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興初,進號平南將軍,尋加都督交州軍事。及王敦舉兵反,詔侃以本官領江州刺史,尋轉都督、湘州刺史。敦得志,上侃復本職,加散騎常侍。時交州刺史王諒為賊梁碩所陷,侃遣將高寶進擊平之。以侃領交州刺史。錄前後功,封次子夏為都亭侯,進號征南大將軍、開府儀同三司。及王敦平,遷都督荊、雍、益、梁州諸軍事,領護南蠻校尉、征西大將軍、荊州刺史,餘如故。楚郢士女莫不相慶。
태흥太興 년 초,평남장군平南將軍으로 진급했으며,이윽고 도독교주군사都督交州軍事가 더해졌다。
왕돈王敦이 거병해 반란하자,조서를 내려 도간侃의 본관本官(주 관직?)을 영강주자사領江州刺史로 하고,이윽고 도독都督、상주자사湘州刺史로 옮겼다。
왕돈敦이 뜻을 얻자(성공하자),도간侃을 다시 본래 관직(광주자사)로 돌리도록 진헌하였으며,산시상시散騎常侍를 더했다。
당시 교주자사交州刺史 왕량王諒은 도적 양석梁碩에 의해 (교주가) 함락되었는데,도간侃이 장수 고보高寶를 보내 공격해 평정하게 하였다。
도간侃을 영교주자사領交州刺史로 삼았다。
전후의 공功을 기록해,차남 도하夏를 도정후都亭侯에 봉했으며,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진급시켰다。
왕돈王敦이 평정되자,도독형옹익양주제군사都督荊、雍、益、梁州諸軍事로 옮겼으며,영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형주자사荊州刺史로 삼았는데,나머지 관직은 이전과 같게 하였다。
초영楚郢의 백성들이 서로 기뻐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侃性聰敏,勤於吏職,恭而近禮,愛好人倫。終日斂膝危坐,閫外多事,千緒萬端,罔有遺漏。遠近書疏,莫不手答,筆翰如流,未嘗壅滯。引接疏遠,門無停客。常語人曰:「大禹聖者,乃惜寸陰,至於眾人,當惜分陰,豈可逸遊荒醉,生無益於時,死無聞於後,是自棄也。」諸參佐或以談戲廢事者,乃命取其酒器、蒱博之具,悉投之於江,吏將則加鞭撲,曰:「樗蒱者,牧豬奴戲耳!《老》《莊》浮華,非先王之法言,不可行也。君子當正其衣冠,攝其威儀,何有亂頭養望自謂宏達邪!」有奉饋者,皆問其所由。若力作所致,雖微必喜,慰賜參倍;若非理得之,則切厲訶辱,還其所饋。嘗出遊,見人持一把未熟稻,侃問:「用此何為?」人雲:「行道所見,聊取之耳。」侃大怒曰:「汝既不田,而戲賊人稻!」執而鞭之。是以百姓勤於農殖,家給人足。時造船,木屑及竹頭悉令舉掌之,鹹不解所以。後正會,積雪始晴,聽事前餘雪猶濕,於是以屑布地。及桓溫伐蜀,又以侃所貯竹頭作丁裝船。其綜理微密,皆此類也。
도간侃의 성품은 총명하고 민첩해,부지런히 직무를 다하니,공손하기가 예법에 맞고,인륜人倫을 좋아하였다。
종일 무릎을 거두어 단정히 앉으면서,군부의 직무가 매우 많으며,일일히 가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빈틈 없이 처리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온 서신들에,손수 답장을 쓰지 않음이 없었고,문장 쓰기가 물 흐르듯 하여,막히는 바가 없었다。
소원疏遠한 사람들도 들어와서 만나보니,문에는 정체하는 손님이 없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위대하신 우禹 임금께서는 성인聖者임에도,촌음寸陰을 아끼셧으니,많은 이들에 이르러서는,의당 분초分陰를 아껴야 하오,어찌 편안하게 놀고 술에 취해,태어나서는 시대에 아무런 이익을 보태지 못하고,죽어서는 후세에 명성이 없게 된다면,이는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오。」
여러 참좌參佐(보좌) 중에 누군가 잡담과 유희로 일을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그의 술잔、도박기구를 가져오라 명해,모두 강江에 던져,관리와 장수들에게 채찍을 치며,말하였다:
「저포樗蒱라는 것은,돼지를 치는 종놈들의 놀이이다!《노老》《장莊》은 겉만 화려하여,선왕들이 모범으로 삼지 않았으니,행할 수 없다。군자君子란 마땅히 그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며,그들의 위의威儀를 다스려야 하는데,어찌 헝클어진 머리로 명망을 얻으려 하며 또 스스로를 통달했다고 말하려는가!」
먹을 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그것들이 어디서 났는지를 전부 물었다。
만약 힘들여 얻은 것이라면,비록 작은 것이라도 기뻐하였고,그 세 배를 하사하며 위로하였다;만약 이치에 맞지 않게 얻은 것이라면,사납고 모질게 꾸짖고 욕하며,그 먹을 것들을 돌려보냈다。
일찍이 밖에 나가서 놀다가,한 사람이 덜 익은 벼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도간侃이 물었다:
「이를 어디에 쓰려고 하는가?」
그 사람이 말하였다:
「길을 걷다 보이길래,그냥 뜯었습니다。」
도간侃이 크게 노하며 말하였다:
「너는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놀이 삼아 다른 사람의 벼를 도적질하는 것이냐!」
잡아서 매질하였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농업에 부지런하였고,집집마다 사람들이 풍족하였다。
배를 만들면서,나무 조각과 대나무 머리를 모두 기록하여 관리하게 했는데,모두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후에 정월의 모임에서,눈이 쌓이다가 개였는데,청사聽事 앞에 남은 눈에 습기가 있어,이에 나무조각을 땅에 깔았다。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자,또한 도간侃이 쌓아 둔 대나무 머리로 정장선丁裝船을 만들었다。
그가 조리있게 처사하는 것은 자세하고 세밀하여,모두 이와 같았다。
暨蘇峻作逆,京都不守,侃子瞻為賊所害,平南將軍溫嶠要侃同赴朝廷。初,明帝崩,侃不在顧命之列,深以為恨,答嶠曰:「吾疆場外將,不敢越局。」嶠固請之,因推為盟主。侃乃遣督護龔登率眾赴嶠,而又追回。嶠以峻殺其子,重遣書以激怒之。侃妻龔氏亦固勸自行。於是便戎服登舟,星言兼邁,瞻喪至不臨。五月,與溫嶠、庾亮等俱會石頭。諸軍即欲決戰,侃以賊盛,不可爭鋒,當以歲月智計擒之。累戰無功,諸將請於查浦築壘。監軍部將李根建議,請立白石壘。侃不從,曰:「若壘不成,卿當坐之。」根曰:「查浦地下,又在水南,唯白石峻極險固,可容數千人,賊來攻不便,滅賊之術也。」侃笑曰:「卿良將也。」乃從根謀,夜修曉訖。賊見壘大驚。賊攻大業壘,侃將救之,長史殷羨曰:「若遣救大業,步戰不如峻,則大事去矣。但當急攻石頭,峻必救之,而大業自解。」侃又從羨言。峻果棄大業而救石頭。諸軍與峻戰陳陵東,侃督護竟陵太守李陽部將彭世斬峻於陣,賊眾大潰。峻弟逸復聚眾。侃與諸軍斬逸於石頭。
소준蘇峻이 반란하기에 이르자,경도京都를 지킬 수 없어,도간侃의 아들 도첨瞻은 도적들에게 살해되었고,평남장군平南將軍 온교溫嶠는 도간侃에게 함게 조정朝廷으로 나아가자 요청하였다。
처음에,명제明帝가 붕崩함에,도간侃은 고명顧命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아,매우 한스러워했으며,온교嶠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강장疆場(변방)에 있는 외진 장수인데,감히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온교嶠가 굳게 청하니,이로 인해 맹주盟主로 추대되었다。
도간侃은 이에 독호督護 공등龔登을 보내 무리를 인솔하여 온교嶠에게 나아가게 하였으며,그러고선 또 쫓아가 돌아오게 하였다。
온교嶠 소준峻이 그의 아들(도첨)을 살해하였으니,거듭 편지를 보내 그를 격노激怒하게 하였다。
도간侃의 처妻 공씨龔氏 역시 스스로 나아가길 굳게 권하였다。
이에 곧 갑옷을 입고 배에 올라,밤에도(星言/별이 있을 때에도) 빠르게 나아갔으며,도첨瞻의 상에도 가지 않았다。
5월,온교溫嶠、유량庾亮 등과 석두石頭에서 모였다。
제군들은 즉시 결전하기를 원했으나,도간侃은 적들의 기세가 성하니,다툴 수 없고,마땅히 세월을 보내면서 지혜와 계책으로 사로잡아야 한다 하였다。
여러 번 싸웠는데 공功이 없자,제장들은 사포查浦에 누壘를 쌓기를 청했다。
감군부장監軍部將 이근李根이 건의하여,백석루白石壘를 세우자 청하였다。
도간侃은 (이근의 말을) 따르지 않으며,말하였다:
「만약 누壘가 완성되지 않으면,경卿이 마땅히 연좌될 것이오。」
이근根이 말하였다:
「사포查浦의 땅은 낮고,물이 남쪽으로 흐르는데,오직 백석白石만이 땅이 높고 험준하며,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으니,적들이 와서 공격하기는 쉽지 않고,이는 적을 멸할 술수입니다。」
도간侃이 웃으며 말하였다:
「경卿은 훌륭한 장수요。」
이에 이근根의 모략을 따라,밤에 만들기 시작해 새벽에 완성하였다。
적들은 누壘를 보고 크게 놀랐다。
적들이 대업루大業壘를 공격해,도간侃이 장차 구원하려 했는데,장사長史 은선殷羨이 말하였다:
「만약에 병사를 보내 대업大業을 구원한다면,보병들은 소준峻처럼 싸우지 못하니,곧 대사大事는 떠날 것입니다。다만 의당 급하게 석두石頭를 공격한다면,소준峻은 반드시 (석두를) 구할 것이고,그리하여 대업大業의 포위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입니다。」
도간侃 역시 은선羨의 말을 따랐다。
소준峻은 과연 대업大業을 버리고 석두石頭를 구원하였다。
제군들과 소준峻과 진릉陳陵의 동쪽에서 싸웠는데,도간侃의 독호督護인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양李陽의 부장部將 팽세彭世가 소준峻을 진陣에서 참수하니,적들의 무리는 크게 무너졌다。
소준峻의 동생 소일逸이 다시 무리를 취하였다。
도간侃과 제군들은 소일逸을 석두石頭에서 참수하였다。
初,庾亮少有高名,以明穆皇後之兄受顧命之重,蘇峻之禍,職亮是由。及石頭平,懼侃致討,亮用溫嶠謀,詣侃拜謝。侃遽止之,曰:「庾元規乃拜陶士行邪!」王導入石頭城,令取故節,侃笑曰:「蘇武節似不如是!」導有慚色,使人屏之。侃旋江陵,尋以為侍中、太尉,加羽葆鼓吹,改封長沙郡公,邑三千戶,賜絹八千匹,加都督交、廣、寧七州軍事。以江陵偏遠,移鎮巴陵。遣諮議參軍張誕討五溪夷,降之。
처음에,유량庾亮은 젊어서 높은 명성이 있었고,명목황후明穆皇後의 오라비라 고명顧命의 중임을 받았지만,소준蘇峻의 재앙은,오로지 유량亮으로부터 말미암았다。
석두石頭가 평정되자,(유량은) 도간侃에게 토벌당할까 두려웠는데,유량亮은 온교溫嶠의 모략을 써,도간侃에게 가 절하며 사과하였다。
도간侃은 (유량을) 멈추게 하며,말하였다:
「유원규庾元規가 어찌 도사행陶士行에게 절을 하십니까!」
왕도王導가 석두성石頭城에 들어가,옛 절節(부절)을 찾으라 명했는데,도간侃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소무蘇武의 절節(부절/절개)는 이와 같지 않아 보입니다!」
왕도導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띄면서,수하들에게 감추라 하였다。
도간侃은 강릉江陵으로 돌아갔는데,이윽고 시중侍中、태위太尉가 되었고,우보고취羽葆鼓吹(군악특권)을 더해졌으며,고쳐서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지고,식읍이 3천호가 되었으며,또 명주絹 8천필을 하사받았으며,도독교광녕칠주군사都督交、廣、寧七州軍事를 더해주었다。
강릉江陵이 멀리 치우쳐져 있기에,옮겨서 파릉巴陵에 진수하였다。
자의참군諮議參軍 장탄張誕을 보내 오계五溪의 이족들을 토벌하게 해,항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