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포石苞는 자를 중용仲容이라 하며 기주冀州 발해군渤海郡 남피현南皮県 사람이다. 학문이 있고 넓은 마음을 가졌으며 외모나 행동도 뛰어나 사소한 절조를 꾸미지도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석중용 같은 미남자는 없다.” 라고 말했다. 현은 (석포를) 초빙하여 역인으로 삼아 농사마農司馬로 삼았다. 마침 알자謁者인 양적현陽翟県 출신 곽현신郭玄信이 명령을 받고 파견되어, 어자御者를 요구하자 사마는 석포와 등애鄧艾를 꼽았다. 10리 남짓 갔을 때 곽현신은 두 사람에게

 

군들은 장래 분명 두 사람이 대신고관이 될 것이다.[1]”

 

라 말했다. 석포는

 

어자인 작은 관리입니다.[2] 어떻게 대신고관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얼마 안 가 사자를 사주司州 위군魏郡 업현鄴県에 보냈는데, 일이 잠시 미루어져 업현의 시장에서 철을 팔았다.[3] 시장의 장관이던 예주豫州 패국沛国의 조원유趙元儒는 사람의 현우를 감정하기로 유명했는데, 석포를 보고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하여 교류하게 되었다. (조원유는) 석포의 뛰어난 재능을 극찬했고, 반드시 삼공사보三公四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석포는) 이부랑吏部郎 허윤許允을 만나[4] 작은 현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청했다. 허윤은 석포에게 말했다.

 

너는 나와 대등한 사람이다. 반드시 조정에 불려질 것인데 어째서 작은 현을 원하는가?”

 

석포가 돌아가 탄식했다. 허윤이 이 정도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삼국지위서 28 등애전의 배송지 주에 다음과 같다."세어 에 다음과 같다. 등애는 젊어서 양성전농부민襄城典農部民이 되었지만, 석포와 같이 나이는 12,3살 즈음이었다. 알자의 양적현 출신인 곽현신은 무제(조조)의 감군, 곽탄郭誕, 자는 원혁元奕의 아들이다. 건안建安 연간에, 소부 길본이 허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곽현신은 연좌되어 처벌당하여 집에 있었다. 전농사마에 종사하여, 어자를 찾아 등애,석포를 어자로 출발하여 십리에 이르는 사이에, 이들을 기쁘게 생각해서, 둘 다 장차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평어람太平御覧442에서는 서광徐廣진기 을 인용하고 있다. "위나라의 알자 곽 현신은 사자를 내는데 굉농宏農에서 어자를 찾았다.“

 

[2] 송본에서는 ""이다.

 

[3] 북당서초北堂書鈔55에 따르면 왕은의 진서 석포전에 "철을 업의 시에서 샀다" 라 되어있다. 또한 같은 권 77에 따르면 왕은의 진서 석포는 현 관리가 되어 쇠를 업의 시에서 팔았다. " 라 쓰여있다.

삼국지위서 43소제기의 배송지 주에 다음과 같다. "세어 에는 다음과 같다. 그 옛날 청룡青龍 연간(233~236)에 석포는 장안에서 철 장사를 하다 사마선왕(사마의)을 만났다, 선왕(사마의)(그를) 알게 되었다."

곽반은 업의 시를 장안으로 하고 있지만, 아마도 잘못이다.

 

[4] 삼국지위서 9 하후상전의 배송지 주에 다음과 같다. "위략에 허윤은 지를 사종士宗이라 한다. 명제(조예) 때 상서선조랑尚書選曹郎에 임명되어 나와 군수로 전임해 시중 상서 중령군侍中尚書中領軍이 되었다. 역인役人이 허윤은 이전 주방厨房의 금전이나 곡물을 제멋대로 했다 하여 배우와 속관에게 주상하여 체포되어 정위로 보냈다. 조사가 끝나자 사형을 감하여 변경으로 유배되었다. 가평嘉平 6(254) 가을에 이동해 그 해 겨울에 사망했다."

 

 

얼마 후 경제景帝(사마사)의 중호군사마中護軍司馬로 전임했다.[5] 선제宣帝(사마의)는 석포가 용모는 좋지만 행실이 나쁘다고 들어 경제를 나무랐지만 경제는

 

석포는 행동은 불손하지만 국가를 경영하는 지혜와 계략을 갖고 있습니다. 원래 바르고 깨끗한 사람은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하여, 국가를 안정시키지 못합니다. 이는 제의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의 신분에 넘치는 사치를 잊고 난세 통일의 큰 계책을 받아들이고 한의 고조高祖가 진평陳平의 악행을 버리고 여섯 묘계를 취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석포는 관중이나 진평 두 사람에게 못 미친다 하여도 오늘은 채용해야 합니다

 

라고 답하여 해명했다. 업의 전농중랑장典農中郎将으로 전임했다. 당시엔 위 왕조의 시대로 왕후는 대부분 업에 있었고, 상서 정밀丁謐이 일시에 몸을 망쳤지만, (석포는) 당시의 이익을 모두 조사했다. 석포는 이 일을 모두 열거하여 상소하여 더욱 칭송되었다. 동래태수東萊太守낭야태수琅邪太守를 역임했고 임지에서는 모두 위광이 있고 은혜를 베풀었다.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전임했다.[6]

 

[5] 태평어람442에 서광의 진기을 인용해 "얼마 후 굉농사마宏農司馬로 전임했다." 라 했다.

 

[6] 삼국지위서 4 삼소제기의 배송지 주는 다음과 같다. 세어 " 후에 상서로 발탁되어 청주자사·진동장군을 역임했다." 라 했다.

수경水経 25 사수泗水의 역도원酈道元 주에 "하비대성下邳大城 안에 대사마 석포의 비석이 있다." 라 했다.

본전은 상서로 임명됐다고 하지 않았다. 수경주에서 이를 증거로 한다면, 청주는 서주의 잘못이다. 석포는 일찍이 서주 자사가 된 것으로, 비가 하비에 건립된 것이다.

 

문제文帝(사마소)가 동관東関에서 패했지만 석포만이 군사를 잃지 않고 퇴각했다. 문제는 갖고 있던 절을 가리키며 석포에게 말했다.

 

후회하는 것은 이()를 그대에게 주지 않고 큰일을 결정한 것이다.”

 

이에 석포를 전임시켜 분무장군奮武将軍가절仮節감청주제군사監青州諸軍事로 임명했다.

 

제갈탄諸葛誕이 회남에서 거병하자 석포는 청주青州의 제군을 이끌고 연주자사兗州刺史 주태州泰[7]와 서주자사 호질胡質[8]을 지휘하여 정예를 선발하여 외적에 대비했다. 오나라는 대장 주이朱異와 정봉丁奉을 파견하여 (석포를) 요격했다. 제갈탄 등은 병참을 도륙에 두고 경병으로 여수를 건넜다. 석포는 역격하여 크게 이를 격파했다. 태산태수泰山太守 호열胡烈은 기병奇兵궤도詭道를 이용하여 도륙都陸을 덮쳐 오의 병참을 모조리 불태웠다. 주이 등은 남은 병사를 모아 퇴각했다.

 

수춘을 평정하자, 석포는 진동장군鎮東将軍에 배명되어, 동광후가절東光侯仮節로 봉해졌다. 얼마 후 왕기王基를 대신하여 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가 되었다. 석포는 이에 입조하고 임지로 돌아가려 하여 고귀향공高貴郷公(조모)에게 인사를 올렸는데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했다. 임지로 출발할 때 문제에게

 

대단히 뛰어난 군주입니다

 

라고 했다. 며칠 후에 성제成済의 변고가 있었다.[9] 후에 정동대장군征東大将으로 올리고 곧 표기장군驃騎将軍으로 전임했다.

 

[7] 어떤 책에는 주태周泰라 되어있다.

 

[8] 삼국지위서 27 호질전에 "상산태수에서 형주자사로 전임했다" 라고 되어 있고, 서주 자사가 되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9] 삼국지위서 4 삼소제기의 배송지 주에 다음과 같다. 『세어"감로甘露 연간(256~259)에 입조했을 때 막 퇴궐하려 고귀향공에게 인사를 했지만 해가 질 때까지 남았다. 문왕(사마소)은 사람을 보내어 들르게 했다. 문왕(사마소)은 석포에게 질문했다. "왜 오래 있었는가?" 석포가 말했다. "대단히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출발해 형양滎陽에 도착해 며칠 있어 변이 일어났다." 라 했다.

 

 

 

문제가 승하한 뒤 가충,순의는 장례를 논의했지만 결정되지 않았었다. 석포는 이 때 장례에 달려가 통곡하며 말했다.

 

국가의 기초를 만든 분이시다. 신하로서 끝날 것인가!”

 

이로서 장례가 결정되었다. 그 뒤 항상 진건과 함께

 

햇수는 이미 떨어졌고, 이것은 천명입니다.”

 

라고 말하며 위 황제 조환에게 에둘러 권했다. 제위를 선양시키도록 권할만큼 석포는 영향력이 있었다. 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대사마大司馬로 전임시키고[10] 작위를 악릉군공楽陵郡公을 봉하고 시중을 더해 깃털 붙은 덮개가 달린 훌륭한 차를 타게 되었다.[11]

 

[10] 태평어람209 직관부칠대사마職官部七大司馬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진무제태시관명晋武帝太始官名 "대사마 석포의 도량이 크고 알기 쉬우며, 바른 마음을 가져 사람들에게 흘리는 것이 없었다." 라 했다. 진공경례질晋公卿礼秩"진은 석포를 대사마로 임명해 삼공 다음가도록 했다." 라 했다.

 

[11] 북당서초51 대사마6에서 왕은의 진서을 인용하고 있는데, "" 아래 "之楽"의 두 글자가 있다.

 

제갈탄을 멸망시킨 후부터 석포는 회남지역을 수비하고, 군대를 훈련시키거나 변경을 순례하는 등 석포는 모든 사무를 보고, 또한 엄한 형벌로 혜택을 주어 민중을 거느렸다. 회북 감군 왕침이 석포가 원래 낮은 신분 출신임을 가볍게 봤고 또 동요로

 

궁중의 큰 말은 거의 당나귀가 되었지만 커다란 돌은 이를 걱정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듣고 석포가 오나라 사람들과 밀통하고 있다고 은밀히 상서했다. 이전에 기를 점치는 사람이

 

동남의 방향에서 큰 병사가 일어날 기미가 있습니다.”

 

라고 했다. 왕침이 상서하자 무제는 몹시 그를 의심했다. 마침 형주자사 호열은 오나라 사람들이 크게 침범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상주했고, 석포 또한 군대가 침입하려는 것을 듣고 있었으므로 성채를 쌓고 물을 막는 등 스스로 방비를 굳혔다. 무제는 이를 듣고 양호羊祜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의 사람들이 침입할 때마다 동서에서 서로 제휴하고 있다. 관계가 없다면 치우쳐질 터다. 역시 석포가 등을 돌린 것인가?”

 

양호는 자세히 설명했지만 무제는 역시 의심했다. 마침 석포의 자식 석교石喬를 상서랑尚書郎으로 임명하고 무제는 그를 불렀지만 해가 가도록 오지 않았다. 무제는 분명 석포 부자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여겨 토벌하려 생각했지만, 이를 숨기고 있었다. 마침내 조칙을 내려 석포가 도적의 세력을 계산하지 않고 성채를 쌓고 물을 막아 많은 백성들을 지치게 했다며 사령을 내어 그의 관직을 파면했다.[12] 태위太尉 의양왕義陽王 사마망司馬望에게 대군을 이끌고 그를 추궁하게 하고 비상시에 대비하게 했다. 또 진동장군 낭야왕 사마주에게 조칙을 내려 하비에서 수춘으로 향하게 했다.[13] 석포는 연인 손삭의 계책을 이용해, 병사를 풀고 걸어서 아름다운 사아에서 죄상을 알리길 기다렸다. 무제는 이를 보고 기분이 풀렸다. 석포가 궁문에 도착하자 악릉군공으로 사저에 돌려보냈다. 석포는 수임하여 성과가 없었음을 부끄러워했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12] 노격労格 교감기校勘記 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기전 모두 석포가 면관된 시기를 기재하지 않았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삼십국춘추三十国春秋·진춘추晋春秋에 따라 태시 4(268)년의 것으로 했다" 고 한다.

 

[13] 『독사거정読史挙正 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태시 5(269)2, 사마주가 하비를 진압했을 때, 아직 낭야왕도 동완왕도 되지않았다. 노격 교감기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통감고이通鑑攷異, "사마주는 [태시) 52월에 처음 하비를 진압한 바 있으니, 아무래도 전의 잘못이다.

사마주는 무군장군撫軍将軍에서 나와서 진동대장군鎮東大将軍이 되어 승진해 대장군에 임명되어 아직 동방을 정벌한 적이 없다. 이 해 위관衞瓘이 정동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어느 날, 업의 해관奚官의 장관, 곽이郭廙가 석포를 밝혔다. 무제는 조칙을 내렸다,

 

이전의 대사마 석포는 성실하고 활달하여 그 재능으로 해야할 일을 했고, 유용한 업적을 남긴 것은 기록해야 할 것이다. 교전教典의 직에 대해서는 지금의 정치를 보좌하는 것이 좋다. 이에 석포를 사도에 임명한다.”

 

관리가 상주했다.

 

석포는 이전에 좌절한 적이 있어 이 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공으로서 자택에 돌아가서 후히 대접받고 있으니 임명해서는 안됩니다.” 무제가 말했다. “오나라 사람들은 경박하고 의지가 약해 결국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국경에서의 대응은 오직 수비를 굳게 하고, 제멋대로 하지 않기만 바라는 것이다. 석포의 계책은 한결같지 않았고, 적을 충분히 고려분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불러서 관직을 내리는 것이다. 옛날 등우鄧禹는 관중関中에서 실패했지만, 결국 한실을 보좌했다. 어째서 한번의 잘못으로 큰 덕을 가리는 것인가!”

 

이에 (사도의) 자리에 올랐다.

 

석포는 이렇게 상주했다.

 

주군의 농업,양잠업에는 아직 상벌 제도가 없습니다. 속관을 파견하여 그 토지별 농작물을 비교하여 그 우열을 열거하고 상벌을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14]

 

무제가 말했다.

 

농업은 위정의 근본이며, 국가의 대업이다. 시세를 안정시키고 교화를 일으킨다 할지라도 부국을 먼저 행하지 않고 교화를 하는 것은 그 정치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각지에서 많은 군사가 발생해 군과 국가의 비용이 확대되고 있다. 정벌을 새로 하거나 계속 한 뒤 자주 수재,한해가 있어, 창고가 충족되지 않고 많은 곳에서 저축이 없다. 옛날에는 농업에 관한 것은 사도가 담당했다. 지금 즉시 정도를 논하더라도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를 확립하려면 시세의 급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요 시대에는 수수관을 중시한 것이다. 지금 사도에 앉은 사람은 그 임무를 담당하는 것에 마음을 왕과 같이 하고 국가에 여유가 있으면 자기 몸을 무릅쓰고 주군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에 사도에게 주군을 조사시켜 씨를 뿌리고 모를 심어 맡겨두면 백성도 따라 협력할 것이다. 만약 종자가 필요하다면 속관 열명을 증원한다. 왕의 관리로서 농정의 경험이 있는 숙달된 자를 배속시키는 것을 허용한다.”

 

석포는 지위에 있어 충실했다고 일컬어졌다. 무제는 늘 맡겼다.

 

[14] 북당초서52 사도8司徒八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왕은의 진서"석포는 사도가 되어 농업과 양잠이 국가 경영의 근본임을 충분히 말해 그 상벌을 밝혔다. 취임 5년 천하는 그를 기렸다." 라 쓰여있다.

 

태시 8년 훙했다.[15] 무제는 조당에서 석포의 훙거를 발표하고 동원東園의 비기秘器, 조복朝服 한 벌, 옷 일습, 30, 포백 백필을 하사했다. 장례 때 절곡개曲蓋추봉차追鋒車고취鼓吹개사介士대차大車[16]를 주고 모두 위의 사공 진태의 고사처럼, 거가를 타고 동액문 밖에서 장송했다. 무제는 명하여 시호를 무라 했다. 함녕咸寧 연간 초기에 명하여 석포 등이 모두 왕의 공적이 있다고 이름을 열거하며 기렸다.

 

[15] 진서무제기에는 "[태시] 9(273)2월 계사癸巳" 라 쓰여있다.

 

[16]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65"석포의 무덤은 남피현南皮県에서 113리 거리에 있어, 높이 2장이다. 석포는 남피현 사람이다.

성총기城冢記에 남피현에 석포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이다.

 

석포는 미리 장례의 수순을 정했다.

 

연릉延陵의 박장薄葬은 공자孔子가 예의 극치라 했고 화원華元의 후장厚葬、『춘추좌씨전〕』에서 신하의 길이 아니라고 했으니, 옛날부터 분명한 도리다. 지금 죽는다면 관에 넣을 때 평상복을 입히고, 무겁게 할 필요는 없다. 또한 반함飯唅(죽은 자의 입에 넣는 동전)도 필요없다. 이것은 어리석은 풍속의 행위이다. 또 제단이나 제기를 마련할 필요도 없다. 매장한 후에는 흙으로 무덤을 채우되, 흙을 올리거나 나무를 심어서는 안된다. 예전에 왕손王孫이 알몸으로 묻혔을 때 그의 아들들이 명령을 받았지만, 군자들은 비방하지 않았다. 하물며 예절에 합치한 것이 비방받을 것인가?”

 

아들들은 모두 유언에 따라 또 친척고리故吏들을 받지 않고 제를 지냈다. 6명의 아들이 있어, 석월石越석교石喬석통石統석준石浚석준石儁석숭石崇이다.[17] 석통石統이 뒤를 이었다.

 

[17] 원화성찬元和姓纂10에서 석포는 석교석통석월석준석준석숭石喬石統石越石峻石儁石嵩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원화성찬의 찬자, 임보林宝는 석월石越을 제 3자라 하여, 본전과 다르다. """"의 잘못이고 """"의 잘못이다.



[아래에 석포의 아들들과 석숭, 그리고 후손들의 이야기, 그리고 정충,왕상,하증,석포의 평도 있습니다만 일단 석포 본인의 열전만 우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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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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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스

2014.02.19
21:30:58
(*.144.5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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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룡

2014.02.20
15:24:55
(*.230.114.106)
우리 파성넷 방에도 추천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 석포전은 진서의 몇 권에 해당할까요? 원전도 한번 보고 싶어집니다.

아리에스

2014.02.20
16:20:37
(*.20.202.173)
진서 열전3의 왕상등열전에 석포전이 들어있습니다. 원문은 오늘이나 내일쯤 올릴게요.

KM학생

2014.02.21
13:39:01
(*.210.209.245)
오오오오오오오!!!!!! 석포!! 석포라니!! 사마부 등과 더불어 가장 보고 싶었던 열전 들 중 하나였습니다!!!

KM학생

2014.02.21
13:40:24
(*.210.209.245)
그와 더불어 정충/왕상 등의 열전도 보고 싶군요 ㅎㅎ

아리에스

2014.02.21
15:33:27
(*.20.202.173)
왕상은 있지 않나요?

KM학생

2014.02.21
22:12:36
(*.210.209.245)
아 글을 잘못썼군요... 열전이 아니라 평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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