨沅人。
領巴郡則有闇昧闟茸其事,

코렐솔라

2013.09.02
12:12:28
(*.166.245.166)
화양국지 원문이 武陵康立爲太守,治故陵溪會。 이걸로 알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dragonrz님도

강립(康立)이라는 사람은 역사서에 보이지 않는데 마땅히 요립의 오자일것이다. 삼국지 요립전을 보건대 요립은 무릉 원릉사람으로 건안 20년 유비에게 귀의해서 파군태수에 임명되었다 했으니 지금의 고릉군 역시 본래 파군에 속하는지라 진수가 세밀하게 분별하지 않은것 뿐이다. 진서 나헌열전을 보건대 이름이 나헌(羅憲)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주석을 달아놓으셨네요. 그냥 요립인데 전사과정에 잘못됐겠지 하고 넘어가면 될 듯 합니다.

olo

2013.09.02
12:17:03
(*.36.146.12)
그렇군요 이미 주석도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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