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보충 자료 - [화양국지]유후주지(연희 5,9,14년 번역 없음)

자료 출처: 삼국지 갤러리 연인 ㅈ

자료 출처(경요 원년 이후): 선비욜롱님


後主は諱を禪,字は公嗣という.先主の太子であった.甘夫人が生んだ所である也.襲位した時には年十七であった.


후주는 휘를 선, 자를 공사라 한다. 선주의 태자였다. 감부인의 자식이다. 열일곱에 군왕의 자리를 이었다.



建興元年【223年】夏五月,後主は即位した.(先主の)皇后[呉氏]を尊んで曰く皇太后とした.大赦し,改元した.於[歳](この歳は),旧本は並んで只だ於の字があるだけである.《三国志》に依れば当に歳の字が有るべきだ.茲補.魏の黄初四年,呉の黄武二年である也.


건흥원년(223년) 하오월, 후주가 즉위했다. (선주의) 황후 오씨를 높혀 이르길 황태후라 하였다.

대사면을 하고 개원했다. 이때는 위의 황초4년, 오의 황무2년이었다.

(구본은 於자만을 쓰고 있으나, 삼국지에 의하면 歳자를 넣어야 한다. 자보)



皇后に張氏を立てた,車騎将軍此下には各旧本は並んで張の字が有る.廖本には無い.張飛の女である也.

장씨를 황후로 세웠다. 거기장군(이하에는 각 구본에 더불어 장(장비)라 더하고 있다. 요본에는 없다.) 장비의 딸이다.


丞相の諸葛亮を武郷侯に封じた.


승상 제갈량을 무향후에 봉했다.



中護軍の李厳に假節(節を仮し),光祿勳を加え,都郷侯に封じ,督永安事とした(永安事を督させた).


중호군 이엄에게 가절, 광록훈을 더하여 도향후에 봉하고, 독영안사로 삼았다.

(영안의 일을 감독케 했다라고해야하나여)

中軍師にして、衛尉である、魯国出身の劉琰も亦た都郷侯に封じられた.


중군사에 위위인 노국출신의 유염을 또 도향후에 봉하였다.



中護軍の趙雲は[征南将軍と為り,永昌亭侯に封じられた.]江州都督の費観,屯騎校尉で、丞相長史の王連,中部督で襄陽出身の向寵,及び魏延、呉懿も皆都亭侯に封じられた.


중호군 조운(정남장군이 되어, 영창정후에 봉하였다.),  강주도독인 비관, 둔전교위이자 승상장사인 왕연, 중부독인 양양출신의 상총,

더불어 위연, 오의도 모두 도향후로 봉하였다.



楊洪、王謀等は関内侯となった.

양홍, 왕모 등은 관내후가 되었다.


南中諸郡が並んで叛乱した.


남중 여러 군이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諸葛亮は以て新たに大喪に遭うことになったため,未だ兵を加えるを便じなかった.


제갈량은 이때 대상을 당하여 아직 병력을 보태기(일으키기) 곤란했다.



尚書で何 焯過録元豊本には,此下に方圈が有る;示字不明.蓋し《後主伝》では“尚書郎”と作っている.《鄧芝伝》では“尚書”と作っている.昔の人は之を疑った 也.今按ずるに,蜀時には尚書令を有しており,任は機衡を總めることだった.其の下に尚書郎が有った,亦た“尚書”と省いて称するのを得る.脱(字)が有 るに非ず也.南陽出身の鄧芝を遣わして呉に於いて固く好みを(結ばせた).


상서인(하작과록원풍본에는, 이하에 방원()이 있다. 본래글자 불명, 생각건대 <후주전>에는 “상서랑”이라고 되어있다. <등지전>에는 상서라 되어있다.

옛사람은 이를 이상히 여겼다. 생각건대 촉대에는 상서령이 있어, 그 임무는 기형(천문대?)을 통괄하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 상서랑이라는 관직이 있었다. 또한 “상서”라고 생략하여 칭하였다. 탈자가 있음이 틀림없다.)남양출신인 등지를 오에 보내어 우호를 다졌다.



呉主の孫権は曰く:“吾は誠に願うのは蜀と和親することだ.但だ主が幼く国が小さいので,自存しないのではないかと慮っている.”


오주 손권이 말하길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촉과의 화친이다. 다만,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작아, 형세가 좋지 않을듯하여 걱정하고 있다.”



鄧芝は対して曰く:“呉蜀の二国は,[四州]旧本並脫此“四州”二字.依《鄧芝伝》補.之地です.呉には三江之阻みが有りますし,蜀には重險之固めが有ります.大王は命世之英でありまして,(われらが丞相)諸葛は元豊及び劉、李、銭、《函》には本もと亮の字が有った.張、呉、何、王、浙、石本には無い.一時之【桀】 [傑] です.元豊、廖本は桀と作り,他の各本は皆傑と作る.此の二長を合わせて,共に唇歯と為せば,進んでは天下を兼并することも可ですし,退いては鼎足して而して峙すことも可でしょう.劉、張、呉、何、《函》、王、浙、石は跱と作る.李、廖は本より峙と作る.大 王が魏に於いて臣服する如きなれば,魏は則ち上は大王が入朝されんことを望み,其に次いでは太子が入侍することを求めましょう.若し其の従わざれば,則ち 叛くのを伐つのだとの辞を奉じることでしょう.蜀は必ずや流れに順い,可なるに見えれば(可能であると分かったなら)而して進むことでしょう.此れの如く なれば,江南之地は復た大王之有するのに非ざることになりましょう也.”


등지가 답하여 말하기를 “오촉의 두 나라는 4주-네 개의 주-(구본은 모두 4주 두 글자를 누락하고 있다. <등지전>에 의함)의 땅입니다.

오에는 세 물길의 험함이 있고, 촉에는 험난한 산의 견고함이 있습니다.

대왕은 영명하고 뛰어난 분이며, (우리나라의 승상) 제갈은(원풍을 비롯하여 유, 이, 전,<함>에는 본래 량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장, 오, 하, 왕, 절, 석본에는 없다. )일세의 인물입니다.

(원풍, 요본에는 桀이라 쓰여있고, 그 외의 각본에는 모두 傑이라 쓰여있다. )

이 두 가지 장점을 합하여, 함께 순치와 같이 더불면, 나가면 천하를 겸병하고, 물러서면 솥발처럼 우뚝 서는 것도 가능할 터입니다.

(유, 장, 오, 하, <함>, 왕, 절, 석본은 跱치라 썼고, 이, 요본은 峙치라 썼다.) 대왕이 위국에 신종한다면 위는 곧 대왕이 입조할 것을 바랄 것이며, 이후 태자가 입시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만일 이를 따르지 않으면 곧 배반한 것을 정벌한다는 사辞를 올릴 것입니다. 촉은 필시 대세에 따라, 뭔가 보인다면(가능하다 판단된다면) 출병할 터입니다.

이처럼 된다면 강남의 땅은 대왕의 것이 아니게 될 터입니다.



呉主は大いに悦ぶと,蜀と和して報い,元豊、銭、劉、李、《函》、廖本作報.呉、何、王、浙、石本作親.張佳胤所改也.使聘歳通(聘問をおこなわせて歳毎に通礼をおこなうこととなった).鄧芝は後に累ねて往った.


오주는 크게 기뻐하며 촉과 화의를 맺었음을 알리고, (원풍, 전, 유, 이, <함>, 요본은 보報라 쓰고, 오, 하, 왕, 절, 석본은 친親이라 썼다. 장규란이 이를 고쳤다.)

사빙세통(예를 갖추어 매해 통례를 행하는 것)[하게 되었다.-연인ㅈ 수정-]


등지는 후에 거듭 찾아왔다.



孫権曰く:“若し魏を滅ぼした後には,二主が分治するというのも,亦た楽しいことではないか乎.”


손권이 말하길 “만약 위를 멸한 후에는 두 군왕이 나누어 다스리는 것도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鄧芝は対して曰く:“魏を滅ぼした後のことについては,大王は天命というものを未だ深く識らないようすですが,戦爭がただ方じられて始まるだけです耳.”


등지가 대답하여 말하길 “위를 멸한 후의 일에 대해서는, 대왕은 천명이라 하는 것을 아직 깊히 생각지 않으시는 듯 하나,
 
전쟁이 그저 급작스레 일어나는 것입니다."




孫権曰く:《鄧芝伝》は“権大笑曰”と作る.“君之誠懇というのは,乃ち此に於けるに至るものなのか.”


손권이 말하기를 (<등지전>은 “손권이 웃으며 말하길”이라고 적고 있다.) “그대의 성실함誠懇이 이와 같구나.”



書を諸葛亮に与えて曰く:“丁宏は《鄧芝伝》と銭寫本はと作る.則ち読むこと肱の如し.掞張であり,元豊本此二字不明.銭寫本倒作“丁掞x張.”張佳胤加小注云:“《蜀志》宏作.孫権が謂うには丁宏の言は浮豔が多い.”呉、何、王、浙、石本は並んで此注が有る.他の各本には無い.陰化は元豊本は險と作る.他の各本も《鄧芝伝》と同じくして倶に化と作る,李が改める所で,各本は遵んでいるのだ也.不【実】[尽] であった,《鄧芝伝》では尽と作る.二国を和合させたのは,惟だ鄧芝が有るだけ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며 말하길 “정굉은 (<등지전>과 전사본에는 x(뭔글자인지 -.-;;)라 적고 있다. 곧, 굉肱이라 읽는다.)

허황된 자로,(원풍본엔 이 두 글자가 불명. 전사본은 ‘丁掞張’이라 적고 있다. 장규란이 가한 소주에 이르기를 ‘<촉지>에 굉宏을 x라 하였다.

손권이 말하기를 정굉의 언사는 허탄함이 많다.’ 오, 하, 왕, 절 석본은 모두 이러한 주를 달고 있다. 이외 다른 여러 본에는 없다.) 참됨이 없었다.

(<등지전>에는 진尽이라 적고 있다.)

두 나라를 화합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등지가 필요할 따름이다.”


二年【224年】,丞相諸葛亮は開府し,益州牧を領した.事無巨細,咸於亮.諸葛亮は乃ち百姓を撫すと,儀軌を示し,官職を約し,権制を従えた.


2년(224년), 승상 제갈량이 부를 열고, 익주목을 겸했다.
 
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제갈량이 일체 사무를 결정했다.
 
제갈량은 백성을 위무하고, 의궤(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줄이고, 권제를 따랐다.(일에 따라 임기응변의 정책을 제정했다.)



《三国志‧亮伝》陳寿評語此下有“開誠心,布公道”六字.


(<삼국지 제갈량전> 진수의 평에 이르기를 “開誠心,布公道”의 여섯 글자로 말했다.)



忠を尽くして時(時勢に)に益した者は,仇と雖も (元豊与廖本作仇.他各本作).必ず賞した


충을 다하고 시세에 이득이 되는 자는 원수라 하여도 (원풍과 요본에는 구仇라, 다른 본에는 수讎라 하였다.) 반드시 상을 주었다.



法を犯して怠慢であった者は,親しいと雖も必ず罰した;罪に服して輸情した(呉、何、王、浙、石本作“辞”.)者は,(その罪が)重いと雖も必ず釋し;遊辞巧飾な者は,★親しいと雖も必ず戮した.


법을 범하여 태만한 자는 친족이라 하여도 벌하였다.

죄를 인정하여 개전의 정을 보이는(오, 하, 왕, 절, 석본에는 “사辞)라 한다.) 자는 (그 죄가) 중하다 하여도 반드시 용서하였다.

죄지은 바에 대해 핑계대는 자는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해도 반드시 죽였다.



[마스텆의 정오표: ★親しいと雖も必ず戮した.---이 부분은 倭國 중궈의 실수. 원문은 遊辭巧飾者、雖輕必戮이므로, 輕しと雖も必ず戮した)라고 쓰는 것이 옳지 않을지? 왜국 중궈님하!!!]




善は微かでも而して賞しないことは無く,惡は纖であっても而して貶しめないことは無かった.庶事精練,物は《三国志》は(究を)理と作る.其の本を究めた.循名には責実し,虚偽は不歯(歯牙にもかけなかった).


선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을 행해도, 보상을 하지 않음이 없었고, 악한 일은 작은 것이어도 꼭 벌했다.
 
세세한 사정에 모두 정통하여 일에 있어(<삼국지>는 理라 쓴다.) 그 근본을 궁구하였다.

평판과 실제가 일치하는가 조사하여, 거짓이나 작위스러운 것이 있는 경우에는 일체 가까이 하지 않았다.(입도 대지 않았다.)



終乎《三国志》は於と作る.封域之内(終には封域の内において<乎>),(此の下《三国志》には咸の字が有る.) 畏れられながら而して之を愛されることになった.


영내의 백성들은 결국 모두 그를 경외하며 경애하게 되었다.

(終乎封域之内를 <삼국지>는 於封域之内라 썼다.)

(이 뒤에 <삼국지>에는 모두咸라는 글자가 더하여 있다.)



刑政は峻しいと雖も而して怨む者は無く,以其用心平、勧戒明也.


형벌과 정치가 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두려워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그 마음씀이 공평하고 징벌이 명확한 때문이었다.



尚書郎の蔣琬及び広漢出身の李邵、巴西出身の馬【勳】([斉]旧各本は並んで勳と作る.茲拠《三国志‧楊戲伝》は改めて斉と作る.)を辟招して掾と為し,南陽出身の宗預を主簿と為したのは,皆徳挙というものである也.


상서랑 장완을 비롯하여 광한출신의 이소, 파서출신의 마동([제] 예전 각 본에는 동이라 썼다. <삼국지 양희전>은 이를 고쳐 제라고 썼다.)을 초빙하고

남양출신의 종예를 주부로 삼은 것은 모두 덕거(효렴같은 방식으로 덕있는 자를 추천하는 것)에 의한 것이다.



秦宓が別駕と為り,犍為出身の五(元豊与劉、李本作王.他各本作五.)梁が(顧広圻校注云:“《贊》、《目錄》作伍梁.”謂常氏《先賢志》及《士女目錄》.)功曹と為り,梓潼出身の杜微が主簿と為ったが,皆州の俊彦であった也.


진 복이 별가가 되었고, 소위출신의 오량(원풍, 유, 이 본에는 王씨라 한다. 다른 본은 五라 한다.)이 (고광기 교주에 이르기를: “<찬>, <목록> 에 오伍량이라 한다,” 위상씨<선현지>및 <사녀목록>)을 공조로 삼고, 재동출신의 두미가 주부가 되었는데, 모두 그 주의 준재들이었다.



而して江夏出身の費禕、南郡出身の董允、郭攸之が始まりに侍郎と為って,日月を贊揚したのである.


또한 강하출신의 비위, 남군출신의 동윤, 곽유지가 비로소 시랑(황문시랑!?)이 되어, 그 현명함을 칭찬받았다.



呉は中郎将の張温を来聘に遣わして,鄧芝(の訪問)に報いた也.


오는 중랑장 장온을 파견하여 입조하여 등지(의 방문)에 보답하였다.



将に返らんとするに,百官に餞(別)を命じた焉.惟だ秦(廖本外各本皆無秦字.)宓だけが未だ往かなかったため,諸葛亮は累ねて之を催した.張温が問うて曰く:“彼は何人でしょうか也?”



중랑장이 돌아갈 때, 백관에 환송을 명했으나, 오직 진(요본외의 모둔 본에는 秦자가 없다)복만이 오지 않았기에, 제갈량은 거듭 그를 재촉했다.



張温が問うて曰く:“彼は何人でしょうか也?”


장온이 물어 말하기를 “그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諸葛亮曰く:“益州の学士です(各旧本此下有者字.廖本無.)也.”


제갈량이 말하기를 “익주의 학사입니다.(각 구본에는 이하 者자가 있었고, 요씨본에는 없다.)



至るに及び,張温は秦宓に問うて曰く:“君は学んだのですか乎?”


이윽고 그가 도착하자, 장온은 진밀에게 말하길 “당신은 학문을 하고 있소?”



答えて曰く:“五尺の童子も皆学ぶ,何ぞ況んや小人をや?”


답하여 말하기를 “오척의 동자도 배우니, 오직 나만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張温曰く:“天には頭が有るとされますが乎,それは何方に在るのでしょうか也?”


장온이 말하길: “하늘에는 머리가 있다하는데, 그것이 어느방향을 향하고 있소?”



秦 宓曰く:(此下呉、何、王、浙、石本有“在西”二字.係張佳胤妄增.《三国志‧秦宓伝》の文は作る:“温復問曰:天有頭乎?宓曰:有之.温曰:在何方也. 宓曰:在西.”常氏併作一問,省其答語也.)“《詩》は云う:乃ち眷西して顧みる.だから其が西に在るのを知っています.”


진 복이 말하길(이하 오, 하, 왕, 절, 석본에는 “서쪽에 있다.”라고 써있다. <삼국지:진밀전>의 글은 다음과 같다. “장온이 묻기를 하늘에 머리가 있는가, 복이 답하길 있다. 온이 말하길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복이 답하길 서쪽이라.”) “시경에 이르길: 서쪽을 돌아본다(乃眷西顧)라 했으므로 서쪽이라 알고 있소.”



又た曰く:“天には耳が有るのでしょうか乎?”


또 묻기를 “하늘에 귀가 있소?”



秦宓曰く:“《詩》は云わずや乎:鶴は九皋に鳴き,声は天に<於>聞こゆ.若し其れ耳無くば,何をか以って之を聴くのでしょう?”


진밀이 말하길 “시경에 이렇듯 이르지 않소? 학이 아홉 번 우는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 鶴鳴九皋、聲聞于天)고. 만약 귀가 없다면 어찌 들리겠소?



又た曰く:“天には足が有るのでしょうか乎?”


또 묻기를 “하늘에는 발이 있소?”



曰く:“《詩》は云わずや乎:(元豊本及銭、劉、李、《函》本作“《詩》不云乎”,張、呉、何、王本作“《詩》云”二字).天歩艱難,之子不猶.若し其に足が無ければ,何をか以って之に歩まんか?”


답하길 “시경에 이르기를 (원풍본 및 전, 유, 이 <함>본에는 ”시경이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로, 장, 오, 하 왕본에는 “시경에 나오길”이라 말하고 있다.)
 
天歩艱難,之子不猶(하늘의 걸음은 괴로워 느리나, 멈추지 않는다인가? 몰라, 우와아아앙 ㅜ.ㅜ)이라 한다.
 
만약 발이 없다면 무엇으로 걷겠는가?



又曰く:“天には姓が有るものでしょうか乎?”


또 말하기를 “하늘에는 성이 있는가?”



曰く:“姓は劉でしょう.”


말하기를 “성은 유劉씨오.”



“何をか以って之を知るや?”


“어찌 그것을 아오?”



曰く:“其の子(=天子)の姓が劉だからです.”本伝作“天子姓劉”.


말하기를 “천자의 성이 유씨이기 때문이오.” (본전에 말하기를 “천자성유”라 한다.)



又曰く:“日が生まれるのは東に於けるや乎?”


또 말하기를 “해가 태어나는 곳은 동쪽이 아니오?”



曰く:“生まれるのは東に於けると雖も,終には本伝作而.西に於いて没するのです.”


말하기를 “태어나는 곳은 동쪽에 있으나, 결국에는 서쪽으로 지는 것이오.”



問に答えること応声が響くが如くであり,そのため張温は大いに敬服したのである.秦宓は亦た尋遷して右中郎将,長水校尉,大司農となった.


물음에 답하는 것은 (상대의) 소리에 응하여 울리는 듯 하였다.

때문에 장온은 크게 경복하였다. 진밀은  장수교위, 대사농에 올랐다.


三年春、長水校尉廖立坐謗訕朝廷、改徙汶山、立自荊州、 與龐統竝見知〔一〕、而性傲侮、後更冗散怨望〔二〕、故致黜廢、三月、亮南征四郡、以弘農太守楊儀爲參軍、從行、步兵校尉襄陽向朗爲長史、統留府事、秋、 南中平、軍資所出、國以富饒、冬、亮還、至漢陽、與魏降人李鴻相見、說新城太守孟達委仰於亮無已、亮方北圖、欲招達爲外援、謂參軍蔣琬・從事費詩曰、歸、 當有書與子度相聞、對曰、孟達小子、昔事振威、不忠、後奉先帝、背叛、反覆之人、何足與書、亮不答、詩數率意而言、故凌遲於世、十有二月、亮至、羣官皆道 迎、而亮命侍郞費禕參乘〔三〕、禕官小年幼、衆士於是莫不易觀、



三年春、長水校尉廖立坐謗訕朝廷、改徙汶山、

三年春、長水校尉廖立、朝廷を謗訕するに坐し、改めて汶山に徙さる。


(건흥)3년(225) 봄, 장수교위 요립이 조정비방의 죄에 연루되어 문산군에 유배되었다.


立自荊州、與龐統竝見知〔一〕、而性傲侮、

立、荊州自り龐統と竝に見知せらるも、性は傲侮なり。


요립은 형주에 있을 무렵부터 방통과 함께 이름을 날렸으나, 성정이 방만하였다.



後更冗散怨望〔二〕、故致黜廢、

後、更に冗散により怨望し、故に黜廢を致す。


후에 한직에 옮겨진 것을 원망하여, 결국 면직되었다.



三月、亮南征四郡、以弘農太守楊儀爲參軍、從行、步兵校尉襄陽向朗爲長史、統留府事、

三月、亮、南して四郡を征し、弘農太守楊儀を以て參軍と爲して從行せしめ、步兵校尉襄陽の向朗を長史と爲し、留府の事を統べしむ。


3월, 제갈량이 남방의 4군에 출정하며 홍농태수 양의를 참군으로 삼아 종군시켰고,

보병교위인 양양군의 상랑을 장사로 삼아 자신의 부재중 직무를 통괄시켰다.



秋、南中平、

秋、南中平ぐ。


가을, 남중이 평정되었다.



軍資所出、國以富饒、

軍資の出る所、國以て富饒なり。


군수물자가 풀려, 나라가 윤택하게 되었다.



冬、亮還、至漢陽、與魏降人李鴻相見、

冬、亮は還りて漢陽に至り、魏の降人李鴻と相見す。


겨울, 제갈량은 귀환하여 한양(한양현?)에 도착하여 위로부터 항복해온 이홍을 접견했다.



說新城太守孟達委仰於亮無已、

新城の太守孟達の亮を委仰するの已むを無きを說く。


(이홍이) 말하길, 신성태수 맹달은 제갈량을 경외하는 마음이 변치 않았다 했다고 했다.


亮方北圖、欲招達爲外援、

亮、方に北圖せんとし、達を招きて外援と爲さんと欲す。


제갈량은 북방을 탈취함에 있어서 맹달을 설득하여 외부로부터의 원군으로 삼고자 하였다.



謂參軍蔣琬・從事費詩曰、歸、當有書與子度相聞、

參軍の蔣琬・從事の費詩に謂ひて曰く、「歸らば、當に書を子度に與へて相聞する有るべし」と。


참군 장완, 종사 비시에게 이르기를 “돌아가면, 자도(맹달)에게 편지를 내어 연락을 취하라”고 하였다.



對曰、孟達小子、昔事振威、不忠、後奉先帝、背叛、反覆之人、何足與書、

對へて曰く、「孟達は小子なり。昔、振威に事へては不忠、後、先帝を奉じては、背叛にして反覆の人なり。何ぞ書を與ふるに足らんや」と。


(비시가)답하여 말하기를 “맹달은 소인배입니다.


이전에 진위장군(유장)에게 쓰일 때 충절을 다하지 않았고, 이후 선제에 쓰일 때에도 등을 돌렸던 줏대없는 인물입니다.


어째서 그런 자에게 편지를 보냅니까?“



亮不答、

亮、答へず。


제갈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詩數率意而言、故凌遲於世、

詩は數ゝ意に率ひて言ふ。故に世に凌遲せり。


비시는 늘상 그 품은 뜻을 솔직히 말하였다.


때문에 생애 출세치 못했다.



十有二月、亮至、羣官皆道迎、

十有二月、亮至るや、羣官皆な道に迎ふ。


십이월, 제갈량이 (성도에) 귀환하자 관료들은 모두 길에 나가 영접했다.



而亮命侍郞費禕參乘〔三〕、

而して亮、侍郞の費禕に命じて參乘せしむ。


이때에 제갈량은 시랑 비위에 명하여 수레에 함게 타게 했다.



禕官小年幼、衆士於是莫不易觀、

禕の官は小にして年は幼なれども、衆士、是に於いて易觀せざる莫し。


비위는 관위가 낮고 연소한 인물이었으나, 뭇사람들이 이 건으로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一〕 原文「與龐竝見知」。 他本を参考にし、「統」の一字を補った。

원문은 與龐竝見知라 되어 있다. 타본을 참고하여, 統자를 더하였다.


〔二〕 原文「後更冗散」。 他本を參考にし、「怨望」の二字を補った。

원문은 後更冗散라 되어 있다. 타본을 참고하여 怨望 두 자를 더하였다.


〔三〕 原文「而亮命侍郞費諱參乘」。 他本を參考にし、改めた。

원문은 而亮命侍郞費諱參乘라 되어 있다. 타본을 참고하여 고쳤다.


四年、永安都護李嚴還督江州、城巴郡大城、以征西將軍汝南陳到督永安、封亭侯、是歲、魏文帝崩、明帝立、



四年、永安都護李嚴還督江州、城巴郡大城、(1)

四年、永安の都護李嚴、還りて江州を督し、巴郡に大城を城く。


건흥4년(226), 영안도호 이엄이 귀환하여 강주를 통괄하고, 파군에 큰 성을 세웠다.



以征西將軍汝南陳到督永安、封亭侯、

征西將軍(である가 누락된듯)汝南の陳到を以て永安を督せしめ、亭侯に封ず。


정서장군인 여남출신 진도를 영안을 통괄하게 하고, 정후로 봉했다.



是歲、魏文帝崩、明帝立、

是の歲、魏の文帝崩じ、明帝立つ。


이 해에, 위 문제가 죽고, 명제가 즉위했다.


(1) [이엄] 삼국지 후주전에는 「春、都護李嚴自永安還住江州、築大城」‘봄, 도호 이엄이 영안에서 강주로 돌아와 큰 성을 세웠다’고 하였다.0


五年、魏太和元年也、春、丞相亮將北伐、上疏曰、今天下 三分、益州疲弊、此誠危急存亡之秋也、然侍衞之臣不懈於內、忠志之士忘身於外者〔一〕、咸追先帝之遇、欲報之陛下也、先帝以臣謹愼、故臨崩寄臣以大事、受 命以來、夙夜憂嘆、故五月渡瀘、深入不毛、今南方以定、兵甲以足、當帥將三軍、北平中原、庶竭駑鈍、攘除姧兇、克復漢室、還乎舊都、此臣所報先帝而忠於陛 下、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不效、則治臣之罪、以吿先帝之靈、陛下亦宜自謀、諮諏善道、察納雅言、不宜引喩失所、以塞忠諫之路也、又曰、親賢臣、遠小人、 先漢所以興隆、昵小人、疎君子、後漢所以傾覆、侍中郭攸之・費禕、侍郞董允、先帝簡拔以遺陛下、斟酌規益、進盡忠言、則其任也、宮省之事、悉以諮之、必能 裨補闕漏、有所廣益也、以尚書南陽陳震爲中書令、治中張裔爲留府長史、與參軍蔣公琰知居府事、二月、亮出屯漢中、營沔北陽平・石馬、以鎭北將軍魏延爲司 馬、




五年、魏太和元年也、

五年は、魏の太和元年なり。


건흥5년(227)은 곧 위의 태화원년이다.



春、丞相亮將北伐、上疏曰、

春、丞相亮、將に北伐せんとし、上疏して曰く、


봄,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며 상소하여 말하길,



今天下三分、益州疲弊、

「今、天下は三分し、益州は疲弊す。


지금, 천하는 셋으로 갈리었고, 익주는 피폐한 상태입니다.



此誠危急存亡之秋也、

此れ誠に危急存亡の秋なり。


이는 실로 위급존망의 때입니다.



然侍衞之臣不懈於內、忠志之士忘身於外者〔一〕、咸追先帝之遇、欲報之陛下也、

然れども侍衞の臣は內に懈らず、忠志の士の身を外に忘るるの者は、咸な先帝の遇を追ひ、之を陛下に報いんと欲するなり。


그럼에도 근시하는 신하들은 안에서 게으름을 부리지 아니하고,
 
충성된 뜻을 가진 자들은 밖에서 자신을 잊고 일하고 있으니,

이는 선제께 받은 대우를 추모하고, 폐하에 보답하려하는 것입니다.



先帝以臣謹愼、故臨崩寄臣以大事、

先帝は臣の謹愼を以て、故に崩ずるに臨みて臣に寄するに大事を以てす。


선제께서는 신이 근신하는 바를 아시고, 이를 이유로 붕어할 즘에 신에게 대사를 맡기셨습니다.



受命以來、夙夜憂嘆、

命を受けて以來、夙夜憂嘆す。


신은 명을 받은 이래, 밤낮 근심하고 한탄해 왔습니다.



故五月渡瀘、深入不毛、

故に五月に瀘を渡り、深く不毛に入る。


때문에 (건흥3년) 5월, 노강을 건너서 불모의 땅에 진출하였습니다.



今南方以定、兵甲以足、

今、南方は以(すで)に定まり、兵甲は以に足る。


지금, 남방은 평정되었으며, 군비도 충실히 준비되었습니다.



當帥將三軍、北平中原

當に三軍を帥將して、北のかた中原を平ぐべし。


삼군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 중원을 평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庶竭駑鈍、攘除姧兇、克復漢室、還乎舊都、

庶はくは(이건 庶幾くは로 써야지...)駑鈍を竭し、姧兇を攘除し、漢室を克復し、舊都に還らんことを。


바라는 바는 미련한 힘을 다하여 간흉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하여, 옛 도읍으로 돌아가는 것.



此臣所報先帝而忠於陛下、

此れ臣の先帝に報いて陛下に忠なる所なり。


이야말로 신이 선제에 보답하는 것이며, 폐하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

願はくは陛下、臣に託するに討賊興復を以てせよ。


바라건대 폐하, 신에게 토적부흥(역신을 치고, 한실을 부흥하는 것)을 명하여 주십시오.



不效、則治臣之罪、以吿先帝之靈、

效さずんば、則ち臣の罪を治め、以て先帝の靈に吿げよ。


공적을 올리지 못하면, 신의 죄를 다스림으로 선제의 영령에 보고해 주십시오.



陛下亦宜自謀、諮諏善道、察納雅言、

陛下も亦た宜しく自ら謀り、善道を諮諏し、雅言を察納すべし。


폐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생각하시어, 올바른 방도에 관해 하문하시고, 올바른 말을 받아들이시기를 원합니다.



不宜引喩失所、以塞忠諫之路也、

宜しく喩を引き所を失ひ、以て忠諫の路を塞ぐべからざるなり」と。


바르게 깨우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충간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又曰、

又た曰く、


또한 말하기를



親賢臣、遠小人、先漢所以興隆、

「賢臣に親しみ、小人を遠ざくるは、先漢の興隆せし所以なり。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배를 멀리한 것은 전한의 융성한 이유입니다.



昵小人、疎君子、後漢所以傾覆、

小人を昵け、君子を疎んずるは、後漢の傾覆せし所以なり。


소인배를 가까이 하고, 군자를 멀리한 것은 후한이 쇠퇴한 이유입니다.



侍中郭攸之・費禕、侍郞董允、先帝簡拔以遺陛下、

侍中の郭攸之・費禕、侍郞の董允は、先帝が簡び拔きて以て陛下に遣る。


시중 곽유지와 비위, 시랑 동윤(!!!)은 선제가 발탁하여 폐하에게 남겨둔 자들입니다.



斟酌規益、進盡忠言、

規益を斟酌し、進みて忠言を盡くすは、則ち其の任なり。


규범과 이익됨을 고려하여 나아가 간언하는 것이 그 임무인 자들입니다.



則其任也、宮省之事、悉以諮之、必能裨補闕漏、有所廣益也

宮省の事、悉く以て之に諮はば、必ずや能く闕漏を裨補し、廣益する所有るなり」と。


궁성의 일, 모두 그들에게 자문하시면 필시 궐루闕漏(부족함)을 방비할 수 있을 것이고,
 
널리 이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以尚書南陽陳震爲中書令、治中張裔爲留府長史、與參軍蔣公琰知居府事、

尚書南陽の陳震を以て中書令と爲す。


상서인 남양군의 진진을 중서령으로 삼았다.



治中張裔爲留府長史、與參軍蔣公琰知居府事、

治中の張裔を留府の長史と爲し、參軍の蔣公琰と居府の事を知らしむ。


치중의 장예를 유부의 장사로 삼았고, 참군 장공염과 더불어 거부의 직무를 통괄하게 했다.



二月、亮出屯漢中、營沔北陽平・石馬、以鎭北將軍魏延爲司馬、

二月、亮、出でて漢中に屯し、沔北の陽平・石馬に營し、鎭北將軍魏延を以て司馬と爲す。


2월, 제갈량은 출진하여 한중에 주둔하며, 목수 이북의 양평, 석마에 군영을 세우고, 진북장군 위연을 사마로 삼았다.


六年春、丞相亮揚聲由斜谷道取郿、使鎭東將軍趙雲・中監 軍鄧芝據箕谷爲疑軍、魏大將軍曹眞擧衆當之、亮身率大衆攻祁山、賞罰肅而號令明、天水・南安・安定三郡叛魏應亮、關中響震、魏明帝西鎭長安、命張郃拒亮、 亮使參軍襄陽馬謖・裨將軍巴西王平、及張沐・李盛・黃襲等在前、違亮節度、爲郃所破、平獨斂衆爲殿、而雲・芝亦不利、亮拔將西縣千餘家還漢中、戮謖及沐・ 盛以謝衆、奪襲兵、貶雲秩、長史向朗以不時臧否、免罷、超遷平參軍、進位討寇將軍、封亭侯、統軍五年、亮上疏曰、臣以弱才、叨竊非據、親秉節旄以厲三軍、 不能訓章明法、臨事而懼、至有街亭違令之闕、箕谷不戒之失、咎皆在臣、臣授任無方、春秋責帥、職臣是當、請自貶三等、以督厥咎、於是以亮爲右將軍、行丞相 事、辟天水姜維爲倉曹掾、加奉義將軍、封當陽亭侯、亮書與長史張裔・參軍蔣琬、稱維曰、姜伯約西州上士、馬季常・李永南不如也、冬、亮復出散關、圍陳倉、 糧盡還、魏將王雙追亮、亮合戰、斬雙、






 六年春、丞相亮揚聲由斜谷道取郿、使鎭東將軍趙雲・中監軍鄧芝據箕谷爲疑軍、魏大將軍曹眞擧衆當之、

六年春、丞相亮、斜谷道由り郿を取らんと揚聲し、鎭東將軍趙雲・中監軍鄧芝をして箕谷に據りて疑軍と爲すに、魏の大將軍曹眞、衆を擧げて之に當たる。


건흥6년(228) 봄, 승상제갈량은 야곡도를 경유하여 미성을 탈취하겠다고 공언하고,

진동장군 조운과 중감군 등지에게는 기곡에 진영을 설치케 하여 미끼로 삼자,

위의 대장군 조진이 무리를 이끌고 이(조운의 미끼부대)를 막았다.



亮身率大衆攻祁山、
亮は身ら大衆を率ゐて祁山を攻む。賞罰肅にして號令明らかなり。


제갈량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다.



賞罰肅而號令明、

賞罰肅にして號令明らかなり。


상벌을 명확히하고, 호령은 명확하였다.



天水・南安・安定三郡叛魏應亮、關中響震、

天水・南安・安定の三郡、魏に叛きて亮に應じ、關中響震す。


천수, 남안, 안정의 세 개 군이 위국에 반역하여 제갈량에게 호응하여, 관중에는 동요가 일었다.



魏明帝西鎭長安、命張郃拒亮、

魏の明帝、西のかた長安に鎭し、張郃に命じて亮を拒がしむ。


위 명제는 장안의 소란을 진화하고, 장합에 명하여 제갈량을 막도록 했다.



亮使參軍襄陽馬謖・裨將軍巴西王平、及張沐・李盛・黃襲等在前、違亮節度、爲郃所破、

亮は參軍襄陽の馬謖・裨將軍巴西の王平、及び張沐・李盛・黃襲等をして前に在らしむるに、亮の節度に違ひ、郃の破る所と爲る。


제갈량은 참군인 양양출신의 마속, 비장군인 파서출신의 왕평 및 장목, 이성, 황습등을
 
선봉으로 하였으나, 제갈량의 지시를 거슬렀으므로 장합에게 격파당하였다.



平獨斂衆爲殿

平は獨り衆を斂めて殿と爲る。


왕평은 무리를 모아 퇴각의 후미에 섰다.



而雲・芝亦不利、

而して雲・芝も亦た利せず。


조운, 등지 또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亮拔將西縣千餘家還漢中、戮謖及沐・盛以謝衆、奪襲兵、貶雲秩、

亮は西縣の千餘家を拔將して漢中に還り、謖及び沐・盛を戮して以て衆に謝し、襲の兵を奪ひ、雲の秩を貶す。


제갈량은 서현의 천여가를 이끌고 한중으로 귀환하여,

마속 및 장목, 이성을 주살하여 무리에 사죄하였으며,

황습의 병사를 빼앗았고, 조운의 관위를 강등했다.



長史向朗以不時臧否、免罷、

長史の向朗は時ならずして臧否するを以て、罷るを免る。


장사 상랑은 때가 아님에도 비판하였기에(제갈량의 처사를 비판한듯? 상랑전에는 마속을 잡지 않아서 면직되었다하더군요?), 면직되었다.



超遷平參軍、進位討寇將軍、封亭侯、統軍五年、

平を參軍に超遷し、位を討寇將軍に進め、亭侯に封じ、軍を統ぶること五年とす。


왕평을 참군으로 발탁하고 관위를 토구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정후에 봉하고 5년간 군을 통솔케 하였다.



亮上疏曰、

亮、上疏して曰く、


제갈량 상주하여 말하기를.



臣以弱才、叨竊非據、親秉節旄以厲三軍、不能訓章明法、臨事而懼、至有街亭違令之闕、箕谷不戒之失、

「臣は弱才を以て、叨りに非據を竊め、親ら節旄を秉りて以て三軍を厲ますも、章を訓へ法を明らかにし、事に臨みて懼るる能はず、街亭に違令の闕あり、箕谷に不戒の失有るに至る。


“신은 어줍잖은 재주로 처지에 맞지 않는 지위에 올라, 스스로 지휘봉을 잡고 삼군을 질타하여 왔으나,

군규를 가르쳐 군법을 철저히 하지 못하였고, 일에 임함에 있어 신중한 배려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가정에서는 명령에 거역함이 있었고, 기곡에서는 제대로 대비치 못하는 실태에 이르렀습니다.



咎皆在臣、

咎めは皆、臣に在り。


모든 책임이 신에게 있습니다.



臣授任無方、

臣の任を授くること方無し。


신이 휘하를 임명함에 방침이 제대로되지 않은 탓입니다.



春秋責帥、職臣是當、

『春秋』は帥を責む、臣が職是れに當れり。


[춘추]에는 통수자의 책임이라 하고 있으니, 신의 직무는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請自貶三等、以督厥咎、

請ふるに自ら三等を貶し、以て厥の咎を督さん」と。


청컨대 신의 위계를 삼등 낮추어 이로써 죄를 벌하여 주십시오.”라 상주하였다.



於是以亮爲右將軍、行丞相事、

是に於いて亮を以て右將軍と爲し、丞相の事を行ぜしむ。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으로 삼고, 승상의 일을 대행케 하였다.(행승상사로 삼았다.)



辟天水姜維爲倉曹掾、加奉義將軍、封當陽亭侯、

天水の姜維を辟きて倉曹掾と爲し、奉義將軍を加へ、當陽亭侯に封ず。


천수의 강유를 불러 창조연으로 삼고, 봉의장군의 직을 더하여, 당양정후에 봉하였다.



亮書與長史張裔・參軍蔣琬、稱維曰、

亮、書を長史の張裔・參軍の蔣琬に與へ、維を稱へて曰く、


제갈량은 장사의 장예,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유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姜伯約西州上士、馬季常・李永南不如也、

「姜伯約は西州の上士にして、馬季常・李永南に如かざるなり」


“강백약은 서주의 훌륭한 선비로, 마계상, 이영남이라해도 그에 미치지 못하오.”라 하였다.



冬、亮復出散關、圍陳倉、糧盡還、

冬、亮は復た散關を出でて、陳倉を圍むも、糧盡きて還る。


겨울, 제갈량은 다시 산관으로부터 출병하여 진창을 포위하였으나, 병량이 부족하여 돌아갔다.



魏將王雙追亮、

魏の將王雙、亮を追ふ。


위의 장수 왕쌍이 제갈량을 추격하였다.



亮合戰、斬雙、

亮、合戰して、雙を斬る。


제갈량, 맞서 싸워 왕쌍을 베었다.


七年春、丞相亮遣護軍陳戒攻武都・陰平、魏雍州刺史郭淮 出將擊戒、亮自至建威、淮退、遂平二郡、後主詔策亮曰、街亭之敗、咎由馬謖、而君引愆、深自抑損、重違君意、聽順所守、前年耀師、馘斬王雙、今歲爰征、郭 淮遯走、降集氐・羌、興復二郡、威震凶暴、功勳赫然、復君丞相、君其無辭、夏四月、吳主孫權稱尊、遣衞尉陳震慶問、吳與蜀約分天下、冬、城漢・樂、



七年春、丞相亮遣護軍陳戒攻武都・陰平、

七年春、丞相亮は護軍の陳戒を遣はして武都・陰平を攻めしむ。


건흥7년(229)봄, 승상 제갈량은 호군 진계(진식의 오기인듯)에게 무도군, 음평군을 공격케 하였다.



魏雍州刺史郭淮出將擊戒、

魏の雍州刺史郭淮、出でて將に戒を擊たんとす。


위의 옹주자사 곽회가 진계(역시 진식의 오기)를 격퇴하려 출진했다.



亮自至建威、淮退、

亮は自ら建威に至り、淮退く。


제갈량이 직접 건위까지 출병하자, 곽회는 퇴각하였다.



遂平二郡、

遂に二郡を平ぐ。


이로써 두 개 군을 평정하였다.



後主詔策亮曰、

後主、亮に詔策して曰く、


후주가 제갈량에게 소칙을 내려 말하기를.



街亭之敗、咎由馬謖、

「街亭の敗、咎は馬謖に由る。


가정의 패배의 책임은 마속에게 있소.



而君引愆、深自抑損、

而るに君は愆を引きて、深く自ら抑損す。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과실이라 깊이 자중하여 관위를 낮추기를 바라였소.



重違君意、聽順所守、

君の意に違ふを重り、守る所を聽順す。


그대의 뜻에 거스르는 것 어려워, 그에 따랐었소.



前年耀師、馘斬王雙、

前年、師を耀かし、王雙を馘斬す。


작년, 군의 위광을 빛내어 왕쌍을 격파했소.



今歲爰征、郭淮遯走、

今歲、爰に征し、郭淮遯走す。


올해는 출정하여 곽회를 도망케 하였소.



降集氐・羌、興復二郡、

氐・羌を降集し、二郡を興復す。


저족과 강족을 항복시키고, 2개 군을 회복하였소.



威震凶暴、功勳赫然、

凶暴を威震し、功勳赫然たり。


위세 흉폭한 적을 놀라 떨게 하였으니 그 공적 훌륭하오.



復君丞相、

君を丞相に復さん。君、其れ辭する無かれ」と。


그대를 승상에 복임하오.



君其無辭、

君、其れ辭する無かれ」と。


그대는 사퇴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吳主孫權稱尊、

夏四月、吳主孫權、尊を稱す。


여름-4월-, 오주 손권이 제위를 칭하였다.



遣衞尉陳震慶問、

衞尉の陳震を遣はして慶問せしむ。


위위 진진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吳與蜀約分天下、

吳と蜀、天下を分けんことを約す。


오와 촉은 천하를 분할하기로 약속하였다.



冬、城漢・樂、

冬、漢・樂を城く。


겨울, 한성과 낙성을 축성했다.


八年春、丞相亮以參軍楊儀爲長史、加綏遠將軍、遷姜維護 軍・征西將軍、秋、魏大將軍司馬宣王由西城、征西車騎將軍張郃由子午、大司馬曹眞由斜谷、三道將攻漢中、丞相亮軍成固、表進江州都護李嚴驃騎將軍、將二萬 人赴漢中、嚴初求以五郡爲巴州、書吿亮、言魏大臣陳羣・司馬懿竝開府、亮乃加嚴中都護、以嚴子豐爲江州都督、大雨、道絕、眞等還、丞相亮以當先北征、因留 嚴漢中、署留府事、嚴改名平、丞相司馬魏延・將軍吳懿西入羌中、大破魏後將軍費擢・雍州刺史郭淮于陽溪、延遷前軍師・鎭西將軍、封南鄭侯、懿左將軍・高陽 鄕侯、徙魯王永爲甘陵王、梁王理爲安平王、皆以魯・梁在吳分故也、



八年春、丞相亮以參軍楊儀爲長史、加綏遠將軍、遷姜維護軍・征西將軍、

八年春、丞相亮は參軍の楊儀を以て長史と爲し、綏遠將軍を加へ、姜維を護軍・征西將軍に遷す。


건흥8년(230) 봄. 승상제갈량은 참군 양의를 장사로 삼아 수원장군의 직을 더했고,

강유를 호군, 정서장군에 승진시켰다.



秋、魏大將軍司馬宣王由西城、征西車騎將軍張郃由子午、大司馬曹眞由斜谷、三道將攻漢中、

秋、魏の大將軍司馬宣王は西城由り、征西車騎將軍張郃は子午由り、大司馬曹眞は斜谷由り、三道にて將に漢中を攻めんとす。


가을, 위의 대장군 사마선왕이 서성을 경유하고,

정서거기장군 장합이 자오곡을 경유하고,

대사마 조진이 야곡을 경유하여,

세 방면으로 한중을 침공하려 하였다.



丞相亮軍成固、表進江州都護李嚴驃騎將軍、將二萬人赴漢中、

丞相亮は成固に軍し、表して江州の都護李嚴を驃騎將軍に進め、二萬人を將ひて漢中に赴かしむ。


승상 제갈량은 성고에 주둔하고

상표하여 강주도호 이엄을 표기장군으로 승임시켜

병력 2만을 이끌고 한중에 진군케 했다.



嚴初求以五郡爲巴州、書吿亮、言魏大臣陳羣・司馬懿竝開府、

嚴、初め五郡を以て巴州と爲さんこと求め、書もて亮に吿げ、魏の大臣陳羣・司馬懿は竝びに府を開くと言ふ。



이엄은 이전에 다섯 군을 분할하여 파주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던 적이 있는데,

(파주자사 시켜달라고 했다고 이엄전에 나옴.)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의 대신인 진군과 사마의는 양인 모두 개부하였다.

(그러니, 나 또한 그러한 권한을 갖고 싶다.)”고 하였다.


亮乃加嚴中都護、以嚴子豐爲江州都督、

亮、乃ち嚴に中都護を加へ、嚴の子豐を以て江州の都督と爲す。


이에 제갈량은 이엄에게 중도호직을 더하고, 이엄의 자식 이풍을 강주의 도독으로 임명했다.



大雨、道絕、眞等還、

大いに雨ふり、道絕へ、眞等還る。


큰 비가 내려 도로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조진 등은 귀환하였다.



丞相亮以當先北征、因留嚴漢中、署留府事、

丞相亮、當に先んじて北征すべきを以て、因りて嚴を漢中に留めて、留府の事を署せしむ。


승상 제갈량은 선수를 쳐 북정에 나서기로 하였고, 이에 이엄을 한중에 남겨 유부의 일을 맡겼다.



嚴改名平、

嚴、名を平と改む。


이엄, 이름을 이평이라 바꾸었다.



丞相司馬魏延・將軍吳懿西入羌中、大破魏後將軍費擢・雍州刺史郭淮于陽溪、

丞相の司馬魏延(丞相司馬の魏延이 맞을듯)・將軍吳懿をして西のかた羌中に入らしめ、大いに魏の後將軍費擢・雍州の刺史郭淮を陽溪に破る。


승상사마 위연, 장군 오의를 서쪽의 강중에 진군시키켜,

위의 후장군 비탁, 옹주자사 곽회를 양계에서 대파했다.



延遷前軍師・鎭西將軍、封南鄭侯、

延を前軍師・鎭西將軍(삼국지 위연전에는 정서대장군이라고)に遷し、南鄭侯に封ず。


위연을 전군사 진서장군에 승진시키고, 남정후로 봉했다.



懿左將軍・高陽鄕侯、

懿を左將軍・高陽鄕侯とす。


오의는 좌장군, 고양향후로 삼았다.



徙魯王永爲甘陵王、梁王理爲安平王、

魯王の永を徙して甘陵王と爲し、梁王理を安平王と爲す。


노왕 유영을 감능왕으로 삼고, 양왕 유리를 안평왕으로 삼았다.



皆以魯・梁在吳分故也、

皆な魯・梁は、吳の分に在るを以ての故なり。



노, 양은 모두 오에 분배하여 준 땅이기 때문이다. (지난회에 나왔던 촉오 천하분할 건과 유관한 듯)


九年春、丞相亮復出圍祁山、始以木牛運、參軍王平守南圍、司馬宣王拒亮、張郃拒平、
亮慮糧運不繼、設三策吿都護李平曰、上計斷其後道、中計與之持久、下計還住黃土、
時宣王等糧亦盡、平恐漕運不給、書白亮宜振旅、夏六月、亮承平指引退、張郃至靑封交戰、爲亮所殺、
秋八月、亮還漢中、平懼亮以運不辧見責、欲殺督運領岑述、驚問亮何故來還、又表後主言亮僞退、
亮怒、表廢平爲民、徙梓潼、奪平子豐兵、以爲從事中郞、與長史蔣琬共知居府事、時費禕爲司馬也、





九年春、丞相亮復出圍祁山、始以木牛運、

九年春、丞相亮は復た出でて祁山を圍み、始めて木牛を以て運ぶ。


건흥9년(231) 봄, 승상제갈량은 다시 출병하여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를 이용해 수송하였다.



參軍王平守南圍、

參軍の王平をして南の圍みを守らしむ。


참군 왕평에게 남쪽 포위 진형을 지키게 하였다.



司馬宣王拒亮、張郃拒平、

司馬宣王、亮を拒み、張郃、平を拒む。


사마선왕이 제갈량을 막고, 장합이 왕평을 막았다.



亮慮糧運不繼、設三策吿都護李平曰、

亮、糧運の繼かざるを慮り、三策を設けて都護の李平に吿げて曰く、


제갈량, 병량의 운반이 원활치 못함을 걱정하고 세가지 책략을 세워 도호 이평에게 알려 말하기를,



上計斷其後道、

「上計は其の後道を斷つ。


상책은 적의 퇴로를 끊는 것이다.



中計與之持久、

中計は之と持久す。


중책은 적과 지구전을 벌이는 것이다.



下計還住黃土、

下計は還りて黃土に住まる」と。


하책은 귀환하여 황토(촉의 땅을 말하는 듯)에 사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時宣王等糧亦盡、

時に宣王等の糧も亦た盡く。


이때, 사마선왕 등 위군의 병량도 역시 다하였다.



盛夏雨水、

盛夏、雨水す。


한여름(5월), 비가 내렸다.



平恐漕運不給、書白亮宜振旅、

平、漕運の給せざるを恐れ、書もて亮に白し、「宜しく振旅すべし」と。


이평은 조운이 막히는 것을 (이로써 병량 수송이 곤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어 밝히기를 군을 정비해서 귀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夏六月、亮承平指引退、

夏六月、亮、平の指を承けて引き退く。


6월, 제갈량은 이평의 조언을 받아들여 철퇴하였다.



張郃至靑封交戰、爲亮所殺、

張郃、靑封に至りて交戰するも、亮の殺す所と爲る。


장합은 청봉까지 진군하여 교전하였으나, 그곳은 제갈량에게 죽을 곳이었다.
 
(그곳에서 제갈량에게 죽었다.)



秋八月、亮還漢中、

秋八月、亮、漢中に還る。


8월, 제갈량이 한중에 귀환했다.



平懼亮以運不辧見責、欲殺督運領岑述、

平、亮に運の辧せざるを以て責めらるるを懼れ、督運領の岑述を殺さんと欲す。


이평은 제갈량에게 병량 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책망당할까 두려워하여,
 
독운령인 잠술을 죽이려 하였다.



驚問亮何故來還、

驚きて亮に何故に來還するかを問ふ。


(이풍은 또한) 두려워하여 제갈량에게 왜 돌아가는지 물었다.



又表後主言亮僞退、

又た後主に表し、亮は僞りて退くと言ふ。


또한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제갈량이 일부러 철퇴하였다고 말했다.



亮怒、表廢平爲民、徙梓潼、奪平子豐兵、以爲從事中郞、與長史蔣琬共知居府事、

亮怒り、表して平を廢し民と爲し、梓潼に徙し、平の子豐の兵を奪ひ、以て從事中郞と爲し、長史の蔣琬と共に居府の事を知らしむ。


제갈량은 노하였고, 이에 상표하여 이평을 폐하여 평민으로 돌리고, 재동에 유배하였고,
 
이평의 자식 이풍의 병사를 빼앗고 종사중랑으로 삼아,
 
장사인 장완과 더불어 거부의 일을 맡게 하였다.



時費禕爲司馬也、

時に費禕、司馬と爲るなり。


이때, 비위가 사마가 되었다.


十年春、丞相亮休士勸農、車騎將軍劉琰與軍師魏延不和、還成都、秋旱、亮練兵講武、




十年春、丞相亮休士勸農、

十年春、丞相亮、士を休め農を勸む。


건흥10년(232) 봄, 승상 제갈량은 병사를 쉬게 하고 농업을 장려했다.



車騎將軍劉琰與軍師魏延不和、還成都、

車騎將軍の劉琰、軍師の魏延と和せず、成都に還る。


거기장군 유염이 군사 위연과 화합하지 못하여 성도로 귀환시켰다.



秋旱、

秋、旱す。


그해 가을, 가뭄이 들었다.



亮練兵講武、

亮、兵を練り武を講ず。


제갈량이 병사를 조련하고, 병법을 가르쳤다.


十一年、魏靑龍元年也、丞相亮治斜谷閣、




十一年、魏靑龍元年也、

十一年は、魏の靑龍元年なり。


건흥11년(233)은 위의 청룡 원년이다.



丞相亮治斜谷閣、

丞相亮、斜谷の閣を治め、糧を谷口に運ぶ。


승상 제갈량은 야곡각을 정비하고,(야곡의 각을 고치고) 병량을 곡구로 운송했다.


十二年春、丞相亮以流馬運、從斜谷道出武功、據五丈原、 與司馬宣王對於渭南、亮每患糧不繼、使志不伸、乃分兵屯田、爲久住之基、耕者雜於渭濱居民之閒、百姓安堵、軍無私焉、秋八月、亮疾病、卒于軍、時年五十 四、還葬漢中定軍山、塚足容棺、斂以時服、謚曰忠武侯、鎭西大將軍魏延與長史楊儀素不和、亮旣恃延勇猛、又惜儀籌畫、不能偏有所廢、常恨恨之、爲作甘戚 論、二子不感、延常擧刃擬儀、儀涕淚交流、惟護軍費禕和解中閒、終亮之世、盡其器用、儀欲案亮成規、將喪引退、使延斷後、姜維次之、延怒、擧軍先歸南鄭、 各相表反、留府長史蔣琬・侍中董允保楊儀疑延、延逆欲擊儀、儀遣平北將軍馬倵討滅延、延自以武幹、常求將數萬別行、依韓信故事、亮不許、以亮爲怯、及儀將 退、使費禕造延、延曰、公雖亡、吾見在、當率衆擊賊、豈可以一人亡、廢國家大事乎、使禕報儀不可、故欲討儀、儀率諸軍還成都、大赦、以吳懿爲車騎將軍、假 節、督漢中事、初亮密表後主、以儀性狷狹、若臣不幸、可以蔣琬代臣、於是、以琬爲尚書令、總統國事、以儀爲中軍師、司馬費禕爲後軍師、征西姜維爲右監軍・ 輔漢將軍、鄧芝前軍師、領兗州刺史、張翼前領軍、竝典軍政、廖立在汶山、聞亮卒、埀泣曰、吾終於左袵矣、李平亦發病死、初立・平爲亮所廢、安奄沒齒、常冀 亮當自補復、策後人不能、故感憤焉、





十二年春、丞相亮以流馬運、從斜谷道出武功、據五丈原、與司馬宣王對於渭南、

十二年春、丞相亮、流馬を以て運び、斜谷道從り武功に出で、五丈原に據り、司馬宣王と渭の南に於いて對ふ。


건흥12년(234) 봄. 승상제갈량은 유마를 사용해서 물자를 옮기고,

야곡도를 경유해서 무공에 출진하여 오장원에 근거지를 세우고,

사마선왕과 위수의 남쪽에서 대치했다.



亮每患糧不繼、使志不伸、乃分兵屯田、爲久住之基、

亮、每に糧の繼かざるをもて、志を伸べざらしむを患へ、乃ち兵を分かちて屯田し、久しく住むるの基を爲す。


제갈량은 병량 보급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함을 항상 걱정하였기에,

병사를 분할하여 둔전을 행하여 장기 주둔의 기초로 삼았다.



耕者雜於渭濱居民之閒、百姓安堵、

耕す者は渭の濱の居民の閒に雜はるも、百姓安堵す。


경작하는 자들(둔전병)은 위수의 물가에서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걱정치 않았다.



軍無私焉、

軍、私すること無し。


병사들도 사심을 갖지 않았다.(백성을 약탈하지 않았다는 뜻-앞 문장과 이어서 봐주센)



秋八月、亮疾病、卒于軍、

秋八月、亮、疾病し、軍に卒す。


8월 가을날, 제갈량은 중병을 얻어, 군중에서 죽었다.



時年五十四、

時に年五十四。


이때, 오십사세였다.



還葬漢中定軍山、

還りて漢中の定軍山に葬らる。


귀환하여 한중 정군산에 매장되었다.



塚足容棺、斂以時服、

塚は棺を容るに足り、斂むるに時服を以てす。


묘는 관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염할 때에는 평상복으로 하였다.



謚曰忠武侯、

謚して忠武侯と曰ふ。


시호를 충무후로 칭하였다.



鎭西大將軍魏延與長史楊儀素不和、

鎭西大將軍の魏延、長史の楊儀と素より和せず。


진서대장군(삼국지에는 정서대장군) 위연은 장사(승상장사) 양의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亮旣恃延勇猛、又惜儀籌畫、不能偏有所廢、

亮、旣に延の勇猛を恃み、又た儀の籌畫を惜しみ、偏に廢する所有る能はず。


제갈량은 이전부터 위연의 용맹을 믿고, 또한 양의의 재간을 중히 여겼기에,

어느 한 쪽을 폐하려 하지 않았다.



常恨恨之、爲作甘戚論、二子不感、

常に恨みて之を恨む。爲に甘戚論を作るも、二子感ぜず。


항상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 때문에 [감척론]을 집필했으나, 두 사람은 이에 대해 느끼는 바 없었다.



延常擧刃擬儀、儀涕淚交流、

延、常に刃を擧げて儀に擬し、儀、涕淚交ゝ流る。


위연이 칼을 휘두르며 양의를 베려 하면, 양의는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惟護軍費禕和解中閒、

惟だ護軍の費禕のみ中閒に和解す。


그저 호군 비의만이 둘 사이를 중재하였을 뿐이다.

終亮之世、盡其器用、

亮の世終はり、其の器用盡く。



제갈량의 죽고나자, 그 역할은 쓸모없게 되었다.



儀欲案亮成規、將喪引退、使延斷後、姜維次之、

儀、亮の成規を案ずるに、
將に喪して引き退くに、
延をして後を斷たしめんと欲し、
姜維を之に次がしむ。


양의는 제갈량이 미리 한 명령(철군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위연전에 나오더군요.)에 따르고자,
 
상을 치르기 위해 퇴각시키며, 위연으로 하여금 후미를 지키도록 하고,

강유로 하여금 그 다음(끝에서 두 번째)을 따르게 했다.


延怒、擧軍先歸南鄭、

延怒りて、軍を擧げて先に南鄭に歸らんとす。


위연은 노하여 군을 움직여 먼저 남정으로 돌아갔다.



各相表反、

各ゝ相い表して反す。


두 사람은 각기 상표하며 반목하였다.



留府長史蔣琬・侍中董允保楊儀疑延、

留府の長史蔣琬・侍中董允、楊儀を保ちて延を疑ふ。


유부의 승상장사 장완, 시중 동윤이 양의를 신용하여 위연을 의심하였다.



延逆欲擊儀、儀遣平北將軍馬倵討滅延、

延、逆め儀を擊たんと欲するも、儀、平北將軍の馬倵を遣はして延を討滅せしむ。


위연은 먼저 양의를 공격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양의는 평북장군 마무(삼국지에는 마대)를 부려 위연을 토벌했다.



延自以武幹、常求將數萬別行、依韓信故事、

延、自ら武幹を以てし、常に數萬を將ひて別行し、韓信の故事に依らんことを求むも、亮、許さず。


위연은 스스로의 무용을 자랑하였으므로,

항상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별도로 진군하여, 한신의 고사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제갈량은 허락하지 않았다.



以亮爲怯、

亮を以て怯と爲す。


(이 때문에 위연은) 제갈량을 겁쟁이라 여겼다.



及儀將退、使費禕造延、

儀、將に退かんとするに及び、費禕をして延に造らしむ。

양의는 퇴각하려 할 때에, 비의를 위연에게 보내었다. (그 취지를 전하였다.)



延曰、

延曰く、

위연이 말하기를,



公雖亡、吾見在、

「公は亡すと雖も、吾、見在す。

“공(제갈량)은 죽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건재하오.



當率衆擊賊、

當に衆を率ゐて賊を擊つべし。

(내가) 군세를 이끌어 적을 치는 것이 옳소.



豈可以一人亡、廢國家大事乎、

豈に一人の亡を以て、國家の大事を廢すべけんや」と。


한사람이 죽었다고 하여도, 국가 대사를 폐할 수는 없소.“라고 말했다.



使禕報儀不可、

禕をして儀に不可なるを報ぜしむ。(이거 번역 잘못한 것 같다.)



((위 문장은 禕を使わして報じさせた.楊儀は不可とした.로 번역해야 되는 것 같다.

그래야 논리구조가 이어지는 듯 하다. 따라서 멋대로 이렇게 번역하기로 하겠다.))



(위연이 비의를 돌려보내며) 비위를 시켜 보고하였다. 양의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故欲討儀、

故に儀を討たんと欲す。


이 일로 양의를 죽이고자 하였다.



儀率諸軍還成都、

儀、諸軍を率ゐて成都に還る。


양의, 전군을 이끌고 성도로 귀환했다.



大赦、

大赦す。


대사면을 행했다.



以吳懿爲車騎將軍、假節、督漢中事、

吳懿を以て車騎將軍と爲し、節を假し、漢中の事を督せしむ。


오의를 거기장군으로 하고, 절을 내리고(가절), 한중의 일을 맡겼다.(거기장군 가절 독한중사)



初亮密表後主、

初め、亮、密かに後主に表し、


이전에, 제갈량이 은밀히 후주에게 상주하기를.



以儀性狷狹、若臣不幸、可以蔣琬代臣、

「儀の性、狷狹なるを以て、若し臣不幸なれば、蔣琬を以て臣に代へるべし」と。


양의의 성정은 성급하고 마음이 좁으니,
 
혹시 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장완에게 신을 대신케 하소서.“라 하였다.



於是、以琬爲尚書令、總統國事、

是に於いて、琬を以て尚書令と爲し、國事を總統せしむ。


이에 장완을 상서령으로 명하고 국사를 통괄시켰다.



以儀爲中軍師、司馬費禕爲後軍師、征西姜維爲右監軍・輔漢將軍、鄧芝前軍師、領兗州刺史、張翼前領軍、竝典軍政、

儀を以て中軍師と爲し、
司馬の費禕を後軍師と爲し、
征西の姜維を右監軍・輔漢將軍と爲し、
鄧芝を前軍師とし、兗州の刺史を領せしめ、
張翼を前領軍とし、
竝びに軍政を典らしむ。


양의를 중군사로 삼고, 사마 비의를 후군사로 삼고, 정서장군 강유를 우감군 보한장군으로 삼고,

등지를 전군사로 삼아 연주자사를 겸임하게 하고, 장익을 전령군으로 삼아,

모두 군정을 담당케 하였다.



廖立在汶山、聞亮卒、埀泣曰、吾終於左袵矣、

廖立、汶山に在り、亮の卒するを聞き、埀泣して曰く、「吾、左袵に終らん」と。


요립은 문산에 있었으나, 제갈량의 죽음을 듣고 울먹이며 말하기를


“나는 백성으로 생을 마치겠구나.”라고 하였다.



李平亦發病死、

李平も亦た病を發して死す。


이평 또한 병으로 죽었다.



初立・平爲亮所廢、安奄沒齒、常冀亮當自補復、

初め、立・平は亮の廢する所と爲り、奄に齒ひを沒するに安んずるも、常に亮が當に自ら補復せんことを冀ふ。


본시, 요립과 이평은 제갈량이 폐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이는 제갈량이 복권시켜줄 것으로 늘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策後人不能、故感憤焉、

後人に策す能はず、故に感墳せり。


제갈량의 후계자는 복권시키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울분을 느낀 것이다.


(제갈량의 후계자에게 사바사바해도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十三年、拜尚書令蔣琬爲大將軍、領益州刺史、以費禕爲尚 書令、時新喪元帥、遠近危悚、琬超登大位、旣無戚容、又無喜色、衆望漸服、侍郞董允兼虎賁中郞將、統宿衞兵、軍師楊儀、自以年宦在琬前、雖同爲參軍・長 史、已常征伐勤苦、更處琬下怨望、謂費禕曰、公亡際、吾當擧衆降魏、處世寧當落度如此邪、令人追悔不可及、禕表其言、廢徙漢嘉、儀又上書激切、遂行儀重 辟、吳以亮之卒也、增巴丘守萬人、蜀亦益白帝軍、右中郞宗預使吳、吳主曰、東之與西共爲一家、何以益白帝守、預對曰、東增巴丘之戍、蜀益白帝之兵、俱事勢 宜然、不足以相問也、




十三年、拜尚書令蔣琬爲大將軍、領益州刺史、

十三年、尚書令の蔣琬を拜して大將軍と爲し、益州の刺史を領せしむ。


건흥 십삼년(235), 상서령 장완이 대장군직을 받고, 익주자사를 겸임했다.



以費禕爲尚書令、

費禕を以て尚書令と爲す。


비의를 상서령으로 삼았다.



時新喪元帥、遠近危悚、

時に新たに元帥を喪ひ、遠近危悚す。


당시, 원수(갈량이횽)를 잃은 직후로, 원근 가리지 않고 두려워하였다.



琬超登大位、旣無戚容、又無喜色、衆望漸服、

琬は超へて大位に登るも、旣に戚容無く、又た喜色無し。


장완은 발탁되어 큰 일을 맡게 되었으나, 걱정하는 표정이 없었고, 또한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다.



衆望漸服、

衆望漸く服す。


(이에)많은 사람이 (장완에게) 복속하게 되었다.



侍郞董允兼虎賁中郞將、統宿衞兵、

侍郞の董允をして虎賁中郞將を兼ねしめ、宿衞の兵を統べしむ。


시랑 동윤을 호분중랑장에 겸임하게 하여 숙위병을 통솔하게 하였다.



軍師楊儀、自以年宦在琬前、

軍師の楊儀、自ら年宦なるを以て琬の前に在り。(年宦であることを以って蔣琬の前に在るのを自ずのこと(当然のこと)としていたため)


군사(중군사) 양의의 나이와 관직이 장완보다 높았다.

(나이와 관직이 모두 장완보다 앞서는 것을 당연히 여겼기에)



雖同爲參軍・長史、已常征伐勤苦、更處琬下怨望、禕表其言、

同に參軍・長史に爲ると雖も、已に常に征伐勤苦し、更に琬の下に處せらるを怨望し、
費禕に謂ひて曰く、


같은 참군/장사의 역을 맡았다고는 하나,

(자신은) 늘상 정벌에 나서 고생하였으므로, 다시 장완의 밑에 서는 것을 원망하여
 
비의에게 말하여 가로대,



公亡際、吾當擧衆降魏、處世寧當落度如此邪、

「公、亡に際し、吾、當に衆を擧げて魏に降るべく、世に處すること寧くんぞ當に落度たること、此の如からんや。


공(제갈량)이 죽은 때에, 본관이 무리를 이끌고 위에 투항하였으면,

세상에서의 내 처지가 이토록 떨어졌을 것인가.



令人追悔不可及、

人をして追悔せしむも及ぶべからず」と。


후회해도 소용이 없구려.“라 말했다.



禕表其言、廢徙漢嘉、

禕、其の言を表し、廢されて漢嘉に徙る。


비의가 그 말을 상표하자, 양의를 폐하여 한가에 유배보냈다.



儀又上書激切、

儀、又た上書して激切す。


양의가 또다시 격렬히 상주하였다.



遂に儀に重辟を行ふ。


결국, 양의는 죄를 거듭 얻게 되었다.



吳以亮之卒也、

吳、亮の卒するを以て、巴丘の守りを萬人を增す。


제갈량의 죽음을 안 오나라는, 파구의 수비병을 일만명 늘렸다.



蜀亦益白帝軍、

蜀も亦た白帝の軍を益す。


촉군도 또한 백제의 군을 증강했다.



右中郞宗預使吳、

右中郞の宗預、吳に使ひす。


우중랑 종예가 오에 사자로 갔다.



吳主曰、

吳主曰く、


오주가 말하길.



東之與西共爲一家、

「東は之、西と共に一家と爲る。


“동쪽(오)은 이미 서쪽(촉)과 함께 한 집안과 같다.



何以益白帝守、

何ぞ以て白帝の守りを益すや」と。


어째서 백제의 수비병을 늘리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預對曰、

預、對へて曰く、


종예가 답하여 말하기를,



東增巴丘之戍、蜀益白帝之兵、

「東は巴丘の戍りを增し、蜀は白帝の兵を益す。


동측은 파구의 수비병을 늘렸고, 촉은 백제의 병력을 늘렸습니다.



俱事勢宜然、不足以相問也、

俱に事勢宜しく然るべく、以て相い問ふに足らざらんや」と。


이는 모두 사정에 따른 것이니, 서로 묻고 자시고 할 것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十四年夏四月、後主西巡、至湔山登阪、觀汶川之流、武都氐王符徤請降、將軍張尉迎之、過期不至、大將軍琬憂之、牙門將巴西張嶷曰、徤求附款至、必無返滯、聞徤弟狡、不能同功、各將乖離、是以稽耳、徤弟果叛就魏、徤率四百家隨尉、居廣都縣、


十四年夏四月、後主西巡、至湔山登阪、觀汶川之流、

十四年夏四月、後主西巡して、湔山に至り、阪を登りて、汶川の流れを觀る。


원흥14년(236) 4월, 후주는 서방을 순행하여, 전산에 이르러, 길을 올라 문천의 흐름을 감상했다.



武都氐王符徤請降、

武都の氐王符徤、降らんことを請ふ。


무도의 저족 왕 부건이 항복을 청해왔다.



將軍張尉迎之、過期不至、大將軍琬憂之、

將軍の張尉、之を迎へるに、期を過ぐるも至らず、大將軍琬、之を憂ふ。


장군 장위에게 그를 맞도록 하였으나, 약속한 시기가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대장군 장완은 이것을 걱정하였다.



牙門將巴西張嶷曰、

牙門將巴西の張嶷曰く、


아문장군인 파서의 장억이 말하기를,



徤求附款至、

「徤の附するを求むは款至たり。


“부건이 복속을 청한 것에는 성심이 담겨있습니다.



必無返滯、

必ずや返滯すること無し。


결코 생각을 바꿀 리 없습니다.


聞徤弟狡、不能同功、各將乖離、

聞くに徤の弟は狡、功を同じくすること能はず、各ゝ將に乖離せんとす。


부건의 동생은 교활한 자로, 공(촉한에 귀의하는 것)에 동조하지 아니하고,

각기 분립하려 하려는 것일 터입니다.



是以稽耳、

是れ以て稽まるのみ」と。


때문에 일을 지연시키는 것일 터입니다. “라고 말했다.



徤弟果叛就魏、

徤の弟、果して叛きて魏に就く。


부건의 동생은 결국 배반하여 위나라를 따랐다.



徤率四百家隨尉、居廣都縣、

徤は四百家を率ゐて尉に隨ひ、廣都縣に居ふ。


건부는 사백가를 통솔하여 장위를 따라 광도현에 정착하게 됐다.


十五年、魏景初元年也、夏六月、皇后張氏薨、謚曰敬哀、 是歲、車騎將軍吳懿卒、以後典軍・安漢將軍王平領漢中太守代懿督漢中事、懿從弟班、漢大將軍何進官屬吳匡之子也、名常亞懿、官至驃騎將軍・持節・鄕侯、時 南郡輔匡光弼・零陵劉邕南和官亦至鎭南將軍、潁川袁淋・南郡高翔至大將軍、淋征西將軍、





十五年、魏景初元年也、

十五年は、魏の景初元年なり。


건흥 15년(237)은 위의 경초 원년이다.



夏六月、皇后張氏薨、

夏六月、皇后張氏薨ず。


6월, 황후 장씨가 죽었다. (엉엉!!)



謚曰敬哀、

謚して敬哀と曰ふ。


시호를 경애라 했다.



是歲、車騎將軍吳懿卒、

是の歲、車騎將軍吳懿卒す。


이해, 거기장군 오의가 죽었다.



以後典軍・安漢將軍王平領漢中太守代懿督漢中事、

後典軍・安漢將軍の王平を以て漢中の太守を領せしめ、懿に代りて漢中の事を督せしむ。


후전군 안한장군 왕평를 한중 태수에 명하고, 오의를 대신하여 한중의 일을 감독케 했다.(독한중사로 삼았다.)



懿從弟班、漢大將軍何進官屬吳匡之子也、

懿の從弟班は、漢の大將軍何進の官屬吳匡の子なり。


오의의 종제인 오반은 한의 대장군 하진의 관속 오광의 자식이다.



名常亞懿、官至驃騎將軍・持節・鄕侯、

名は常に懿に亞ぎ、官は驃騎將軍・持節・鄕侯に至る。


오반의 명성은 늘 오의에 뒤이었고, 관위는 거기장군 지절 향후까지 이르렀다.



時南郡輔匡光弼・零陵劉邕南和官亦至鎭南將軍、

時に南郡の輔匡光弼・零陵の劉邕南和の官も亦た鎭南將軍に至る。


이때, 남군의 보광광필, 영릉의 유옹남화의 관위도 또한, 진남장군에 이르렀다.



潁川袁淋・南郡高翔至大將軍、

潁川の袁淋・南郡の高翔は大將軍に至る。


영천의 원임, 남군의 고상은 대장군에 이르렀다.(??)



淋征西將軍、

淋は征西將軍たり。


원임은 정서장군이 되었다.(??)



袁淋は、『三国志』でいうところの袁綝であろうか。ならばここでいう「大將軍」というのは、

正式官名ではなく上位将軍の通称であろうか。


(원임은, 삼국지에 나오는 원침인가. 그렇다면 [대장군]이라는 것이 관명인 [대장군]이 아니라

고위급 장수의 통칭인 것일까.)



========라고 썼던데, 校補図注교보도주를 보니까


旧(出された時期が旧い方)の各本は淋と作る.廖本は綝と作る.下(それ以降の本は)同じである



(오래된 본들은 淋라 썼다. 요본은 綝이라 썼다. 아래도 이와 같다.)

===========라는군요.


결국 원림=원침. OK?



延煕元年春正月、立皇后張氏、敬哀皇后妹也、大赦、改元、立子璿爲太子、瑤爲安定王、以典學從事巴西譙周爲太子家令、梓潼李譔爲僕射、皆名儒也、冬十二月、大將軍琬出屯漢中〔一〕、更拜王平以前護軍〔二〕、署大將軍府事、尚書僕射李福爲前監軍、領大將軍司馬、






延煕元年春正月、立皇后張氏、

延煕元年春正月、皇后に張氏を立つ。


연희원년(238) 봄 정월, 황후에 장씨를 세웠다.



敬哀皇后妹也、

敬哀皇后の妹なり。


경애황후의 동생이다. (유선 ㅅㅂㄹㅁ... 자매덮밥이라니... 아, 덮밥은 아닌가.)



大赦、改元、

大赦し、改元す。


대사면을 행하고, 개원하였다.



立子璿爲太子、瑤爲安定王、

子の璿を立てて太子と爲し、瑤を安定の王と爲す。


아들 선을 세워 태자로 삼고, 요를 안정왕으로 삼았다.



以典學從事巴西譙周爲太子家令、梓潼李譔爲僕射、

典學從事の巴西の譙周を以て太子の家令と爲し、梓潼の李譔を僕射と爲す。


파초출신의 전학종사 초주로 태자가령으로 삼고, 재동 출신의 이선을 복야로 삼았다.



皆名儒也、

皆な名儒なり。


이들 모두 이름높은 유학자이다.



冬十二月、大將軍琬出屯漢中

冬十二月、大將軍琬出でて漢中に屯す。


십이월, 대장군 장완이 출병하여 한중에 주둔하였다.



更拜王平以前護軍〔二〕、署大將軍府事、尚書僕射李福爲前監軍、領大將軍司馬、

更に王平を拜するに前護軍を以てし、
大將軍府の事を署らしめ、
尚書僕射の李福を前監軍と爲し、
大將軍の司馬を領せしむ。


또한, 왕평에게 전호군직을 내려 대장군부의 일을 다스리게 했고,
 
상서복야 이복을 전감군으로 삼아 대장군사마를 겸임케 했다.


延煕二年春三月、進大將軍琬大司馬、開府、辟治中從事犍 爲楊義爲東曹掾、義性簡、琬與言、時不應答、羣吏以爲慢、琬曰、夫人心不同、各如其面、面從後言、古人所戒、義欲贊吾是耶、則非本心、欲反吾言也、則顯吾 之非、是以嘿然、此義之快也、督農楊敏常毀琬、作事憒憒、誠非前人也、或以白琬、琬曰、吾信不如前人、主者白、乞問憒憒状、琬曰、苟其不如、則憒憒矣、復 問何也、後敏坐事下獄、人以爲必死、琬心無適莫、是以上下輯睦、歸仰於琬、蜀猶稱治、輔漢將軍姜維領大司馬、西征、入羌中、是歳、魏明帝崩〔一〕、齊王即 位、





延煕二年春三月、進大將軍琬大司馬、開府、

延煕二年春三月、大將軍琬を大司馬に進め、府を開かしむ。


연희2년(239) 3월, 대장군 장완은 대사마로 승진하여 개부하였다.



辟治中從事犍爲楊義爲東曹掾、

治中從事の犍爲の楊義を辟きて東曹の掾と爲す。


건위 출신의 치중종사 양의(양희羲 라고도 하는 것 같더군요?)를 불러 동조연으로 삼았다.



義性簡、

義の性は簡たり。


양의는 성격이 간(심라...조낸 아스트랄하네연. 이걸 뭐라고 한담.

네이버 옥편 보니깐 정성스럽다, 대범하다, 간결하다 뭐 이중에서 고르센...)하였다.



琬與言、時不應答、羣吏以爲慢、

琬、言を與へるも、時に應答せず、羣吏以爲へらく慢と。


장완과 더불어 말할 때, 때때로 대답도 하지 않으므로 뭇 관료들이 이를 그가 태만한 것이라 하였다.



琬曰、

琬曰く、


장완이 말하기를



夫人心不同、

「夫れ人の心は同じからず。


사람의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오.



各如其面、

各ゝ其の面の如し。


이는 사람의 얼굴이 각각 다른 것과 같소.



面從後言、古人所戒、

面從後言するは、古人の戒しむる所なり。


앞에서는 따르는 척 하고 뒤에서 다마 까는 것은 옛 사람들이 경계했던 것이오.



義欲贊吾是耶、則非本心、

義、吾の是に贊せんと欲すれば、則ち本心に非ず。


양의가 내 말에 찬성한다고 하면, 이는 그의 본심을 거스르는 것이오.



欲反吾言也、則顯吾之非、

吾の言に反せんと欲すれば、則ち吾の非を顯らかにす。


그가 내 말에 반대한다고 하고자 하면, 이는 내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오.



是以嘿然、

是れ以て嘿然(もくぜん)たり。


때문에 그가 아무 말 않고 있는 것이오.



此義之快也、

此れ義の快なり」と。


이것이 양의의 좋은 점(솔직한 점)이라오. 라고 말했다.



督農楊敏常毀琬、作事憒憒、誠非前人也、

督農の楊敏、常て琬を毀り、「事を作すこと憒憒、誠に前人に非ざるなり」と。


독농 양민이 늘 장완을 비방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흐지부지하여

(궤궤라는 걸 찾아보니 [침착해 있는 모양]이라네요. 걍 적당히 갑시다 -.-;;)

실로 전임(제갈량)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或以白琬、琬曰、

或るひと以て琬に白す。


어떤 자가 이를 장완에게 꼬질렀다.



琬曰、吾信不如前人、

琬曰く、「吾、信に前人に如かず」と。


장완 말하기를 “나는 실로 전임에게 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主者白、乞問憒憒状、

主者白す、「憒憒の状を問はんことを乞ふ」と。


주자(관직이름인지, 유선을 말하는 건지...) 말하기를

“대사마를 흐지부지하다고 한 발언을 한 양민을 심문하고자 합니다.”

라 하였다.



琬曰、苟其不如、則憒憒矣、復問何也、

琬曰く、「苟(いやし)くも其れ如かずんば、則ち憒憒たり。復た何を問はんや」と。


장완 말하기를
 
“내가 혹여 (전임자인 제갈량에)미치지 못한 바 있다면, 그것은 내가 흐지부지한 것이오.
 
다시 무엇을 묻겠소?”라 하였다.



後敏坐事下獄、“

後、敏は事に坐して獄に下る。


후에, 양민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하옥되었다.



人以爲必死、

人、以爲へらく必ず死なんと。


사람들은 이 일로 (장완이) 양민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琬心無適莫、是以上下輯睦、歸仰於琬、

琬の心に適莫無く、是れ上下の輯睦するを以て、琬に歸仰せり。


장완의 마음에는 적막이 없어,

(여기를 잘 못알아먹겠는데, 일본웹에서 조낸 찾아보니

蔣琬の心は不公平でも感情的なものでもなかった라고 한 데가 있더군요.
 
번역하면 [장완의 마음은 불공평함도 없고 감정적이지도 않았다]정도 되겠어요.)
 
이처럼 상하를 화목케 하는 태도에 모두 장완에게 승복하였다.



蜀猶稱治、

蜀は猶ほ治を稱するがごとし。


촉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선정이 펼쳐졌다.



輔漢將軍姜維領大司馬、西征、入羌中、

輔漢將軍の姜維、大司馬を領ね、西征して、羌中に入る。


보한장군 강유가 대사마를 겸임하여,

(강유전에는 대사마의 사마던데 말이빈다?)

서쪽을 정벌, 강중에 진군했다.



是歳、魏明帝崩〔一〕、齊王即位、

是の歳、魏の明帝崩じ、齊王即位す。


이 해에, 위명제가 죽고, 제왕이 황위에 즉위했다.


延煕三年、魏正始元年也、安南將軍馬忠率越嶲太守張嶷平越嶲郡、





延煕三年、魏正始元年也、

延煕三年は、魏の正始元年なり。


연희3년(240)은 위의 정시 원년이다.



安南將軍馬忠率越嶲太守張嶷平越嶲郡、

安南將軍の馬忠をして越嶲の太守張嶷を率ゐて越嶲郡を平せしむ。


안남장군 마충으로 하여금 월수태수 장억을 지휘하여 월수군을 평정하게 하였다.


四年冬十月、尚書令費禕至漢中、與大司馬琬諮論事計、歳盡還、

四年冬十月、尚書令の費禕、漢中に至り、大司馬蔣琬と事計を諮論するも、歳盡きて還る。



연희4년(241) 10월, 상서령 비의가 한중에 가서 대사마 장완과 계책을 상담하였으나,

연말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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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春正月,西河王琮卒。大將軍維惡皓之恣擅,啟後主,欲殺之。後主曰:「皓趨走小臣耳。往者董允切齒,吾常恨之。君何足介意。」維本羈旅自託,而功效無稱,見皓枝附葉連,懼於失言,遜辭而出。後主敕皓詣維陳謝。維誘《三國志》裴注引此作說。皓求沓中種麥,以避內逼。皓承白後主。秋,維出侯和,為魏將鄧艾所破,還駐沓中。皓協比閻宇,欲廢維樹宇。故維懼不敢還。張、吳、何、王、浙、石本有小注曰:「按,沓中即古松州。去文州三百里。」亦張佳胤所增注。

번역이 안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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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年、大司馬琬上疏曰、臣既闇弱、加嬰疾疢、奉辭六年、 規方無成、夙夜憂慘、今魏跨帶九州、除之未易、如東西掎角〔一〕、但當蠶食、然呉期二三、連不克果、輒與費禕・馬忠議、以爲涼州胡塞之要、宜以姜維爲涼州 刺史、銜持河右、今涪水陸四通、惟急是赴、若東北有虞〔二〕、應之不艱、冬十月、琬還鎭涪、以王平爲鎭北大將軍、督漢中事、姜維鎭西大將軍・涼州刺史、十 有一月、大赦、遷尚書令費禕大將軍・録尚書事、就遷江州都督鄧芝車騎將軍、





六年、大司馬琬上疏曰、

六年、大司馬琬、上疏して曰く、


연희6년(243) 대사마 장완이 상소하여 말했다.



臣既闇弱、加嬰疾疢、奉辭六年、規方無成、夙夜憂慘、

「臣、既に闇弱にして、加ふるに疾疢に嬰り、辭を奉じて六年、規方成ること無く、夙夜憂慘す。


“신은 본래 우둔한 자이고, 이에 더하여 열병에 걸렸기에 사령을 받은지 6년,

계략은 성취하지 못하고 밤낮 고심하고 있습니다.



今魏跨帶九州、除之未易、

今、魏、九州に跨帶し、之を除くことは未だ易しからず。


지금, 위는 아홉개 주를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如東西掎角〔一〕、但當蠶食、然呉期二三、連不克果、

如し東西掎角せば、但だ當に蠶食するのみ、然れども呉は二三を期して、連なり克く果さず。


시 동서 양측에서 협격한다면, [영토의 일부를] 끊어 취할 수 있을 것이나,

오는 (우리와 한) 거듭한 약정에도 불구하고, 호응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輒與費禕・馬忠議、以爲涼州胡塞之要、宜以姜維爲涼州刺史、銜持河右、

輒ち費禕・馬忠と議し、以爲へらく、涼州の胡塞の要は、宜しく姜維を以て涼州の刺史と爲して、河右を銜持すべし。


이에 비의, 마충과 더불어 상의한 결과, 양주는 요처중의 요처이므로,

필히 강유를 양주자사로 명하여 하우(황하의 서방, 양주)를 확보하여야 합니다.



今涪水陸四通、惟急是赴、若東北有虞〔二〕、應之不艱、

今、涪は水陸四通し、惟だ急あらば是に赴き、若し東北に虞(うれ)ひ有らば、之に應ずるに艱(むずか)しからず」と。


또한, 부는 물길과 육로로 사방에 통하고 있어,

(급박한 일 있을 때 바로 갈 수 있을 것이고,)
 
만약 동북에서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 그에 호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冬十月、琬還鎭涪、以王平爲鎭北大將軍、督漢中事、姜維鎭西大將軍・涼州刺史、

冬十月、琬、還りて涪に鎭し、王平を以て鎭北大將軍と爲し、漢中の事を督せしめ、姜維を鎭西大將軍・涼州の刺史とす。


시월, 장완이 부에 돌아와 진을 치고,

왕평을 진북대장군으로 삼아 한중의 일을 총괄시키고(독한중사로 삼고),
 
강유를 진서대장군/양주자사로 삼았다.

十有一月、大赦、

十有一月、大赦す。


십일월, 대사면을 행했다.



遷尚書令費禕大將軍・録尚書事、就遷江州都督鄧芝車騎將軍、

尚書令の費禕を大將軍・録尚書事に遷し、就きて江州の都督鄧芝を車騎將軍に遷す。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녹상서사로 승진시키고, 강주도독 등지를 거기장군에 취임케 했다.


七年閏月、魏大將軍曹爽・征西將軍夏侯玄征蜀、王平白、 與護軍零陵劉敏拒興勢圍、以大司馬琬疾病、假大將軍禕節、率軍自成都赴漢中、旌旗啓路、馬人擐甲、羽檄交馳、嚴鼓將發、光祿大夫義陽來敏求共圍棊、禕留意 博奕、色守自若、敏曰、聊試君耳、君信可人、必能辧賊者也、比至、爽等退、命鎭南大將軍馬忠平尚書事、夏四月、安平王卒、子胤嗣、秋九月、禕還、大司馬琬 以病、固讓州職于費禕・董允、於是禕加大將軍領益州刺史、允加輔國將軍、守尚書令、允立朝、正色處中、上則匡主、下帥羣司、于時蜀人以諸葛亮・蔣・費及允 爲四相、一號四英、宦人黄皓便僻佞慧、畏允、不敢爲非、後主常欲采擇、允曰、妃后之數、不可過十二、允常與典軍義陽胡濟・大將軍禕共期遊宴、命駕將出、郞 中襄陽董恢造允修敬、自以官卑年少、行求索去、允曰、本所以出者、欲與同好游談耳、君以自屈、方展闊積、舍此就彼、非所謂也、命解驂止駕、允之下士接物、 皆此類也、君子以爲有周公之德、




七年閏月、魏大將軍曹爽・征西將軍夏侯玄征蜀、

七年閏月、魏の大將軍曹爽・征西將軍夏侯玄、蜀を征す。


연희7년(244) 윤월, 위의 대장군 조상, 정서장군 하후현이 촉 정벌에 나섰다.



王平白、與護軍零陵劉敏拒興勢圍、

王平の白すらく、「護軍零陵の劉敏と興勢の囲に拒まん」と。


왕평이 말하기를, “영능출신의 호군 유민과 더불어 흥세에서 막을터.”라 하였다.



以大司馬琬疾病、假大將軍禕節、率軍自成都赴漢中、

大司馬琬は疾病を以て、大將軍禕に節を假し、軍を率ゐて成都自り(成都から라 해야할 듯)漢中に赴かしむ。


대사마 장완은 병들었기에 대장군 비의에게 가절을 내리고, 군을 통솔하여 성도에서 한중으로 출병하게 하였다.



旌旗啓路、馬人擐甲、羽檄交馳、嚴鼓將發、

旌旗啓路、馬人甲を擐(つ)け、羽檄交ゞ馳し、嚴鼓して將に發せられんとす。


깃발을 올려 선두에 세우고, 인마 모두 갑주를 두르고, 우격(군령 전문)을 조낸 주고받으며, 북을 울리며 곧 출진하려 하였다.



光祿大夫義陽來敏求共圍棊、

光祿大夫義陽の來敏、求めて共に棊を圍まんとす。


양양출신의 광록대부 내민이 바둑을 두자고 청해왔다.



禕留意博奕、色守自若、

禕は意を博奕に留むるも、色は自若を守る。


비의는 바둑에 몰두하여 안색은 평온하였다.



敏曰、聊試君耳、

敏曰く、「聊(いささ)か君を試すのみ。


내민이 말하기를, “잠시 그대를 시험하여 본 것이오.”



君信可人、必能辧賊者也、

君は信に可人にして、必ずや能く賊を辧ずるの者なり」と。


그대는 실로 뛰어난 인물로, 능히 적을 물리칠만한 인물이오“라 하였다.


比至、爽等退、

比(ころ)ほひ至りて、爽等退く。


비의가 다다르자, 조상 등은 퇴각하였다.



命鎭南大將軍馬忠平尚書事、

鎭南大將軍馬忠に命じて尚書の事を平せしむ。


진남대장군 마충에 명하여 상서의 일을 맡게 했다.(평상서사에 봉했다)



夏四月、安平王卒、子胤嗣、

夏四月、安平王卒し、子の胤嗣ぐ。


사월, 안평왕이 죽고, 그 자식 유윤이 뒤를 이었다.



秋九月、禕還、

秋九月、禕還る。


구월, 비의가 돌아왔다.



大司馬琬以病、固讓州職于費禕・董允、

大司馬琬は病を以て、固く州職を費禕・董允に讓らんとす。


대사마 장완의 병으로 주의 직위(익주자사)를 비의, 동윤에게 넘기려 하였다.



於是禕加大將軍領益州刺史、允加輔國將軍、守尚書令、

是に於いて禕に大將軍を加へて益州の刺史を領せしめ、允には輔國將軍を加へ、尚書令を守せしむ。


이에, 비의를 대장군에 더하여 익주자사로 삼고, 동윤에게는 보국장군에 더하여 상서령으로 삼았다.



允立朝、正色處中、上則匡主、下帥羣司、

允は朝に立ち、色を正して中に處り、上は則ち主を匡し、下は羣司を帥ぶ。


동윤은 입조하여, 엄정한 태도로 중용을 지켜,

위로는 군주를 바로잡고, 아래로는 뭇관리를 다스렸다.


于時蜀人以諸葛亮・蔣・費及允爲四相、

時に于いて蜀人、諸葛亮・蔣・費及允を以て四相と爲す。


이때 촉사람들은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을 더불어 네 명재상이라 하였다.



一號四英、

一には四英と號す。


네 영준이라고도 하였다.



宦人黄皓便僻佞慧、畏允、不敢爲非、

宦人の黄皓、便僻佞慧にして、允を畏れ、敢へて非を爲さず。


환관 황호는 후주의 총애를 받았으나, 동윤을 두려워하여 지잣때로(아, 잣은 없군...) 하지 못했다.



後主常欲采擇、允曰、

後主、常に采擇せんことを欲するも、允曰く、


후주는 늘 여자를 뽑아다 들이려고 했으나, 동윤 말하길,



妃后之數、不可過十二、

「妃后の數は、十二を過ぐ可からず」と。


“마누라 수는 열둘을 넘어서는 안됩니다.“라 하였다.



允常與典軍義陽胡濟・大將軍禕共期遊宴、

允は常て典軍義陽の胡濟・大將軍禕と共に遊宴を期す。


동윤은 양양출신의 전군 호제, 대장군 비의와 함께 나가 놀기로 했었다.



命駕將出、郞中襄陽董恢造允修敬、自以官卑年少、行求索去、

駕に命じて將に出でんとしとき、郞中襄陽の董恢、允に造りて修敬するも、自らの官卑年少なるを以て、行きて去らんことを求索す。


수레타고 나가자고 하는 때에,
 
양양출신의 낭중 동회가 동윤에게 인사하러 왔는데,

(그들이 나가려고 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관위 낮고 나이 어려, 꼰대들이 빨리 갔으면 했다.



允曰、

允曰く、


동윤이 말하기를,



本所以出者、欲與同好游談耳、

「本の出づる所以は、與同(とも)に游談を好むるを欲するのみ。


지금 나가는건 친구들하고 노가리까고 놀려고 하는 것이오.



君以自屈、方展闊積、

君、自屈を以てし、方に闊積を展ぶ。


그대는 자신을 굽히고, 쌓아둔 것을 풀어두고자(뭔가 말하러 온 모양?) 하였소.



舍此就彼、非所謂也、

此を舍てて彼に就くは、謂ふ所に非ざるなり」と。


이를 내버려두고 쟤네랑 놀러가는 것은 말도 안되오.



命解驂止駕、

命じて驂を解きて駕を止む。


명하여 말을 풀고, 수레를 멈추게 하였다.



允之下士接物、皆此類也、君子以爲有周公之德、

允の下士に接するは、皆な此の類なり、君子以爲へらく周公の德有りと。


동윤이 아랫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아,

군자를 대하는 태도 훌륭하여, 주공의 덕이 있었다.


八年秋、皇太后呉氏薨、謚曰穆、冬十有一月、大將軍禕行軍漢中、



八年秋、皇太后呉氏薨

八年秋、皇太后の呉氏薨ず。


연희8년(245) 가을, 황태후 오씨가 죽었다.



謚曰穆、

謚して穆と曰ふ。


시호를 목이라 하였다.



冬十有一月、大將軍禕行軍漢中、

冬十有一月、大將軍禕、漢中に行軍す。


십일월, 대장군 비의가 한중으로 군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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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年,夏六月,禕還成都。秋,大赦。司農孟光眾責禕曰:張、吳、何、王、浙、石本同《光傳》作「於眾中責禕曰」。「夫赦者,偏枯之物,非明世之所宜有也。張、吳、何、王、石本同《光傳》無之字。浙本擠補之字。今主上賢仁,百寮稱職,有何旦夕之急,數施非常之恩,以惠奸軌元豐與劉、李、《函》、廖本作軌。錢、張、吳、何、王、浙、石本作宄。二字古通。之惡。上犯天時,下違人理,豈具瞻之高美,所望於明德哉?」禕但顧謝焉。初,丞相亮錢、《函》二本無亮字。時,有言公惜赦者。亮《函海》本無此字荅《函》、王、浙、石本作答。曰:「治世以大德,不以小惠。故匡元豐本作●。衡、吳漢不願為赦。先帝亦言:吾周旋陳元方、鄭康成間,每見啟告,治亂之道「備」〔悉〕裴注引作悉。矣,元豐、錢、劉、李、《函》本無矣字。劉、李本作嘗。不語赦也。若景升、元豐本作昇。季王父子,歲歲赦宥,何益於治?」故亮時,軍旅屢興,〔赦〕元豐及廖本無此赦字。他本有。不妄下也。自亮沒後,茲制遂虧。蜀初闕三司之位,以待天下賢人。其卿吳本誤鄉。士,皆勳德融茂:太常杜瓊,學通行脩;衛尉陳震,忠惇篤粹;孟光,亮直著聞;皆良幹也。但光好指擿張、吳、何、王、浙、石本作摘。字通。利病。大吳、何、浙本作太。一何本作大。長秋南陽許慈,普記此下,宋、明舊本並有一小闕字。其下,元豐本空三格,錢、劉、李本空五格,又下並有性字。張、吳、何、王、浙、石本不空,有「載籍掌典舊文」六字,無性字。〔舊文,矜妒成〕性;茲依《三國志‧許慈傳》補五字。說詳注釋。光祿來敏,此下張、吳、何、王、浙、石本有「荊楚名族東宮耆宿以」九字。他各本無。舉措不慎,失勢事者指;此廖刻依元豐本舊文,錢、劉、李、《函》同。張、吳、何、王、石本無「失勢事者」四字,改作「前後數貶」,仍有指字。浙本剜改從舊刻。當世美名,不及特進。太常廣漢鐔承、光祿勳河東裴雋,元豐、錢、劉、李、《函》、廖本作雋,他本作。字通。〔年資皆在其後,而登據上列,蓋以此〕也。舊刻也字上有脫。茲依《許慈傳》文補十四字。說詳注釋。其朝臣:尚書巴西司學、義陽胡博,僕射巴西姚,吳、何、王、浙、石本作佃。侍中汝南陳祗,並讚吳、何、王、浙、石本作贊。事業。〔左將軍向朗〕以故丞相長史「向朗為左將軍」〔封顯明亭侯,位特進。〕舊刻訛奪。茲依《朗傳》訂正。並補八字。說詳注釋。朗自去長史,優遊無事,乃鳩合經籍,開門誘士,講論李本無此二字。古義,不預世務。是以上自執事,元豐、錢、劉、李、《函》、廖本作事。張、吳、何諸本依《朗傳》改作政。下及童冠,莫不宗敬焉。冬十有一月,大司馬琬卒,謚曰恭侯。「中」〔尚〕書令董允亦卒。超遷蜀郡太守南陽呂乂《函海》本作又。為尚書令。進姜維為衛將軍,與大將軍禕並錄尚書事。「維出隴西。與魏將郭淮、夏侯霸戰,剋之」。「與魏將」下劉、李本有「軍」字;「剋」錢寫作剋,他本作「克」。按上十五字,《三國志‧姜維傳》與《郭淮傳》皆當在延熙十年。疑舊傳寫者妄以《後主傳》是年未著此事,改移。茲訂正。

연희 9년의 경우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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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涼州胡王白虎文・治無戴等率衆降、衞將軍維徙之繁縣

十年、涼州の胡王白虎文・治無戴等、衆を率ゐて降り、衞將軍維、之を繁縣に徙す。


연희10년(247),양주의 호왕 백호문이 치무대등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여, 위장군 강유는 그를 번현으로 옮겼다.




汶山平康夷反、維復討平之、

汶山平康の夷反し、維は復た討ちて之を平ぐ。


문산군 평강현의 만족이 반역을 일으켜, 강유는 다시 토벌에 나서 이를 평정하였다.



過見廖立、意氣自若、

過ぎて廖立を見るに、意氣自若たり。


지나는 길에 요립을 만났는데, 요립은 여전히 의기자약하였다.



維還、假節、

維還りて、節を假せらる。


강유는 귀환하여 절을 수여받았다. (가절)
 


十 一年、鎭北將軍王平卒、以中監軍胡濟爲驃騎將軍・假節、領兗州刺史、代平督漢中事、平始出軍武、不大知書、性警朗、有思理、與馬忠竝埀事績、平同郡勾扶亦 果壯、亞平、官至右將軍、封宕渠侯、後張翼與襄陽廖化竝爲大將、故時人爲語曰、前有何・勾、後有張・廖、平本養外家何氏、後復姓、夏五月、大將軍禕出屯漢 中、



十一年、鎭北將軍王平卒す。


연희11년(248), 진북장군 왕평이 죽었다.



中監軍の胡濟を以て驃騎將軍・假節と爲し、兗州の刺史を領せしめ、平に代へて漢中の事を督せしむ。


중감군 호제를 거기장군 가절로 삼고, 연주자사에 임명해 왕평 대신 한중의 일을 감독케 했다.

(한중의 일을 감독케 한건지, 독한중사란 관직이 있는건지...)



平、始め軍武に出づれば、大いに書を知らざるも、性は警朗、思理有りて、馬忠と竝びて事績を埀る。


왕평은 군문에서 나온 자로 낫놓고 기억자도 몰랐으나,
 
성정이 기민하고 사리가 있어, 마충과 더불어 공적을 올렸다.



平の同郡の勾扶も亦た果壯にして、平に亞ぎて、官は右將軍に至り、宕渠侯に封ぜらる。


왕평의 동향인인 구부도 또한 용맹하여, 왕평에 버금가는 자였는데,

관위는 우장군에 이르고, 탕거후에 봉해졌다.



後に張翼と襄陽の廖化、竝びに大將と爲る。


후에 장익, 양양의 요화와 더불에 대장이 되었다.



故に時の人語を爲して曰く、


이에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前には何勾有り、後には張廖有り」と。


앞엔 하xx(?)와 구부가 있었고, 뒤엔 장익, 요화가 있다.“ 라 하였다.



平は本と外家の何氏に養はれ、後に姓を復す。


왕평은 본래 외가인 하씨 집에서 키워졌는데, 후에 다시 왕씨를 성으로 삼았다.



夏五月、大將軍禕出でて漢中に屯す。


오월, 대장군 비의가 출진하여 한중에 주둔하였다.


十二年、魏嘉平元年也、魏誅大將軍曹爽、右將軍夏侯霸來降、淵子也、拜車騎將軍、夏四月、大赦、秋、衞將軍維出雍州、不克、將軍勾安・李韶降魏、



十二年は、魏の嘉平元年なり。


연희 12년(249)은 위의 가평 원년이다.



魏は大將軍の曹爽を誅し、右將軍の夏侯霸來降す。


위의 대장군 조상이 주살되어, 우장군 하후패가 항복해왔다.



淵の子なり。


이는 하후연의 자식이다.



車騎將軍に拜せらる。


거기장군직을 받았다.



夏四月、大赦す。


4월, 대사면을 행했다.



秋、衞將軍維雍州に出づるも、克たず、將軍の勾安・李韶、魏に降る。


가을. 위장군 강유는 옹주에 출병하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장군 구안, 이소가 위에 항복했다.


十三年、衞將軍維復出西平、不克而還、


十三年、衞將軍維、復た西平に出づるも、克たずして還る。


연희 13년(250) 위장군 강유가 다시 서평에 출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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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夏四月,後主西巡,至湔山廖本注云:「當衍」。廖本依《後主傳》注云:「當有觀字」。茲不取,說在注釋。阪,觀汶川之流。武都氐王符《三國志‧後主傳》與《張嶷傳》並作苻。健請降,將軍張尉迎之,過期不〔至〕。大將軍琬憂之。牙門將巴西張嶷曰:「健求附款至,必無返滯。張、吳、何、王、石本同《三國志‧張嶷傳》作「必無他變」。元豐及錢、劉、李、《函》、廖本作「返滯」。張佳胤好用《陳志》文改《常志》,非是。聞健弟狡,不能同功,各將乖離,是以稽李本作嵇。耳。」健弟果叛就魏。健率四百家隨尉,居廣都縣。

연희 14년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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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呉主孫權薨、子亮立、來告赴、如古義也〔一〕、立子琮爲西河王、命大將禕開府、尚書令呂乂卒、以侍中陳祇守尚書令、加鎭軍將軍、



十五年、呉主孫權薨じ、子の亮立つ。


연희 15년(251), 오주 손권이 죽었고, 자식인 손량이 뒤를 이었다.



來たりて赴を告ぐること、古義の如しなり。


부고를 전함에 있어서 옛 방식을 따라서 행했다.



子の琮を立てて西河王と爲す。


유선님하가 아들 유종을 세워 서하왕으로 삼았다.



大將禕に命じて府を開かしむ。


대장군 비의에게 개부할 것을 명했다.



尚書令の呂乂卒し、侍中の陳祇を以て尚書令を守せしめ、鎭軍將軍を加ふ。


상서령 여예가 죽어, 시중 진기로 상서령을 대행케 하고, 진군장군의 직을 더했다.



十 六年春正月朔、魏降人郭脩因賀會、手刃殺大將軍費禕於漢壽、謚曰敬侯、禕當國、名略與蔣琬比、而任業相繼、雖典于外、慶賞刑威咸咨於己、承諸葛之成規、因 循不革、故能邦家和壹、自禕歿後、閹宦并權、衞將軍維自負才兼文武、加練西方風俗、謂自隴以西可制而有、禕常裁制、至是無憚、屢出師旅功績不立、政刑失錯 矣、夏四月〔一〕、維將數萬攻南安、魏雍州刺史陳泰捄之、維糧盡還、



十六年春正月朔、魏の降人郭脩、賀會に因りて、手づから大將軍費禕を漢壽に刃殺す。

연희16년(53) 정월 초, 위국 출신의 투항자 곽수가 한수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대장군 비의를 찔러죽였다.


謚して敬侯と曰ふ。

시호를 경후라 한다.


禕の國に當たるの名は、略(ほ)ぼ蔣琬と比び、任業相い繼ぐ。

비의의 국병을 쥔자로서의 명성은 장완에 비할 정도이며, 후임으로서 일했다.


外を典ると雖も、慶賞刑威は咸な己に咨(はか)る。

그가 외지에 있더라도, 상벌에 있어서는 그에게 물어 정하였다.


諸葛の成規を承け、因循して革めず、故に能く邦家、壹に和せるも、禕歿して自りの後、閹宦、權を并(あは)す。

제갈량의 제도를 승계하여 이를 지키고, 고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가는 하나로 융화할 수 있었으나, 비의가 죽은 뒤로는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衞將軍維は自ら才を負ひて文武を兼ね、加へて西方の風俗に練(な)れ、隴自り以西、制して有(たも)つ可しを謂ふ。

위장군 강유는 재능이 뛰어나다 자부했고, 문무에 두루 능했다.
이에 더하여 자신은 서방의 풍속에 익숙하여 농서지역을 제압하여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禕は常に裁制するも、是に至りて憚らず、屢ゞ師旅を出だすも功績立たず、政刑失錯す。

비의는 늘 이를 제재하였으나, 이 때에 이르러, 강유는 지잣대로 해댔기 때문에
 계속군대를 출병시켰으나, 이기지도 못하고 정치와 형벌의 도리만 엉망으로 만들었다.


夏四月、維は數萬を將ゐて南安を攻め、魏の雍州刺史陳泰、之を捄ふ。

사월, 강유는 수만 군세를 이끌고 남안을 공격하였는데, 위의 옹주자사 진태가 이를 막았다.


維は糧盡きて還る。

강유는 밥 지을 쌀이 떨어져서 돌아왔다.



十七年、魏正元元年也、春、衞將軍維督中外軍事、大赦、夏六月、維復出隴西、魏狄道長李簡擧縣降、維圍襄武、魏大將徐質捄之、維拔狄道・河關・臨洮三縣民入蜀、居于綿竹及繁、是歳、魏帝齊王芳廢、高貴鄕公即位、



十七年は、魏の正元元年なり。

연희17년은 위의 정원 원년이다.



春、衞將軍の維をして中外の軍事を督せしむ。

봄, 위장군 강유로 하여금 중외의 군사업무를 감독하게 했다.



大赦す。

대사면을 행했다.



夏六月、維は復た隴西に出で、魏の狄道の長李簡、縣を擧げて降る。

6월, 강유는 다시 농서에 출병하였는데, 위의 적도현장인 이간, 현 통째로 투항해왔다.



維、襄武を圍み、魏の大將徐質、之を捄ふ。

강유가 양무를 포위하자 위의 대장 서질이 구원차 왔다.



維は狄道・河關・臨洮三縣を拔きて民を蜀に入れ、綿竹及び繁に居らしむ。

강유는 적도, 하관, 임도의 세 현을 공략하여 백성을 촉으로 납치해 면죽 및 번에 거하게 했다.



是の歳、魏帝齊王芳廢せられ、高貴鄕公即位す。

이 해, 위의 황제 제왕 조방이 폐하여지고, 고귀향공이 즉위했다. 



十八年春、衞將軍維復議出征、征西大將軍張翼廷爭、以國小不宜黷武、維不聽、夏、率車騎將軍夏侯霸及翼出狄道、大破魏雍州刺史王經于洮西、經衆死數萬、經退保狄道城、翼曰、可矣、不宜進、或毀此成功、爲虵畫足、維必進、魏征西將軍陳泰捄狄道、維退駐鍾題、



十八年春、衞將軍維復た出征を議す。

연희18년 봄, 위장군 강유가 다시금 출정할 것을 논했다.



征西大將軍張翼廷爭し、「國の小なるを以て武を黷するは宜しからず」と。

정서대장군 장익이 논쟁하여 말하기를 [나라가 작은데도 쌈질만 하는건 안되거든여]라고 했다.



維聽かず。

강유는 듣지 않았다.



夏、車騎將軍夏侯霸及び翼を率ゐて狄道に出で、大いに魏の雍州刺史王經を洮西に破る。

여름, 거기장군 하후패 및 장익을 이끌고 적도에 출병하여,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조서에서 크게 격파했다.



經の衆の死せるは數萬、經は退きて狄道城を保つ。

왕경의 무리중 죽은 자가 수만, 왕경은 물러나서 적도성을 지켰다.



翼曰く、「可なり。宜しく進むべからず。

장익이 말하기를, [참잘했어여, 근데 더 전진하진 마센.



或いは此の成功を毀るは、虵の爲に足を畫くがごとしなり」と。

혹여 이 성공을 훼손하는 것은 뱀을 그리면서 발을 그리는 것이에여]라고 말했다.



維は必ず進まんとす。

강유는 결국 진군했다.



魏の征西將軍陳泰の狄道を捄ふに、維は退きて鍾題に駐す。

위 정서장군 진태가 적도성을 구원하니,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주둔했다.



十九年、魏甘露元年也、春、進衞將軍姜維爲大將軍、秋八月、維復出天水、至上邽、鎭西大將軍胡濟失期不至、大爲魏將鄧艾所破、死者衆、士庶由是怨維、而隴以西亦無寧歳、冬、維還、謝過引負、求自貶削、於是以維爲後將軍、行大將軍事、立子瓚爲新平王、大赦、



十九年は、魏の甘露元年なり。

연희 19년은 위나라 감로 원년이다.



春、衞將軍の姜維を進めて大將軍と爲す。

봄, 위장군 강유를 승진시켜 대장군으로 삼았다.



秋八月、維は復た天水に出で、上邽に至るも、鎭西大將軍胡濟は期を失ひて至らず、大いに魏の將鄧艾の破る所と爲る。

8월, 강유는 다시 천수에 진출하여, 상규에 이르렀으나,
진서대장군 호제가 안와서 위국의 장수 등애한테 왕창 깨져버렸다.



死者衆(おほ)く、士庶、是に由りて維を怨みて、隴より以西も亦た寧歳無し。

죽은자가 많아서 백성 관리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지역이 시끄러워졌다.



冬、維還り、過ちを謝して負を引き、自ら貶削せられむことを求む。

겨울, 강유가 돌아와 사죄하는 의미로 관작을 낮춰줄 것을 바랬다.



是に於いて維を以て後將軍と爲し、大將軍の事を行ぜしむ。

이에 강유를 후장군으로 삼고, 대장군의 일을 대행케 하였다.



子の瓚を立てて新平王と爲す。大赦す。

황자 유찬을 세워 신평왕으로 삼았다. 대사면을 행했다.



二十年春、大赦、魏征東大將軍諸葛誕以淮南叛、連呉、魏分關中兵東下、後將軍姜維復從駱谷出長城、軍芒水、與魏大將司馬望・鄧艾相持、




二十年春、大赦す。

연희 20년 봄, 대사면을 행했다.



魏の征東大將軍諸葛誕、淮南を以て叛し、呉に連なる。

위국 정동대장군 제갈탄, 회남에서 반란하여, 오나라에 연합했다.



魏は關中の兵を分かちて東下せしむ。

위는 관중의 병력을 나누어 동쪽으로 보냈다.



後將軍姜維は復た駱谷從り長城に出で、芒水に軍し、魏の大將司馬望・鄧艾と相い持す。

후장군 강유는 다시 낙곡을 경유하여 장성에 출병하여 망수에 포진하고, 위의 대장 사마망, 등애와 대치하였다.


景耀元年,維以誕破,退。還成都,復拜大將軍。史官言景星見。大赦,改元。

경요(景耀) 원년(元年-258), 제갈탄()이 격파당하자() 강유()는 퇴군하였다(退). 성도(成都)로 돌아오자(), 대장군(大將軍)으로 복배(復拜)하였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이 보였다고() 말하였다(). 대사(大赦-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改元).


宦人黃皓與書令陳祗相表裏,始預政。

환인(宦人) 황호(黃皓)() 상서령(書令) 진지(陳祗)는 서로 표리(表裏-뗄 수 없음을 뜻함)하였는데, 일찍히() (진지가 황호를) 조정의 일에 참여시켰다(預政).


皓自黃門丞至今年奉車騎〈宋、明、刻本俱作騎。錢寫本同《三國志》作都。〉尉、中常侍。姜維雖班在祗右,權任不如。

황호()가 스스로() 황문승(黃門丞)에 이르었는데(), 금년(今年-258)에 봉거기위(奉車騎尉), 중상시(中常侍)에 임명되었다. 비록() 강유(姜維)의 반열(班在)이 더 높았지만(祗右), 권임(權任-권한과 신임)은 같지 아니하였다(不如).

[① 송(), (), ()의 각 판본(刻本)에서는 모두() ()라고 저술한다(). 전사본(錢寫本)은 《三國志(삼국지)》와 동일하게() (騎가 아닌) ()라 저술한다().-역자주: , , 청의 화양국지 판본은 봉거기위(奉車騎尉), 삼국지에서는 봉거도위(奉車都尉).]


蜀人無不追思董允者。

촉의 사람(蜀人)중 동윤(董允)을 추사(追思-추억, 회상)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無不).


時兵車久駕,百姓疲弊,太〈吳、何、王本作大。〉中大夫〈《三國志》作「中散大夫」。〉譙周著《仇國論》,言可文王,難漢祖。人莫察焉。

이때 병거(兵車-전쟁에 쓰이는 수레)를 오랬동안 몰아대니(久駕-역자주: 여러차례 전쟁을 일으켰다는 뜻인 듯.), 백성(百姓)들이 피폐(疲弊)해졌는데, 태중대부(太中大夫)①② 초주가《구국론(仇國論)》을 저술하여(), 문왕(文王)이 될 수 있다고 하였지만, 한조(漢祖-유방)이 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주의깊게 살펴보지(察焉) 아니하였().

[① 오본(), 하본(), 왕본(王本) (太가 아닌) ()라고 저술한다().]

[②《삼국지(三國志)》에서는 (太中大夫가 아닌)「중산대부(中散大夫)」라 저술한다().]


征北大將軍宗預自永安徵,拜〈顧廣圻校稿云:「考《三國志》,是軍大將軍。此恐誤也。」廖本注云,「當作軍,見《三國志》」。今按,《常志》與《陳志》恆多歧互。往往能證《陳志》之訛。時陳祗為尚書令加大將軍則預不能亦為鎮軍矣。「南」字不誤。說詳注釋。〉將軍,

領兗州刺史。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 종예(宗預)가 몸소 영안(永安)에서 진수하였는데(), 진남장군(南將軍), 영연주자사(領兗州刺史)로 삼았다().

[① 고광기(顧廣圻)가 교고(校稿)하여 이르기를(): 「《삼국지(三國志)》를 살필 경우(), 진군대장군(軍大將軍)이 옳다(). 이는() 아마도() 오류라 할 수 있다(誤也).」 요본(廖本)의 주석()에 이르기를(), 「마땅히() (南이 아닌) ()이라 저술해야 하며(), 《삼국지(三國志)》에서 볼 수 있다(). 지금()《상지(常志)》와() 《진지(陳志)》를 살필 경우(), () 자주() 둘을 오가곤 한다(-역자주: 확실하지 않은 의역). 때때로(往往) 《진지(陳志)》의 그릇됨(之訛)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能證). 이때() 진지(陳祗)는 상서령(書令)을 역임하였는데() 진군대장군(軍大將軍)을 더하는 것은() 법칙에 의하면() 불능(不能)하니 또한 진군()을 역임한 것이다(). 「진남()」이라는 글자()는 그릇된 것이 아니다(不誤). 자세히 진술하여(說詳) 주석()을 설명하다()]


以襄陽羅憲」〔領〕〈依《晉書憲傳》改。《巴志》亦云「領軍」。〉軍,督永安事。吳大臣廢其主亮,立孫休,來告難,如同盟也。

이에 양양(襄陽) 사람 나헌()을 영군(), 독영안사(督永安事-영안의 사무를 감독하게 하였다)로 삼았다. ()의 대신(大臣-손침)이 황제() 손량()을 폐()하고, 손휴(孫休)를 세웠는데, 어지러움()을 내고(來告)하니, 동맹(同盟) (예전과) 같게 하였다().

[《진서(晉書)나헌전(憲傳)》에 의거하여() (에서領으로) 고친다().《파지(巴志)》또한() 이르기를() (軍이 아닌)「영군(領軍)」이라 한다.]


大將軍維議,以:「漢中錯守諸圍,適可禦敵,不獲大利。不若退據漢、樂二城,積穀堅壁。聽敵入平,〈顧校稿云:「廣圻按,後作坪。」〉且重關守以禦「大」〔之〕〈廖本注云:「當作之,句。見《三國志》。」茲據改。〉敵攻關不克,野無散穀,千里懸糧,自然疲退。此殄〈元本作餌。〉敵之術也。」於是督漢中胡濟卻守漢壽,將軍王含守樂城,護軍蔣「舒」〔斌〕〈《函海》本注云:「《蜀書》蔣琬、姜維二傳俱作蔣斌。」顧廣圻校稿亦註「斌」字。廖本注云:「當作斌,見《三國志》。」〉守漢城。

대장군(大將軍) 강유()가 논의하여(), 이를 근거로 시행하였다():「한중(漢中)에서 여러 위(諸圍)를 조수함(錯守)으로, 어적(禦敵-외적을 막음)을 할 수 있지만,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지 아니합니다.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으로 퇴거(退據)하여 곡식을 쌓아두고(積穀) 견벽(堅壁)하는 것만 못합니다(不若). ()이 평지에 들어왔다는(入平) 소식을 듣는다면(), 또한() 중관(重關)을 진수()하여 적의 공세를(敵攻) 막아낸다면(以禦)()을 이기지 못할 것이고(不克), 들에도() 흩어져있는 곡식(散穀)이 없는데다가(), 천리(千里)나 되는 길로 곡식을 운반해야하니(懸糧), 자연히(自然) 피곤하게 되어() 퇴군할 것입니다(退). 이는() ()을 모조리 섬멸시킬() 수 있는 술책(之術)입니다().」이를 따라서 독한중(督漢中) 호제(胡濟)를 한수(漢壽)로 물러나서 지키도록 하고(卻守), 장군(將軍) 왕함(王含)에게 낙성(樂城)을 지키도록 하고(), 호군(護軍) 장빈(蔣斌)에게 한성(漢城)을 지키도록 하였다.

[① 고교고(顧校稿)에서 이르기를():「고광기(廣圻)가 살펴보기에는(),이후() (平이 아닌) ()이라 저술한다().]

[② 요본(廖本)의 주석()에서 이르기를(): 「마땅히() (大가 아닌) ()라 저술해야 한며(),구절()이 끊겼다().《삼국지(三國志)》에서 보인다().」이를() 근거()삼아 고친다().]

[③ 원풍본() (殄이 아닌) ()라 저술한다().]

[④《함해(函海)》본주(本注)에서 이르길:「《촉서(蜀書)》장완전(蔣琬傳)과 강유전(姜維傳)에서 모두 (장서蔣舒)가 아닌 장빈(蔣斌)이라 저술한다. 」고광기(顧廣圻)가 교고(校稿)하여 또한 풀어쓰기를(亦註), 「빈()」이라는 글자라 한다(). 요본(廖本)의 주석()에서 이르길: 「《삼국지(三國志)를 보니, ()이라 쓰는게 마땅하다(當作).》」]


二年夏六月,立子諶北地王,恂新興王,虔上黨王。以征西張翼左車騎將軍,領冀州刺史。廣武督〈元本無督字。顧廣圻校稿云「當有督」。〉廖化右車騎將軍,領州刺史。時南郡閻宇右「衛」〈依《姜維傳》及裴注引《襄陽記》刪。〉大將軍。

(경요) 2(259) 여름() 6, (황제의) 아들() 유심()을 북지왕(北地王)으로 삼고, 유순()을 신흥왕(新興王)으로 삼고, 유건()을 상당왕(上黨王)으로 삼았다. 그로인하여 정서(征西)장군 장익(張翼)을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 영기주자사(領冀州刺史)로 삼았다. 광무독(廣武督) 요화(廖化)를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 영병주자사(州刺史)로 삼았다. 이때 남군(南郡) 사람 염우(閻宇)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이었다.

[① 원풍본()에서는 독()이라는 글자()가 없다(). 고광기(顧廣圻)가 교고(校稿)하여 이르기를():마땅히() ()이 있어야 한다().)]

[② 강유전(姜維傳)에 배주(裴注)로 인용된 양양기(襄陽記)에 의거하면 () 삭제해야 한다()]


秋八月丙子,領中護軍陳祗卒。謚曰忠侯。祗在朝,上希主指,下接閹宦,後主甚善焉。以僕射南侯董厥為尚書令。

가을() 8월 병자(丙子), 영중호군(領中護軍) 진지(陳祗)가 졸()하였다. 시호()는 충후(忠侯)였다. 진지()가 조정에 있었을 때(在朝), ()로는 황제(-유선)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엄환(閹宦-환관, 내시)과 어울리니(), 후주(後主-유선)가 심히 아꼈다(甚善焉). 이로써 복사(僕射), 남향후() 동궐(董厥)이 상서령(書令)을 역임하였다().


三年,〈《函海》本上衍「景耀」二字。〉魏景初元年也。

(경요) 3 (260), ()의 경초(景初) 원년(元年)이었다.

[《函海(함해)()에서는 앞에()경요(景耀)의 두글자(二字)를 배치하였다().]


秋「八」〔九〕〈廖本「八月」。他各本同《後主傳》並作「九月」。〉月,追謚故前將軍關羽曰壯繆侯,車騎將軍張飛曰桓侯,驃騎將軍馬超曰威侯,軍師龐統曰靖〈元本作靜。〉侯,後將軍黃忠曰剛侯。

가을() 9, () 전장군(前將軍) 관우(關羽)에게 시호를 추증하여(追謚) 장목후(壯繆侯)라 하였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장비(張飛)는 환후(桓侯), 표기장군(驃騎將軍) 마초(馬超)는 위후(威侯), 군사(軍師) 방통(龐統)은 정후(靖侯), 후장군(後將軍) 황충(黃忠)은 강후(剛侯)라 하였다.

[① 요본(廖本)에서는팔월(八月)이라 한다.. 다른() 각본(各本)《後主傳(후주전)과 동일하게 나란히「九月(구월)이라 저술한다.]


是歲,魏帝高貴公卒,〈張、吳、何、王、石本無卒字。浙本擠補。〉常道公即「帝」位。〈舊各本有帝字。當衍。〉

이때, ()의 황제() 고귀향공(高貴-조모)이 졸()하였는데, 상도향공(常道-조환)이 즉시 (황제로) 옹립되었다(即位).

[① 장본(), 오본(), 하본(), 왕본(), 석본(石本) 모두 졸()이라 하지 않는다(). 절본(浙本)이 이를 고친 것이다(擠補).]

[ 옛날의() 각 판본(各本)들에는 (即와 位) 사이에()라는 글자()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배치해야 한다(當衍).]


四年,春三月,追謚故軍趙雲〈元本作云。〉曰順平侯。

(경요) 4 (261) () 3, () 진군()장군 조운()의 시호를 추증하여(追謚) 순평후(順平侯)라 하였다.

[원풍본()에서는 (이 아닌) ()이라 저술한다.]


冬十月,大赦。拜丞相亮子武侯瞻中都護、衛將軍。遷董厥輔國大將軍,與瞻輔政。以侍中義陽樊建守書令。自瞻、厥用事,黃皓秉權,無能正〈張、吳、何、王、浙本同《三國志》作匡。〉矯者,惟建特〈錢、《函》二本作持。〉不與皓和好往來。

겨울() 10, 대사(大赦-대사령)를 내렸다. 승상(丞相) 제갈량()의 아들() 무향후() 제갈첨()을 중도호(中都護), 위장군(衛將軍)으로 삼았다. 동궐(董厥)을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옮겨 봉하고(), 제갈첨과 더불어 국정을 돕도록 하였다(輔政). 이에 시중(侍中) 의양(義陽) 사람 번건(樊建)이 수상서령(書令)이 되었다. 제갈첨()과 동궐()이 조정에서 일했을(用事) 무렵(), 황호(黃皓)가 병권(用事-권력을 잡는 것)하였는데, (제갈첨과 동궐이) 이를 바로 잡을(正矯) 수 없어서(無能), 오로지() 번건()만이 특히() 황호()와 어울리지 않아(不與), 화호(和好)하거나 왕래(往來)하지 아니하였다.

[① 장본(), 오본(), 하본(), 왕본(), 절본(浙本)삼국지(三國志)와 동일하게() ()이라 저술하였다().-역자주: 진수는 無能正矯가 아닌 無能匡矯라 적음.]

[② 전본(錢本)()본에서는 (이 아닌) ()라 저술한다().]


而秘書令河南〈王、浙本作。〉正與皓比屋周旋,皓從微至著,不憎正,又不愛之,官不過六百石,常免於憂患。〈張、吳、何、王、浙、石本有小注云:「按《晉百官表》,厥字龔襲亦義陽人。建字長元。」張佳胤錄裴注文也。〉

그러나 비서령(秘書令) 하남(河南) 사람 극정()은 황호()와 함께 일을 처리하였는데(比屋周旋), 황호()가 미천하게 시작하여(從微) 귀한 신분에 이르었는데(至著-至貴의 오기가 아닌가 합니다), 원래() 극정()을 미워하지 아니하고(不憎), () 사랑하지도 아니하였는데(不愛之), 관직() 6백석()을 지나지 아니하였지만(不過), 일정하게() 우환(憂患)을 면하게 되었다().

[ 왕본(), 절본(浙本)에서는 극()이라 저술한다.-역자주: , 극정()이라 서술한다는 뜻.]

[② 장본(), 오본(), 하본(), 왕본(), 절본(), 석본(石本)에 기재된() 소주(小注)에 이르기를(): 「《진백관표(晉百官表)를 살펴보면()동궐()의 자()는 공습(龔襲)이며 또한() 의양인(義陽人)이라 한다. 번건()의 자()는 장원(長元)이다.장가윤(張佳胤)이 기록하기를() 배주(裴注)의 문장()이라 한다().]


五年,春正月,西河王琮卒。大將軍維惡皓之恣擅,後主,欲殺之。後主曰:「皓趨走小臣耳。往者董允切齒,吾常恨之。君何足介意。」維本羈旅自託,而功效無稱,見皓枝附葉連,懼於失言,遜辭而出。

(경요) 5 (262) () 정월(正月), 서하왕(西河王) 유종()이 졸()하였다. 대장군(大將軍) 강유()는 황호()가 자천(恣擅-멋대로 하는 것)하는 것을 미워하여(), 후주(後主-유선)에게 아뢰어(),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欲殺之). 후주(後主-유선)가 말하기를:황호()는 추주(趨走-종종걸음으로 빨리 걷는 것)하는 소신(臣耳)에 불과하오. 옜날에 동윤이 (황호를) 절치(切齒-이를 갈며 증오함)하여, ()가 늘() 이를 한스럽게 여겼었소(恨之). 그대()가 어찌 개의(介意-마음데 두고 생각함)할 일이겠소? 강유가 본래() 기려(羈旅)가 되어 몸소 (나라에) 의탁하였는데, 공효(功效)라 칭할게 없으니(無稱), 황호(와 유선이) 지부엽련(枝附葉連-관계가 긴밀함을 뜻함)임을 보자(), 실언(失言)했음을 두려워하여(), 공손히 사례하고(遜辭) 물러났다().


後主敕皓詣維陳謝。維誘〈《三國志》裴注引此作說。〉皓求沓中種麥,以避內逼。皓承白後主。

후주(後主-유선) 황호()에게 칙서를 내려 명하여() 강유()에게 진사(陳謝-사죄)하도록 하였다. 강유()는 황호()를 달래어() 답중(沓中)에서 맥(-, 보리)을 농사할 것이라 청하니(), 이로써() 안으로의 핍박을(內逼) 피하게 되었다(). 황호()는 이를 받아들여() 후주(後主)에게 아뢰었다().

[ 삼국지(三國志)의 배주(裴注)에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引此) (이 아닌) ()이라 저술하였다().]


秋,維出侯和,魏將鄧艾所破,還駐沓中。皓協比閻宇,欲廢維樹宇。故維懼不敢還。〈張、吳、何、王、浙、石本有小注曰:「按,沓中即古松州。去文州三百里。」亦張佳胤所增注。〉

가을(), 강유()가 후화(侯和)로 출병하여(), ()의 장수() 등애(鄧艾)에게 격파당하니(所破), 답중(沓中)으로 돌아와 머물렀다(還駐). 황호(皓協)가 염우(閻宇)와 협비(協比-결탁)하였는데,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대신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강유()는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 장본(), 오본(), 하본(), 왕본(), 절본(), 석본(石本)에 기재되어 있는() 소주(小注)에 이르기를():살펴보면()답중(沓中)은 곧() 예전의() 송주(松州)이다. 과거의() 문주(文州) 삼백리(三百里)이기도 하다. () 장가윤(張佳胤) 주석을 덧붙였다(增注).]


六年春,魏相國晉文王命征南〈廖本注云:「當作西,見《三國志》。」〉將軍鄧艾、西將軍鍾會、雍州刺史諸葛,「益州刺史師纂李本作慕。」五道伐蜀。〈顧廣圻校稿云:「艾自狄道,自祁山,會分從駱谷、斜谷、子午谷。是五道。」〉

(경요) 6 (263) (), ()의 상국(相國) () 문왕(文王-사마소)이 정남장군(征南將軍) 등애(鄧艾), 진서장군(西將軍) 종회(鍾會), 옹주자사(雍州刺史) 제갈서(諸葛)에게 명하여익주자사(益州刺史) 사찬(師纂)을 이본(李本)에서는 모()라 저술하였다.-역자주: 사찬(師纂)이 아닌 사모(師慕)라 적었다는 뜻. 다섯 갈래의 길(五道)을 통해 촉()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① 요본주(廖本注)에서 이르길():「《三國志(삼국지)를 보면() 마땅히() (이 아닌) (西)라 저술해야 한다.-역자주: 정남장군이 아닌 정서장군.]

[ 고광기(顧廣圻)가 교고(校稿)하여 이르길():「등애(艾自)는 적도(狄道)를 통해 가고제갈서()는 몸소() 기산(祁山)을 통해 가고, 종회()는 군사를 나누어() 낙곡(駱谷), 사곡(斜谷), 자오곡(子午谷)을 통해 갔다(). 이것이 바로 다섯 갈래의 길이다(五道).]


大將軍姜維表後主,求遣左、右車騎張翼、廖化督諸軍分護陽安關口及陰平橋頭。黃皓信巫鬼,謂敵不來,後主寢其事。

대장군(大將軍) 강유(姜維)가 후주(後主)에게 표()를 올려, 좌우거기(右車騎張)장군 장익(張翼)과 요화(廖化)를 파견보내(求遣) 제군(諸軍)을 감독하여() 양안관구(護陽安關)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황호(黃皓)가 무귀(巫鬼)를 신임하여(), ()이 오지 않으리라(不來) 이르었고(), 후주(後主-유선)에게 아뢰어() 그 일(其事-위의 침공)을 내려놓도록 하였다().


群臣不「知」〔敢言〕。〈依元本改。〉

군신(群臣)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不敢言).

[① 원풍본()에 의거하여() (群臣不知가 아닌 群臣不敢言으로) 고쳤다().]


夏,艾將入沓中,會將向駱谷,蜀方聞之。遣張翼、董厥陽安關〈張、吳、何、王、浙、石本作「安陽關」。〉外助,廖化維援繼。

여름(), 등애()의 장수()들이 답중(沓中)을 칩입하고(), 종회()의 장수()들이 낙곡(駱谷)을 향하니(),  ()에서는 모두()가 이에 대해 들었다(聞之). 장익(張翼)과 동궐(董厥)을 보내 양안관(陽安)을 외조(外助-외부로부터 지원하는 것)하도록 하고, 요화(廖化)는 강유()를 원계(援繼-구원하여 돕는 것)하도록 하였다.

[① 장본(), 오본(), 하본(), 왕본(), 절본(), 석본(石本)에서는 (陽安이 아닌)안양관(安陽關)이라 저술하였다().]


大赦,改元〈元本作年。〉炎興。

대사(大赦-대사령)를 내리고, 연호를 염흥(炎興)으로 고쳤다().

[① 원풍본()에서는 (元이 아닌) ()이라 저술한다().]


「比」〔化〕〈各舊本俱訛作比。《三國志姜維傳》同誤。茲改正,說詳注釋。〉至陰平,聞諸葛向建威,故待月餘。維鄧艾所摧,還陰平。鍾會圍〔漢〕樂〔二〕城,〈依《姜維傳》補。〉遣別將攻關。〈《姜維傳》作關口,謂陽安關也。〉分將蔣舒開門降,都〈元與廖本有都字。他各本無。〉督傅僉奮戰而死。

요화()가 음평(陰平)에 이르었는데(), 듣기에() 제갈서(諸葛)가 건위(建威)로 항하였다 하여(), 이에() 한달동안(月餘) (그곳에 머물러서) 기다렸다(). 강유()가 등애(鄧艾)에 의해 깨뜨려지자(所摧), (강유는) 음평(陰平)으로 돌아왔다(). 종회(鍾會)가 한성과 낙성을 포위하니, 장수()를 나누어() 보내어() ()을 공격하였다().분장(分將) 장서(蔣舒)가 문을 열고(開門) 항복하니(), 도독(都督) 부첨(傅僉)이 분전(奮戰)하여 사망하였다().

[① 각기() 구본(舊本)들은 모두() (가 아닌) ()라 그릇되어 저술한다(訛作).삼국지(三國志)姜維傳(강유전)도 동일하게() 오기하였다(). 이를() 개정(改正)하니, 주석(注釋)으로 더욱 상세히 설명한다(說詳).]

[ 《姜維傳(강유전)에 의거하여() 보완하였다()-역자주: 원문에서는 낙성()만 언급하고 한성()을 포위했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는다.]

[ 강유전(姜維傳)에서는 관구(關口)라 저술하여(), 양안관(陽安關)이라 일컫었다().]

[④ 원풍본()과 더불어() 요본(廖本)에는 (都督) ()라는 글자()가 있다(). 다른() 각 판본(各本)에는 없다().]


冬,會以〔漢〕樂〔二〕城不下,徑長驅而前。翼、厥之至漢壽也,維、化〔亦〕捨陰平,〔皆〕還保劍閣,拒會。〈《姜維傳》云:「翼、厥甫至漢壽,維、化亦舍陰平而退,適與翼、厥合,皆還保劍閣以拒會。」〉會不能剋,糧運懸遠,議欲還。

겨울(), 종회()는 이로써()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不下), 마침내() 장구(長驅-멀리 달림)하며 전진하였다(). 장익()과 동궐()이 한수(漢壽)에 도달하였는데(之至),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陰平)을 버리니(), 모두() 검각(劍閣)으로 돌아와() 지키고(), 종회()를 막아내었다().

[강유전(姜維傳)에서 이르기를():「장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