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彌,東萊人也。家世二千石。祖頎,魏玄莬太守,武帝時,至汝南太守。彌有才幹,博渉書記。少游侠京都,隱者董仲道見而謂之曰:「君豺聲豹視,好亂樂禍,若天下騷擾,不作士大夫矣。」


 

王弥は東萊郡の人である。家は代々二千石の上級官吏を務めた。祖父の王頎は魏の玄菟太守で,武帝の時に汝南太守となった。王弥は才能があり,さまざまな書物を広く読んでいた。若くして洛陽にて侠客となり(1),隠者の董仲道が王弥に会って言った。「君は山犬のような〔凶暴な〕声で豹のような〔凶悪な〕目つきをして,乱を好み禍を楽しんでいる。もし天下が騒乱したら,士大夫にはならないだろう。」

 

왕미王弥는 동래군東萊郡 사람이다. 집은 대대로 2천석二千石의 상급관리를 지냈다. 조부 왕기王頎는 위의 현토태수玄菟太守로, 무제武帝 때는 여남태수汝南太守가 되었다. 왕미는 재능이 있고, 여러가지 책을 널리 읽었다. 젊었을 때 낙양에서 협객이 되었는데(1), 은자 동중도董仲道가 왕미를 만나 말했다.「군은 승냥이山犬와 같고〔흉폭하고〕목소리는 표범豹 같이〔흉악해〕눈매를 하니, 난을 좋아하고 화를 즐거워한다. 혹시 천하가 소란해진다면 사대부가 되진 않을 것이다.」


 

(1)「劉元海伝」によると、王弥は劉淵の帰郷に際して送別の宴を行った。

 

(1)「유원해전劉元海伝」에 의하면, 왕미는 유연이 귀향할 때 송별연을 베풀었다.



 

惠帝末,妖賊劉柏根起於東萊之㡉縣,彌率家僮從之,柏根以爲長史。柏根死,聚徒海渚,爲苟純所敗,亡入長廣山爲群賊。彌多權略,凡有所掠,必豫圖成敗,舉無遺策,弓馬迅捷,膂力過人,青土號爲「飛豹」。後引兵入寇青徐,兗州刺史苟晞逆撃,大破之。彌退集亡散,衆復大振,晞與之連戰,不能克。彌進兵寇泰山,魯國,譙,梁,陳,汝南,潁川,襄城諸郡,入許昌,開府庫,取器杖,所在陷沒,多殺守令,有衆數萬,朝廷不能制。


 

恵帝時代の末,宗教を利用して大衆を扇動する反乱者の〔㡉令〕劉柏根が東萊郡の㡉県で反乱を起こすと,王弥は自分の使用人を率いて反乱に加わり,劉柏根は〔王弥を〕長史とした(2)。劉柏根が〔晋軍に敗れて〕死ぬと,〔王弥は〕海浜に仲間を集めたが,苟純に敗れてしまい,〔王弥は〕故郷を離れて長広山に逃げ込んで賊徒〔の一員〕となった。王弥は臨機応変の策略に優れていて,掠奪する場合は,成功と失敗の両方を予測して,失敗する作戦は行わず,弓術や馬術は非常に敏捷であり,膂力は人並み以上だったので,青州では「飛豹」と呼んだ。後に〔王弥は〕兵を引き連れ,青州と徐州に侵攻して掠奪を行ったが,兗州刺史の苟晞が迎え撃ち,王弥の軍を大いに破った。王弥は退却して逃亡兵らを集めると,軍勢は再び強大となり,苟晞は何度も戦ったが,打ち破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王弥は兵を進めて泰山,魯国,譙,梁,陳,汝南,潁川,襄城の諸郡を攻略し,許昌に入ると,国家の倉庫を開け,武器を奪い,陥落させた地域の太守や県令の多くを殺害し,数万の兵士を擁していたので,朝廷は〔王弥を〕制圧できなかった。


 

혜제恵帝시대 말, 종교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한 반란자〔현령㡉令〕유백근劉柏根이 동래군 현현㡉県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미는 자신의 하인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해, 유백근은〔왕미를〕장사로 삼았다(2). 유백근이〔진군에게 패해〕죽자,〔왕미는〕바닷가에서 동지를 모았으나, 구순苟純에게 패하고,〔왕미는〕고향을 떠나 장광산長広山으로 도망쳐서 적도賊徒〔의 일원〕가 되었다. 왕미는 임기응변의 책략에 뛰어나고, 약탈할 때도 성공과 실패 양쪽을 예측하여 실패할 작전은 행하지 않고, 궁술弓術이나 마술馬術이 비상하게 민첩하고, 육체적 힘이 남들 이상이었기에, 청주에서는「비표飛豹」라 불렀다. 후에〔왕미는〕병사를 끌어모아, 청주와 서주에 침공해 약탈했으나, 연주자사兗州刺史 구희苟晞가 영격해, 왕미군을 크게 쳐부쉈다. 왕미는 퇴각해 도망병 등을 모으자, 군세는 다시 강대해져, 구희는 몇 번이고 싸웠으나, 쳐부수지 못했다. 왕미는 군을 진격시켜 태산泰山, 노국魯国,초譙,양梁,진陳,여남汝南,영천潁川,양성襄城의 여러 군을 공략해. 허창許昌에 들어가자 국가의 창고를 열어.무기를 탈취하고, 함락시킨 지역의 태수나 현령을 다수 살해하여, 수만의 병사를 거느렸기에, 조정은〔왕미를〕제압할 수 없었다.


 

(2)「恵帝紀」によると、光煕元年(306)三月、東萊郡㡉県令の劉柏根が反乱を起こし、㡉公を自称し、臨淄を襲うと、高密王司馬簡は聊城に逃走した。王浚は部将を遣わして劉柏根を討伐し、劉柏根を斬った。


 

(2)「혜제기恵帝紀」에 의하면 광희光煕 원년(306)3월、동래군 현 현령인 유백근이 반란을 일으켜 현공㡉公을 자칭하고 임치臨淄를 습격해 고밀왕高密王 사마간司馬簡은 요성聊城으로 도주했다. 왕준王浚은 부장을 보내 유백근을 토벌하고, 유백근을 참했다.



 

會天下大亂,進逼洛陽,京邑大震,宮城門晝閉。司徒王衍等率百官距守,彌屯七里澗,王師進撃,大破之。彌謂其黨劉靈曰:「晉兵尚強,歸無所厝。劉元海昔爲質子,我與之周旋京師,深有分契,今稱漢王,將歸之,可乎?」靈然之。乃渡河歸元海。元海聞而大悦,遣其侍中兼御史大夫郊迎,致書於彌曰:「以將軍有不世之功,超時之徳,故有此迎耳。遲望將軍之至,孤今親行將軍之館,輒拂席洗爵,敬待將軍。」及彌見元海,勸稱尊號,元海謂彌曰:「孤本謂將軍如竇周公耳,今真吾孔明,仲華也。烈祖有云:『吾之有將軍,如魚之有水。』」於是署彌司隸校尉,加侍中,特進,彌固辭。使隨劉曜寇河内,又與石勒攻臨漳。


 

そのころ天下は大いに乱れていた。〔王弥が〕進撃して洛陽に迫ると,洛陽は大いに動揺して,宮城の門は昼間も閉じられた。司徒の王衍らは百官を統率して防戦した。王弥が七里澗に駐屯すると,晋軍は進撃して,王弥の軍を大いに破った。王弥は仲間の劉霊に話した。「晋軍はまだ強い,帰順するにしても適当な場所が無い。劉元海(劉淵)が昔〔晋の〕人質であった時に,我は彼と一緒に洛陽を巡りまわって,意気投合したことがあるが,〔劉元海は〕今は漢王を名乗っているので,これに帰順したいが,よいだろうか?」劉霊は同意した。黄河を渡って劉元海に帰順した。劉元海はそれを聞いて大いに悦び,〔劉元海が任じた〕侍中兼御史大夫を派遣して近郊で出迎えさせ,次のような書信を渡した。「将軍には不世出の功績,希代の仁徳がおありなので,このように出迎えました。以前から将軍がいらっしゃるのを待ち望んでいたので,わたくしは今から将軍のおられる館までみずから参り,すぐに〔歓迎の準備のため将軍の席の〕埃を払い盃を洗って,謹んで将軍をお待ち致します。」王弥は劉元海と会見すると,皇帝を名乗ることを勧めたが,劉元海は王弥に対して言った。「孤は以前に将軍が竇周公(3)のようだと言っていたが,今はまことにわが孔明(諸葛亮),仲華(4)となった。烈祖(5)の言葉に『わたしのもとに将軍がいることは,魚が水を必要とするようなものだ(6)。』とおっしゃったものだ。」このとき王弥は司隷校尉に任命され,侍中と特進も加えられたが,王弥は固辞した。〔劉元海は王弥に〕劉曜に随って河内を攻略させ,また石勒とともに臨漳を攻撃させた。

 

그 당시 천하는 크게 소란했다.〔왕미가〕진격하여 낙양洛陽에 이르자, 낙양은 크게 동요하여, 궁성의 문은 주간에도 닫혔다. 사도司徒 왕연王衍 등이 백관을 통솔해 방전했다. 왕미가 칠리간七里澗에 주둔하자, 진군은 진격하여 왕미의 군을 크게 파했다. 왕미는 동료 유령劉霊에게 말했다.「진군은 아직 강하고, 귀순하려고 해도 적당한 장소가 없다. 유원해(유연)가 옛날〔진의〕인질로 왔을 때,나는 그와 함께 낙양을 돌아다니며, 의기투합한 적이 있는데,〔유원해는〕지금은 한왕漢王을 칭하고 있으니, 여기에 귀순하고자 하는데 괜찮은가?」 유령은 동의했다. 황하黄河를 건너 유원해에게 귀순했다. 유원해는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유원해가 임명한〕시중侍中 겸 어사대부御史大夫를 파견하여 근교에서 마중나가, 다음과 같이 서신을 보냈다.「장군에겐 불세출의 공적, 희대의 인덕이 있으니, 이렇게 마중나왔습니다. 이전부터 장군이 오시길 기다려왔기에, 나는 지금부터 장군이 계시는 관까지 직접 참배하고, 바로〔환영 준비를 위해 장군 자리의〕먼지를 털고 잔을 씻으며, 삼가 장군을 기다리겠습니다.」왕미는 유원해와 회견하자, 황제를 칭하기를 권했으나, 유원해는 왕미에게 말했다.「고는 이전에 장군이 두주공竇周公(3) 같다고 말했으나, 지금은 그야말로 나의 공명孔明(제갈량),중화仲華(4)가 되었소. 열조烈祖(5)의 말에『내 밑에 장군이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소(6)。』라고 한 것이오.」이 때, 왕미는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어, 시중과 특진特進도 더해졌으나, 왕미는 고사했다.〔유원해는 왕미에게〕유요劉曜를 따라 하내河内를 공략시키고, 또 석륵과 함께 임장臨漳을 공격시켰다.


 

(3)竇融のこと。周公は字。竇融ははじめは新の王莽に仕えたが、後に後漢の光武帝の配下となり、官位は大司空にまで至った。

 

(4)[登]禹のこと。仲華は字。後漢の光武帝の挙兵に従い、官位は大司徒にまで至った。

 

(5)蜀漢の昭烈帝劉備のこと。「劉元海伝」によると、劉淵は漢の後を継ぐということで国号を漢と名乗り、三祖五宗を立てた。その三祖の一つが烈祖で、昭烈帝劉備のことと考えられる。

 

(6)『三国志』蜀書第五「諸葛亮伝」に見える「水魚の交わり」の故事のこと。

 

(3)두융竇融이다. 주공周公은 자. 두융은 처음에는 신新의 왕망王莽을 섬겼으나, 후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배하가 되어, 관위는 대사공大司空까지 이르렀다.

 

(4)[등登]우禹이다. 중화仲華는 자. 후한 광무제의 거병을 따라 관위는 대사도大司徒까지 이르렀다.

 

(5)촉한의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를 말한다.「유원해전」에 의하면, 유연은 한의 뒤를 잇는다는 것으로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3조5종三祖五宗을 세웠다. 그 3조 중 하나가 열조烈祖로, 소열제 유비로 보고 있다.

 

(6)『삼국지三国志』촉서蜀書 제5「제갈량전諸葛亮伝」에 보이는「수어지교」의 고사를 뜻한다.



 

永嘉初,寇上黨,圍壺關,東海王越遣淮南内史王曠,安豐太守衛乾等討之,及彌戰於高都,長平間,大敗之,死者十六七。元海進彌征東大將軍,封東萊公。與劉曜,石勒等攻魏郡,汲郡,頓丘,陷五十餘壁,皆調爲軍士。又與勒攻鄴,安北將軍和郁棄城而走。懷帝遣北中郎將裴憲次白馬討彌,車騎將軍王堪次東燕討勒,平北將軍曹武次大陽討元海。武部將軍彭默爲劉聰所敗,見害,衆軍皆退。聰渡黄河,帝遣司隸校尉劉暾,將軍宋抽等距之,皆不能抗。彌,聰以萬騎至京城,焚二學。東海王越距戰於西明門,彌等敗走。彌復以二千騎寇襄城諸縣,河東,平陽,弘農,上黨諸流人之在潁川,襄城,汝南,南陽,河南者數萬家,爲舊居人所不禮,皆焚燒城邑,殺二千石長吏以應彌。彌又以二萬人會石勒寇陳郡,潁川,屯陽翟,遣弟璋與石勒共寇徐兗,因破越軍。


 

永嘉のはじめ,〔劉元海の軍は〕上党を攻略し,壺関を包囲した。東海王司馬越は淮南内史王曠,安豊太守衛乾らを〔劉元海の軍の〕討伐に派遣した。王弥は高都と長平の間で〔晋軍と〕戦うと,晋軍を大敗させた。晋軍の死者は十人のうち六,七人にのぼるほどであった。劉元海は王弥を征東大将軍に進め,東萊公に封じた。〔王弥は〕劉曜,石勒らと共に魏郡,汲郡,頓丘の五十余城を攻撃して陥落させると,その全てから兵士を徴発した。また石勒と共に鄴を攻撃すると,安北将軍和郁は城を棄て逃走した。懐帝は王弥の討伐に北中朗将裴憲を派遣し白馬に駐屯させ,石勒の討伐に車騎将軍王堪を派遣し東燕に駐屯させ,劉元海の討伐に平北将軍曹武を派遣し大陽に駐屯させた。武部将軍彭黙が劉聡に敗北して殺害されると,〔晋の〕大軍は全て後退した。劉聡が黄河を渡ると,懐帝は司隷校尉劉暾,将軍宋抽らに防衛させたが,みな抵抗出来なかった。王弥,劉聡は一万騎で洛陽まで来ると,〔太学と小学の〕二学を焼き払った。東海王司馬越は西明門で反撃し,王弥らは敗走した(7)。王弥はまた二千騎で襄城の諸県を攻略した。河東,平陽,弘農,上党の諸郡から流浪してきて潁川,襄城,汝南,南陽,河南の諸郡に在住した数万家は,以前から住む人たちから非礼な扱いを受けていたので,〔彼らは〕みな城郭に火をつけ〔晋朝に反乱を起し〕て,太守や長史などの二千石の上級官吏を殺して王弥に呼応した。王弥はまた二万人で石勒と合流して陳郡,潁川を攻略し,陽翟に駐屯した。〔王弥は〕弟の王璋を派遣し石勒と共同して徐州と兗州を攻略させて,東海王司馬越の軍を潰滅させた。


 

영가永嘉가 시작되자,〔유원해의 군은〕상당上党을 공략하고 호관壺関을 포위했다.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은 회남내사淮南内史 왕광王曠,안풍태수安豊太守 위건衛乾 등을〔유원해 군의〕토벌에 파견했다. 왕미는 고도高都와 장평長平 사이에서〔진군과〕싸워, 진군을 대패시켰다. 진군의 사망자는 10명 중 6-7명에 이르렀다. 유원해는 왕미를 정동대장군征東大将軍으로 올리고 동래공東萊公에 봉했다.〔왕미는〕유요,석륵 등과 함께 위군魏郡,겹군汲郡,돈구頓丘의 50여성을 공격해 함락하고, 그 모든 곳에서 병사를 징발했다. 또 석륵과 함께 업을 공격하자, 안북장군,安北将軍 화욱和郁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회제懐帝는 왕미 토벌에 북중랑장北中朗将 배헌裴憲을 파견해 백마白馬에 주둔시키고, 석륵 토벌에 거기장군車騎将軍 왕감王堪을 파견하여 동연東燕에 주둔시키고, 유원해 토벌에 평북장군平北将軍 조무曹武를 파견해 대양大陽에 주둔시켰다. 무부장군武部将軍 팽묵彭黙이 유총劉聡에게 패하여 살해되자,〔진의〕대군은 모두 후퇴했다. 유총이 황하를 건너자, 회제는 사례교위 유돈劉暾, 장군将軍 송추宋抽 등에게 방위시켰으나, 모두 저항하지 못했다. 왕미,유총은 1만기로 낙양까지 오자,〔태학과 소학의〕이학二学을 불태웠다. 동해왕 사마월은 서명문西明門에서 반격하여, 왕미 등은 패주했다(7). 왕미는 또 2천 기로 양성襄城의 각 현을 공략했다. 하동河東,평양平陽,홍농弘農,상당上党의 각 군에서 유랑하여 영천潁川,양성襄城,여남汝南,남양南陽,하남河南의 각 군에 재주한 수만 가는, 원래 살던 사람들에게서 무례한 대접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은〕모두 성곽에 불을 지르고,〔진조에 반란을 일으켜〕태수나 장사 등 이천석의 관리를 죽여 왕미에게 호응했다. 왕미는 또 2만 명으로 석륵과 합류해 진군,영천을 공략해, 양적陽翟에 주둔했다.〔왕미는〕동생 왕장王璋을 파견해 석륵과 공동으로 서주와 연주를 공략하여 동해왕 사마월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7)「劉元海伝」によると、劉淵は劉聡、王弥らに五万騎を率いさせて洛陽の攻撃に向かわさせた。漢軍は再び敗退し平陽に帰還した。「孝懐帝紀」によると、永嘉四年(310)五月、幽、并、冀、秦、雍等六州で蝗が大発生した、草木から牛馬の毛まで食べ尽された。六月、劉淵が死に、子の劉和が漢の皇帝位を継いだが、劉和の弟の劉聡が劉和を殺して皇帝になった。


 

(7)「유원해전」에 의하면, 유연은 유총、왕미 등에게 오만기를 이끌게 하여 낙양 공격에 향하게 했다. 한군은 다시 패퇴하여 평양으로 귀환했다.「효회제기孝懐帝紀」에 의하면 영가 4년(310)5월、유幽,병并.기冀.진秦.옹雍 등 6주에 메뚜기가 크게 발생해, 초목부터 소나 말의 털까지 먹어치웠다. 6월, 유연이 죽고, 아들 유화劉和가 한의 황위를 이었으나, 유화의 동생 유총이 유화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彌後與曜寇襄城,遂逼京師。時京邑大饑,人相食,百姓流亡,公卿奔河陰。曜,彌等遂陷宮城,至太極前殿,縱兵大掠。幽帝於端門,逼辱羊皇后,殺皇太子詮,發掘陵墓,焚燒宮廟,城府蕩盡,百官及男女遇害者三萬餘人,遂遷帝於平陽。


 

王弥は後に劉曜とともに襄城を攻略し,ついに洛陽に迫った。この時の洛陽は大飢饉で,人は互いを食べあい,多くの人たちは洛陽を離れて流浪し,晋朝の高官たちは河陰に逃れた。劉曜,王弥らは遂に宮城を陥落させ,太極前殿に到達すると,兵はほしいままに大掠奪を行った。懐帝は宮城の南正門に幽閉され,羊皇后は〔劉曜に〕迫られて辱めを受け,皇太子の司馬詮(8)は殺された。陵墓は掘り返され,宮殿宗廟は焼き払われ,城内の役所は掠奪しつくされ,官僚や市井の男女で殺されたのは三万人あまりであった。そして懐帝は平陽に連れ去られた。

 

왕미는 후에 유요와 함께 양성을 공략하여. 결국 낙양에 도달했다. 이 때 낙양은 대기근으로, 사람이 서로를 먹고, 많은 사람들이 낙양을 떠나 유랑해, 진조의 고관들은 하음河陰으로 도망쳤다. 유요,왕미 등은 마침내 궁성을 함락시키고, 태극전전太極前殿에 도달하자, 병사들은 마음대로 크게 약탈했다. 회제는 궁성의 남정문南正門으로 유폐되고 양황후羊皇后는〔유요에게〕강요당해 욕을 당하고, 황태자皇太子 사마전司馬詮(8)은 살해되었다. 능묘陵墓는 파헤쳐지고, 궁전종묘宮殿宗廟는 불살라지고. 성내의 관청은 약탈당하여, 관료나 시정의 남녀로 죽임을 당한 자가 3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회제는 평양平陽으로 끌려갔다.


 

(8)「清河康王伝」では「詮」は「銓」となっている。

 

(8)「청하강왕전清河康王伝」에는「詮」は「銓」이라 되어 있다.



 

彌之掠也,曜禁之,彌不從。曜斬其牙門王延以徇,彌怒,與曜阻兵相攻,死者千餘人。彌長史張嵩諫曰:「明公與國家共興大事,事業甫耳,便相攻討,何面見主上乎!平洛之功誠在將軍,然劉曜皇族,宜小下之。晉二王平呉之鑒,其則不遠,願明將軍以爲慮。縱將軍阻兵不還,其若子弟宗族何!」彌曰:「善,微子,吾不聞此過也。」於是詣曜謝,結分如初。彌曰:「下官聞過,乃是張長史之功。」曜謂嵩曰:「君爲朱建矣,豈況范生乎!」各賜嵩金百斤。彌謂曜曰:「洛陽天下之中,山河四險之固,城池宮室無假營造,可徙平陽都之。」曜不從,焚燒而去。彌怒曰:「屠各子,豈有帝王之意乎!汝柰天下何!」遂引衆東屯項關。



 

 王弥は掠奪を行うと,劉曜は掠奪を禁止したが,王弥は従わなかった。劉曜は王弥の牙門王延を斬ってみせしめとすると,これに王弥は怒り,兵力をたのみにして劉曜と戦闘になり,〔双方で〕千余人の死者が出た。王弥の長史張嵩が諌めて言った。「明公は漢王(劉元海)と共に〔天下平定の〕大事を興しましたが,今はその事業が始まったばかりなのに,味方同志で攻撃をしあって,どうして主上に対面できるのでしょうか!洛陽を平定した功績は本当は将軍(王弥)にありますが,しかし劉曜は皇族ですので,下手に出て功績を小さい事にしたほうがよろしいでしょう。晋が呉を平定した際の二王(王渾と王濬)の一件は,遠い昔のことではありませんので,どうか明将軍(王弥)にはご熟慮されるようお願い申し上げます。もし将軍が兵力をたのみに帰還しなければ,将軍の子弟宗族はどうなるでしょうか!」王弥は言った。「よろしい,もしあなたがいなかったら,わたしはこの誤りに気付かなかっただろう。」そこで〔王弥は〕劉曜のもとへ赴いて謝罪し,仲直りをした。王弥は言った。「下官(王弥)が間違いに気付いたのは,張長史(張嵩)の功績です。」劉曜は張嵩に向かって言った。「君の行いは朱建(9)のよう〔に優れたもの〕だ。どうして范生(10)のよう〔に身勝手〕だなどといえようか!」各々が張嵩に金百斤を賜った。王弥は劉曜に自分の考えを言った「洛陽は天下の中心,山河で四方の守りは固く,城壁や濠,宮室を一時に造営せずともすみます。平陽から都を徙すのがいいでしょう。」劉曜はこれを聞き入れず,洛陽を焼き払い去った。王弥はこれに怒り言った。「屠各の子に帝王としての考えなどあろうか!きさまは天下をどうしようというのだ!」そこで〔王弥は〕兵を引き連れて東方の項関に駐屯した(11)。


 

왕미가 약탈을 행하자, 유요는 약탈을 금지시켰으나, 왕미는 따르지 않았다. 유요는 왕미의 아문 왕연을 참하여 보여주기로 삼자,이에 왕미가 노하여, 병력에 기대어 유요와 전투하여,〔쌍방이〕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왕미의 장사長史 장숭張嵩이 충고하여 말했다.「명공明公은 한왕(유원해)과 함께〔천하평정의〕대사를 일으켰으나, 지금은 그 사업이 시작된지 얼마 안 됐는데, 아군끼리 공격하니, 어떻게 주상을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낙양을 평정한 공적은 사실 장군(왕미)께 있으나, 하지만 유요는 황족皇族이므로, 섣불리 나서 공적을 적게 하는 게 좋겠지요. 진이 오를 평정했을 때 이왕(왕혼王渾과 왕준王濬)의 일건은, 먼 옛날 일이 아니므로, 부디 명장군(왕미)께서 숙려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장군이 병력에 기대어 귀환하지 않는다면, 장군의 자제종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왕미가 말했다.「좋소, 만약 그대가 없었다면,나는 이 잘못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오.」이에〔왕미는〕유요에게 나아가 사죄하여, 화해했다. 왕미가 말했다.「하관下官(왕미)이 잘못을 깨닫게 된 것은 장장사(장숭)의 공적입니다.」유요는 장숭을 향해 말했다.「군의 행동은 주건朱建(9)과 같다〔같이 뛰어나다〕. 범생范生(10)과 같다〔멋대로〕라고 말하겠는가!」각자가 장숭에게 금 100근을 내렸다. 왕미는 유요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낙양은 천하의 중심으로, 산하에서 사방의 수비가 견고하고, 성벽이나 참호, 궁실은 일시에 조영한 것이 아닙니다. 평양에서 수도를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유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낙양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왕미는 이에 노해 말했다.「도각屠各의 아들에게 제왕帝王으로서의 생각이 있겠는가!네놈은 천하를 어찌하려고 하는가!」이에〔왕미는〕병사를 이끌고 동쪽의 항관項関에 주둔했다(11).


 

(9)朱建は前漢の人。淮南王黥布に仕え、黥布が反乱を企てた時、反乱をやめるよう諫言したが、黥布は聞き入れずに反乱して処刑された。朱建は諫言を評価されて平原君の号を賜った。

 

(10)項羽の軍師・范増のことと思われる。范増は項羽を見限って立ち去った。

 

(11)「劉聡伝」によると、この後に劉聡は王弥を大将軍とし、斉公に封じた。

 

(9) 주건은 전한前漢 사람.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를 섬겨,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란을 그만두도록 간언했으나, 경포는 받아들이지 않고 반란하여 처형당했다. 주건은 간언을 평가받아 평원군平原君의 호를 받았다.

 

(10) 항우項羽의 군사軍師・범증范増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범증은 항우를 단념하고 떠났다.

 

(11)「유총전劉聡伝」에 의하면 그 후에 유총은 왕미를 대장군大将軍로 삼고 제공斉公에 봉했다.



 

初,曜以彌先入洛,不待己,怨之,至是嫌隙遂構。劉暾説彌還據青州,彌然之,乃以左長史曹嶷爲鎮東將軍,給兵五千,多齎寶物還郷里,招誘亡命,且迎其室。彌將徐邈,高梁輒率部曲數千人隨嶷去,彌益衰弱。


 

もともと劉曜は王弥が先に洛陽に入城して,自分を待たなかったことを怨んでいたが,この頃になると〔王弥と劉曜は互いに対しての〕疑いや不満が表面化した。劉暾は王弥に対して青州を拠点とするために帰還することを説き,王弥は同意した。そこで左長史曹嶷を鎮東将軍にして,五千の兵を与えて,多数の資産や宝物を持たせて郷里に帰還させ,戸籍を失ったならず者を誘い招き,そしてその一族を迎え入れた。王弥の部将の徐邈と高梁は〔曹嶷が出発すると〕すぐに,部下数千人を率いて,曹嶷の後を追って〔王弥のもとを〕去り,王弥の勢力は益々衰弱した。

 

원래부터 유요는 왕미가 먼저 낙양에 입성하여, 자신을 기다리지 않은 것을 원망했으나, 이 때가 되자〔왕미와 유요는 서로에 대한〕의심과 불만이 표면화했다. 유돈은 왕미에게 청주青州를 거점으로 하기 위해 귀환하도록 설득해, 왕미는 이에 동의했다. 이에 좌장사左長史 조억曹嶷을 진동장군鎮東将軍으로 하여, 5천의 병사를 주어, 다수의 자산이나 보물을 지니고 향리에 귀환시켜 호적을 잃은 자를 권하여, 그리고 그 일족을 영입했다. 왕미의 부장 서막徐邈과 고량高梁은〔조억이 출발하자〕곧장, 부하 수천명을 이끌고 조억의 뒤를 쫓아〔왕미의 밑을〕떠나, 왕미의 세력은 점점 쇠약해졌다.



 

初,石勒惡彌驍勇,常密爲之備。彌之破洛陽也,多遺勒美女寶貨以結之。時勒擒苟晞,以爲左司馬,彌謂勒曰:「公獲苟晞而用之,何其神妙!使晞爲公左,彌爲公右,天下不足定也!」勒愈忌彌,陰圖之。劉暾又勸彌徴曹嶷,藉其衆以誅勒。於是彌使暾詣青州,令曹嶷引兵會己,而詐耍勒共向青州。暾至東阿,爲勒游騎所獲。勒見彌與嶷書,大怒,乃殺暾。彌未之知,勒伏兵襲彌,殺之,并其衆。


 

以前より石勒は王弥が強く勇ましいことを嫌がり,常日頃密かに備えていた。王弥は洛陽を破ると,石勒〔を味方につけるため〕に多くの美女や財宝を贈り,石勒と手を結んだ。石勒が苟晞を生け捕りにして左司馬とした時,王弥は石勒を評して言った「公は苟晞を捕獲して用いるとは,何と神妙な事か!苟晞を公の左に,王弥を公の右にすれば,天下を平定して余りあるでしょう!」石勒は〔この言葉から〕王弥をいっそう嫌い,密かに〔王弥を〕罠にかけようとした。劉暾は王弥に曹嶷を召し出すように勧め,曹嶷配下の兵を使って,石勒を誅殺しようとした。そこで王弥は劉暾を使者として青州へ行かせ,曹嶷に兵を引き連れて自軍と合流させようとし,石勒に対しては詐りの誓約を行い自分と一緒に青州に向うようにした。劉暾が東阿に至ると,石勒の遊撃騎兵に捕獲された。石勒は王弥が曹嶷に与えた書状を見ると,〔内容に〕激怒して,劉暾を殺した。王弥がまだこのことを知らないうちに,石勒は兵を伏せて王弥を襲って殺し,その軍勢を併せた(12)。

 

이전부터 석륵石勒은 왕미가 강하고 용맹한 것을 꺼려, 평소 몰래 대비했다. 왕미는 낙양을 파하자, 석륵〔을 아군으로 삼기 위해〕에게 많은 미녀와 재보를 주고, 석륵과 손을 잡았다. 석륵이 구희를 생포하여 좌사마左司馬로 삼았을 때, 왕미는 석륵을 평하여 말한「공이 구희苟晞를 잡아 기용한 것이, 어찌 이리 신묘한 것인가!구희는 공의 왼쪽에, 왕미를 공의 오른쪽에 두면, 천하를 평정하고도 남을 것이오!」석륵은〔이 말에서〕왕미를 더욱 꺼려, 몰래〔왕미를〕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 유돈劉暾은 왕미에게 조억을 불러들일 것을 권하여, 조억 배하의 병사를 써서, 석륵을 주살하려 했다. 이에 왕미는 유돈을 사자로 하여 청주로 가서 조억에게 병사를 이끌고 자군과 합류하게 하여, 석륵에 대해서는 거짓 서약을 하여 자신과 함께 청주로 향하려 했다. 유돈이 동아東阿에 이르러, 석륵의 유격기병遊撃騎兵에게 포획되었다. 석륵은 왕미가 조억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내용에〕격노하여, 유돈을 죽였다. 왕미가 아직 이를 모르는 틈에, 석륵은 병사를 숨겨 왕미를 습격해 죽이고, 그 군세를 합쳤다(12)。

 

(12)「石勒伝上」によると、石勒は王弥を酒宴に誘い出して、自分の手で斬った。

 

(12)「석륵전상石勒伝上」에 의하면, 석륵은 왕미에게 주연을 권하여, 자신의 손으로 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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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걸린 주석은 정식 주석이 아니라 개인 주석 같지만, 사서의 내용도 일부 섞여 있고 내용의 이해를 위해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한자 오역은 http://jinshu.fc2web.com/ 에 문의해주시고, 일역 오역은 댓글로 제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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