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서 본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부친 아자개는 농사를 지며 생활하다가 뒤에 출세하여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 훤이 어려 강보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점심을 대접하면서 아이를 숲 속에 두었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이 말을 들은 그 고장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쪽 해변으로 가서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잘 때에도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 보다 앞장 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비장이 되었다. 당 나라 소종 경복 원년은 바로 신라 진성왕 6년인데, 총신들이 임금 가까이 있으면서 정권을 농락하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 기근이 곁들어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현을 다니며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달포 동안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그는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드러내 놓고 왕이라고는 일컫지 못하고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2천호”라고 하였다. 이 때 북원의 도적인 양길이 강성하자 궁예는 자진하여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을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내 백성들이 견훤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하여 보건대, 마한이 먼저 일어 났고, 뒤에 혁거세가 일어 났으며, 진한과 변한이 뒤따라 일어 났다. 이 때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지났는데, 총장 연간에 당 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도 땅을 휩쓸고 와서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백제를 격멸하였으니, 이제 내가 어찌 서울을 완산에 정하여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그는 곧 후백제왕이라 자칭하였으며, 관제를 설정하고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 3년이오,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동시에 견훤에게 검교 태보의 벼슬을 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천복 원년에 견훤이 대야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 4년에 금성이 궁예에게 귀순한 것을 분하게 여겨 견훤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포위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 2년에 견훤이 덕진포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 4년 무인에 철원경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케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 각을 보내 축하를 표하고, 이어 공작선과 지리산의 대화살을 바쳤다. 또한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견훤에게 중대부 벼슬을 첨가하여 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6년에 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군사를 진례성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을 보내 태조에게 원조를 청하였으므로 태조가 군사를 출동시켰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상극이었다.


동광 2년 가을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을 보내 대야, 문소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면서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실패하고 돌아갔다. 8월에 견훤이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얼룩말을 바쳤다.


3년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으므로 태조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견훤의 군사가 매우 강성하여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임시로 평화를 유지하는 술책으로써 견훤의 군사를 피곤케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당제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견훤도 그의 사위 진호를 보내 인질을 교환하였다. 12월에 견훤이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라 일컬으니, 당나라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이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는 곧 왕신을 옥에 가두고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전년에 주었던 얼룩말을 돌려 보내기를 요청하였다.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 주었다.


천성 2년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그는 이어서 신라의 고울부를 습격하였으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태조가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지만, 견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에 들어가니, 이 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다가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관원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혔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자기 앞에서 죽였다. 그는 곧 내궁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친족 동생인 김부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고, 또한 국고에 있는 재물과 귀중한 보배와 군기, 자녀와 백공 가운데 솜씨있는 자를 빼앗아 자신이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 밑에서 견훤을 기다리다가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락과 숭겸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견훤은 승세를 몰아 대목군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절 사고, 마돌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견훤이 장군 최견으로 하여금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거쳐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 나라 등주에 도착하여 모두 학살되었다.



이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하기 시작한 시대를 다시 회복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우리 태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서로 도울 것을 상의하고 있었다. 견 훤은 내심으로 나라를 빼앗을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태조가 먼저 이에 성공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서 횡포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는 12월 모일에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전번에 (신라의) 국상 김응렴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 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고, 참새가 새매의 날개를 헤치려고 하는 행위로서 이는 반드시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먼저 조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씨의 도끼를 휘둘렀으며, 모든 관리들에게 태양을 두고 맹세하고, 6부에 올바른 취지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변을 당해 죽었으므로,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위태한 나라를 재건하였으니, 임금을 잃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그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헛되이 떠도는 말을 들어 온갖 술책으로 기회를 노리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 나의 말머리마저 보지 못하였고 내 소의 터럭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진 밑에서 손이 묶였으며, 이 달에는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드러내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추격하여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약이 이와 같으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다락에 활을 걸고 패강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상서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거기에는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 동안 좋게 지내면서 서로 이웃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요사이 두 명의 인질이 모두 죽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 관계를 끊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그대의 본도로 보내고, 또한 고려에도 보내니 각자가 마땅히 서로 친하게 지내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왕실을 높이는 의리를 두터이 하고, 대국을 극진히 섬기고 있다. 따라서 이 조칙을 보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싸움을 그치려 하다가도 다시 시작하고, 어려운 지경에서도 오히려 싸우려 한다. 내가 이를 염려하여 이제 조서를 복사하여 부치노니 주의 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토끼와 날센 개가 싸우다가 서로 피곤해지면 결국 모두 남에게 잡히는 조롱을 받을 것이오, 황새와 조개가 서로 물고 있다가 또한 모두 남에게 잡히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지난 날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후회할 일을 스스로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3년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 반 상서가 전해준 한 장의 조서를 받들고, 동시에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대사가 제서를 보내주니, 편지의 좋은 소식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다. 그대의 좋은 편지를 받게되어 비록 감격하기는 하였으나, 편지 글을 펴보니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는 사절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다른 사람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 가운데 반란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요행히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선린 정책으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 이후로 과연 수천리 영역의 백성들이 농업에 힘을 쓰고, 7~8년 동안 군사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유년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 나를 업신여겨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막듯이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모기새끼가 산을 진 것처럼 어려움을 알고 용퇴하였다. 그리고 공손히 사죄하였으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부터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만일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명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전쟁을 끝내는 무력을 인정하고,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인을 약속하여 마침내 겹겹으로 에워쌓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의 교환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남방 사람들에게도 나의 덕이 크게 베풀어졌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독충 같은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행패가 전국을 몰아쳐서, 금성이 위험에 빠지고 왕궁에 혼란이 일어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정의에 입각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일에 제환, 진문의 패업과 같은 자가 누구이겠는가? 기회를 엿보아 한 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망, 동탁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존의 왕으로 하여금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자 상하가 모두 근심에 잠겼으니,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야심이 없고 존왕의 정신이 간절하다 하여, 나를 조정에 두어 국가의 위급한 처지를 구하도록 하였다. 그대는 털끝 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륙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잡아 수레에 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짐으로 실어 갔다. 그대는 걸, 주보다 더 포악하며, 맹수 보다 더욱 잔인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의 원수를 물리칠 마음에 충만되어 있다. 역적의 처단에 진력하여 미미한 충성을 표하기로 하고, 다시 무기를 든 후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뢰와 같이 내닫고 번개와 같이 빨랐으며, 수전에서는 호랑이나 용처럼 뛰어 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반드시 헛된 적이 없었다. 윤빈을 해안에서 쫓을 때 그가 버리고 간 갑옷이 산 같이 쌓였고, 추 조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 부근에서는 길 환을 군문에서 베었고, 마리성 부근에서는 수 오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을 함락시키던 날, 형 적 등 수백 명의 몸이 사라졌고, 청천을 쳐부수던 때는 직심 등 너댓 명이 머리를 바쳤었다. 동수의 군사는 깃발만 보고도 도망하였고, 경산의 군사는 구슬을 물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강주 고을은 남쪽으로부터 항복해왔고, 나주 고을은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공격하는 솜씨가 이러하니 국토를 회복할 날이 어찌 멀겠는가?


저수의 병영에서 장이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 가에서 한왕이 최후의 일전에 성공한 것과 같은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제 전란을 평정하여 전국을 안정시키려 하니,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 그런즉 천 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화가 넘쳐 외방에 이르고, 인자함은 지극하여 어린 백성을 사랑하니,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전란을 끝내라고 타일렀으니, 이미 이 가르침을 받은 이상 어찌 존중하지 않으랴? 만일 그대가 공손히 이 지시를 받들어 싸움을 그친다면, 이는 대국의 어진 은덕에 보답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왕통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여름 5월, 견훤이 비밀리에 군사를 보내 강주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 장군 왕충으로 하여금 이를 공격하게 하니 관흔은 물러가 대야성을 수비하였다. 겨울 11월, 견 훤이 강병을 선발하여 부곡성을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지, 명식 등이 항복하였다. 4년 가을 7월, 견 훤이 갑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술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


고 말하였다. 견훤이 대병을 동원하여 고창군의 증산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견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 봉이 이를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견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로 이주시켰다. 태조가 예전의 공로를 참작하여 원 봉을 용서하고, 순주의 이름을 하지현으로 고쳤다.


장흥 3년, 용감하고 지략이 있는 견훤의 부하 공직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견훤은 공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 9월, 견 훤이 일길찬 상귀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에 들어와 3일 간 머물면서 염주, 백주, 정주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에 있는 목마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 원년 정월, 견훤이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갑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왔다. 그가 미처 포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장군 검 필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훤의 부하인 술사 종훈과 의원 훈겸, 용감한 장수 상달, 최 필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견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견 훤은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 때 양검은 강주 도독, 용검은 무주 도독이 되었으며, 다만 신검만이 견 훤의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사람을 시켜 강주와 무주에 가서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 3월에 파진찬 신덕, 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고하여 견 훤을 금산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 나라) 여의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가 임금이 되었고, (당 나라) 건성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 명은 바뀌는 법이 없고, 왕위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대왕의 신통한 무위는 출중하였고, 영명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태어나서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였으며, 도탄의 괴로움을 깨끗이 씻어주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다. 그가 바람과 우뢰처럼 떠다니니, 다니는 곳마다 원근에서 그에게 달려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왕업의 중흥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지혜가 한 번 잘못되어,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세를 농락하였다.


그들은 임금을 진나라의 혜공처럼 우매하게 하였으며, 어진 아버지를 헌공처럼 미혹한 길로 빠지게 하여, 철모르는 아이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다행히 하늘이 내린 충정으로 군자(견훤)께서 허물을 바로 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따라서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연못의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다. 맏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특별한 은혜를 마땅히 백성들에게도 베풀어 혁신된 정치를 해야할 것이므로, 국내의 죄수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 10월 17일 동트기 전을 기준으로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혹은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하여 면제한다. 주관자가 이를 시행하라.”


견훤은 금산에서 석 달 동안 있었다. 6월에 이르러 그는 막내아들 능예, 딸 쇠복, 첩 고비 등과 함게 금성으로 도망하여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나 주기를 요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검 필, 만세 등을 파견하여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 훤이 오자 태조는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 훤의 나이가 태조보다 10년 위라 하여 그를 높여 상보라고 불렀으며, 남궁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 보다 상위에 있었다. 또한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동시에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 명씩과 궁중의 말 10필을 주었다.


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가 남모르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사업이 거의 성취되려다가 하루 아침에 집안 사람의 재화를 입어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대저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일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인후하고 근검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그는 반드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동시에 왕공에게 성의를 보여 장래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바로 나의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천복 원년 2월에 영규가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며 말했다.


“만일 정의의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만일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치게 된다면, 길이 막히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장군을 뵈온 뒤에 마루에 올라가 부인에게 절하고, 장군을 형으로 섬기고 부인을 누님으로 높여, 필히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모두 천지신명이 들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신병을 빌려 주어 난신 적자를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천안부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가을 9월에 태조가 직접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도착하여 군사를 합치고 일선에 진주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진을 쳤다.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열병하고, 대상 견권․술희․금산과 장군 용길․기언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을 삼고, 대상 김철․홍유․수향과 장군 왕순․준량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을 삼고, 대광 순식과 대상 긍준․왕겸․왕예․검필과 장군 정순․종희 등에게 정예 기병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철리 등 여러 도의 정예 기병 9천5백 명을 주어 중군을 삼고, 대장군 공훤과 장군 왕함윤에게 군사 1만 5천 명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덕술․명길 등이 고려 군사의 기세가 웅장하며 잘 정비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린 채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의 장수가 있는 곳을 물었다.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


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 훤으로 하여금 곧바로 중군을 공격케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사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그의 두 아우와 장군 부달․소달․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 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음모를 꾸며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이럴 수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마침내 그를 주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은, 왕위의 찬탈이 타인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한 나라를 바치고 자기의 죄과를 사죄했다 하여 특별히 사형을 면하였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처형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근심과 고뇌로 말미암아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의 불사에서 생애를 마쳤다.


태조의 군령이 엄격하고 공정하였으므로, 군졸들이 조금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수와 병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살펴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에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로서 한 사람도 자기 임금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장군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또한 나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태조는 곧 그에게 좌승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을 주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 나라 경복 원년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 원년까지 활동하였으니, 도합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는 운세가 기울고 도가 사라졌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도적들이 무수하게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되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극렬한 자는 궁예와 견 훤 두 사람 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신라의 전복을 기도하였으며, 심지어 선조의 초상화까지 참수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였다. 견 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불칙한 마음을 품었으며, 나라의 위기를 다행으로 여겨 도성과 고을을 침략하였다. 그는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였으니 천하의 원흉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자기 부하로부터 버림을 당하였고, 견 훤은 제 자식으로부터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자업자득이었으니, 누구를 다시 원망하겠는가? 항 우와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한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고, 이 밀과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당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거늘, 황차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한이 어찌 우리 태조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랴? 그들은 다만 태조에게 백성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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