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序

 

우리가 아는 三國志는 대략 황건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삼국의 마지막 왕조 오나라가 멸망한 280년까지 약 100여년에 걸친 역사를 말한다. 아무래도 분열시기 역사답게 사건, 사고가 많은 시대였는데 본문에서는‘정사’를 기반으로 사서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불가사의라고 할 만한 기록들을 뽑아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네 번째로 선정된 사건은 마초가 거병한 사건이다.

 

 

2. 서량의 금마초, 조조에게 반기를 들다

 

(1) 사건개요

 

마초가 동관에서 조조와 싸운 일은 연의에서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사건이다. 서량군이 장안을 점령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정사와 거의 흡사한 과정으로 전투과정이 표현되어 있는데 대략적인 개요를 아래와 같다.

 

ⅰ) 마등, 관중에서 조조와 협력하여 곽원 등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다.

ⅱ) 마등, 조조의 권유를 받아들여 위위(중앙의 관직)의 관작을 받고 허도로 입조하다.

ⅲ) 수도로 간 마등을 대신하여 마초가 편장군으로서 마등의 군대를 이어받다.

ⅳ) 마초, 한수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동관에서 격전을 벌이다.

ⅴ) 조조, 마초를 토벌한 뒤 마등 일족을 주살하다.

 

자, 여기서 뭔가 이상한 점을 못 느끼겠는가? 연의에서는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기에 앞서 북방의 위협이었던 마등을 제거하기 위해 계책을 써서 마등을 허도로 불러들여 주살했고 마초는 이에 격분하여 거병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마등은 수도로 입조하기 전부터 조조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었고 마초의 거병 때문에 훗날 일가가 몰살 당한 것이다. 즉, 마등이 조조에게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마초가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마초가 거병했기 때문에 마등이 죽은 것이다.

 

 

(2) 의문점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든다.‘어째서 마초는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까?’. 이러한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마초를 두고‘아버지를 죽게 한 패륜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혹자는‘마등이 입조한 것은 사실상 조조에게 인질로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사서에 기록된 바로는 전혀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동탁 사후 관중 일대는 여러 군벌들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의 시대였고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는데 조조는 그런 군벌들 중의 하나인 마등과 일찍부터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반란을 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일종의 이이제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즉, 마등이 수도로 간 것은 인질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변방의 울타리로서 조정을 수호한 공을 인정받아 자발적으로 간 것이다.

 

 

3. 가설

 

이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마초가 느닷없이 거병한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답이 나와있다.‘무제기(조조전)’,‘고유전’등의 기록을 참고해보면 조조는 종요를 시켜 장로를 토벌하려 했는데 이 같은 계획을 들은 고유와 위기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배송지 주) 위서 왈 …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태조가 순욱을 보내 위기(衛覬)에게 물으니 위기(衛覬)가 대답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爵號)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이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衛覬)의 의견을 태조에게 보고했다. 태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하니 관우(關右-관서)에서 크게 반란을 일으켰고 태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태조가 위기(衛覬)의 의견에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고 이로 말미암아 위기를 더욱 중용했다.』

 

즉, 섣부르게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면 서량의 군벌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계획을 철회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조조는 종요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에게 군사를 내주었고 결과적으로 마초가 여러 군벌들을 규합하여 봉기하게 된다.

 

이 같은 기록을 숙지한 상황에서 본문은 마초가 거병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자신의 일족이 모두 주살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든 것에 과연 정당성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고찰이다.

 

 


1.jpg

(진삼국무쌍의 마초.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정의를 위해 창을 휘두르는 쾌남으로 묘사된다.

자신이 설정한 정의에 어긋나는 인물이라면 조조는 물론이고 유비도 공격하는 그야말로 열혈남)

 

 

(1) 대의명분설

 

대의를 위해 가족을 포기한 사건은 마초 이전에도 있었다. 바로 사세삼공의 명가 원소의 반동탁연합 사건이다. 이 때문에 당시 낙양에 있던 원소의 숙부 원외 일가가 동탁에게 몰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원소와 원외와의 관계는 방계였지만 마초의 경우에는 직계다. 숙부가 죽는 것과 친아버지와 동생이 죽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마초의 거병이 세간에 가져다 준 충격은 엄청났다.

 

마초가 자기 일가의 몰살을 각오하고 거병한 것은 바로 한실을 능멸하는 역적 조조를 단죄하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이 바로‘대의명분설’이다. 즉, 대를 위해 소를 희생했다고나 할까? 이 같은 주장은 Koei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마초를‘오로지 정의만을 위해 창을 휘두르는 남자’로 포장하고 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지나친 미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관에서 패한 뒤의 행보가 대의명분을 부르짖는 충의지사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조조에게 계속된 패배를 맛보면서도 세간의 인심을 잃지 않았던 유비와는 반대로 마초는 재기하기 위해 중앙의 관리를 공격하거나 성을 약탈하는 부도덕한 모습을 숨기지 않았고 결국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양부와 조앙의 역습을 받아 처자식이 죽는 비극을 맛보기도 한다.

 

물론, 앞선 동관전투로 상당부분 기반을 잃은 마초가 조조의 세력 하에 있는 관리를 공격하여 재기를 도모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백성들이 상할 것을 우려하여 화해를 도모하려는 위강의 청을 받아들이고도 후에 약속을 저버려 그를 죽인 일은 전형적인 야심가의 졸렬한 행위였다. 그로인해 마초는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게 되고 뒤이은 장합과 하후연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패퇴하여 장로에게 의지하게 되니 아무래도 마초의 거병을‘대의명분’으로 치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2) 야심설

 

대의명분설과 반대로 마초는 상당한 야심가였다고 보는 주장으로 필자가 취하고 있는 견해이다. 아버지 마등은 조정에 우호적인 인사로 조조와 협력하여 변방의 울타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마초는 달랐다. 필자가 마초를 야심가로 보는 근거로는 다음의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아버지의 원수인 한수와 거리낌 없이 연합했다는 점이다. Koei 삼국지를 보면 마등과 한수가 의형제로 설정되어 있어 그 둘의 관계가 돈독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상은 다르다. 둘이 의형제였던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젊었을 적 일이고 한번 사이가 틀어진 뒤에는 마등의 가족이 한수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원수 사이였다. 즉, 아버지의 원수는 조조가 아니라 한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마초는 마등의 군대를 이어받은 지 채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한수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한다.

 

둘째, 마초가 거병한 이래 그는 하나의 군웅으로서 관중 일대의 패권을 두고 조조와 싸웠다는 점이다. 마초는 한수와 연합한 것도 모자라 10部로 불리는 이감, 장횡, 마완과 같은 기타 군벌들을 포섭했고 실질적인 연합군의 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동관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도 여러 제융(주로 저족과 강족)들을 이끌고 농서를 유린했으며 위강을 죽이고 기성을 차지한 뒤에는 스스로를 정서장군 영 병주목에 독양주군사로 칭하게 된다. 그때까지 좌장군에 지나지 않았던 유비나 토로장군 회계태수에 불과했던 손권에 비한다면 마초는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마초는 유비에게 귀순할 당시까지도 일반 장수가 아닌 군웅으로서 대접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양부가 동관에서 마초를 물리친 뒤 군사를 물리려는 조조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마초를 두고‘한신과 영포의 용맹을 갖춘 자’라고 평가한 부분은 주목해볼만 하다. 한신과 영포가 누구인가? 비록 말로는 좋지 않았으나 살아생전에는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유방과 동등한 위치의 왕으로서 활약했고 독자적인 세력을 꾸리려는 야심을 가졌던 인물들이다.

 

이처럼 마초는 일반 장수가 아닌 군웅의 위치에서 패권을 두고 조조와 싸운 인물이었기에 단순히 역적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보다는 마등과는 달리 자기 세력의 독립을 꾀한 야심설이 더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3) 단순오해설

 

그냥 간단하게 사서의 기록대로 장로를 토벌하려는 종요의 움직임을 오해하여 거병한 것이라 보는 견해이다. 이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나 너무 마초의 사람됨을 가볍게 평가했다는 단점이 있다. 마초는 이전부터 종요와 연합하여 곽원을 토벌하는 등 조조측 인사와 교류가 많았던 인물이다. 게다가 부친인 마등이 親 조조파 인사로서 정식으로 관작을 받고 일족 전부가 조정으로 들어간 상황이었는데 조조가 직접 지휘하는 대규모 중앙군도 아닌, 기껏해야 종요의 3천 남짓한 병력을 보고 놀라서 거병할 필요가 있었을까?

 

 

4.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마초가 거병한 직접적인 원인은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종요가 병력을 움직인 일이 맞다. 앞서 제시한 위기전 배송지의 주석을 보면 종요의 의도는 장로를 토벌하는 것 외에 관중 일대의 군벌들을 위협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고 이를 간파한 마초가 선수를 쳤을 것이란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자기 일족의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거병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요가 위협하려는 대상에는 親 조조파 마등 일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미 주장이 되는 마등은 수도로 입조한 상황이었다).

 

고로 필자는 위의 세 가지 견해 중 야심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패륜에 가까운 행동이기도 했다. 훗날 마초의 처자식이 수차례에 걸쳐 죽음을 당했고 결국 일가로는 마대 하나만 남은 이유도 이러한 업보가 반영된 것이 아니었을까?


lh blank rh
설문조사 종료일: 2013-09-05 00:00
참가자: 8
blank
마초가 거병한 이유는? (8)
1 대의명분설
  0 (0%)
2 야심설
  bar 6 (75%)
3 단순오해설
  bar 2 (25%)
blank
lb blank rb


---------------------------------------


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72057589

조회 수 :
7795
등록일 :
2013.08.06
14:26:29 (*.233.63.81)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private_begagi/24862/26b/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4862

코렐솔라

2013.08.06
14:43:20
(*.52.91.73)
저는 위략에 있는 염행전의 내용이 이것과 관련해서 상당히 깊게 생각해볼만 하다고 봅니다. 종요가 마초를 시켜 한수를 죽이려고 했다던가 염행과 한수의 가족도 수도로 보냈다던가 하는 등의 기록들이 마등을 볼모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되더군요.

미백랑

2013.08.06
14:54:07
(*.233.63.81)
염행이 일종의 조조쪽의 스파이였다는 말인가요?

코렐솔라

2013.08.06
15:18:17
(*.131.108.250)
아뇨 딱히 그런 쪽은 아니고 종요가 서량에게 이런 말을 실제로 하고 있었다면(마초가 한수를 설득하기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요) 종요의 작은 움직임에도 마초가 긴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이라고나 할까요

미백랑

2013.08.06
15:23:58
(*.233.63.81)
코렐솔라님 의견을 듣고 염행전을 정독해봤는데, 염행은 처음부터 친 조조파였고 그쪽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게 조조쪽에서 의도한 것이라면 마초를 비롯한 서량의 군웅들이 충분히 반발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도 조금은 드네요.

초삽질

2013.08.06
15:01:53
(*.218.251.72)
직접적인 이유는 될 수 없지만 입촉 후 마초의 행적으로 보면 야심설에 무게를 두고 싶군요.
1. 마초는 유비에게 항복 후 유비의 자를 불었었다 -> 부하가 아닌 같은 군벌인 동료로써 동등한 대접을 받길 원했던 것으로 보임
2. 팽양이 모반을 일으키려 할 때 마초를 찾아간 점 -> 입촉 후 마초의 입지가 좁아졌으니 찾아갔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과거 서량에서 거병을 일으키며 조조에게 대항한 전력도 있었기에 찾아간거라고도 볼 수도 있음

망탁조의

2013.08.06
15:17:52
(*.250.43.215)
한수를 비롯해 서량 일대 유명한 군벌들이 마초에게 동참했다는 사실이 주목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초 혼자 조조에게 적대할 생각을 품은 것이 아니라, 그 일대 힘 좀 쓴다는 집단의 수장들이 모두 마초와 뜻을 같이 했다는건,
조조 정권이 서량 유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듯 합니다.

제가 현재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해 가설의 영역에만 두고 있는 부분인데,
조조 정권을 가만히 보면 산월 등 멀리 있는 이민족은 재물과 벼슬로 구슬리고 오환이나 강족 등 근접한 이민족은 군사력으로 제압하더군요.
그렇다면 서량주 일대의 호족들을 조조 정권이 크게 대접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마완이나 마초도 곽원을 격파하는데 활약했음에도 정작 벼슬을 받은 사람은 본거지에서 멀뚱히 있던 마등 뿐이던데,
그렇다면 서량주 내부에서는 조조 정권의 서량 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마등을 변절자로 보는 여론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미백랑

2013.08.06
15:26:18
(*.233.63.81)
서량 일대 군벌들이 조조와 껄끄러운 관계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연 마초가 그런 관계였는지는 의문이라는 거죠. 곽원 토벌로 자기 아버지는 벼슬 받았고 아들인 자기는 마등의 영을 모조리 물려 받았는데 굳이 조조와 대립할 까닭이 있었을까?....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야심설을 채택한 게 마초는 조조에게 협력적인 아버지를 탐탁찮게 여기고 스스로 패권을 잡을 결심으로 거병한 것 같다는게 제 결론입니다.

망탁조의

2013.08.06
15:19:25
(*.250.43.215)
조비 정권에나 조예 정권에도 서량 유지들의 불평 불만은 계속 있었고 이네들이 나중에 제갈량이나 강유와 협력하는 사태로 이어지더군요.

패륜마초

2013.08.06
16:20:15
(*.50.21.24)
마등이 자발적으로 갔다기 보다는 마지못해 불려갔을 것 같아효.
어쨌든 마초가 희대의 패륜아임에는 틀림없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4 오(吳)나라 멸망과 곽마의 반란 [5] 미백랑 2013-08-31 6707
23 마속과 제갈량의 북벌 : 작전참모 마속 [7] 미백랑 2013-08-30 4889
22 교주를 둘러싼 진나라(晉)와 오나라(吳)의 전쟁 [2] 미백랑 2013-08-28 5072
21 기타 삼국지 불가사의 사건 (5) 진궁, 연주를 여포에게 바치다 [5] file 미백랑 2013-08-26 7581
20 마속은 제갈량에게 엄청난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4] 미백랑 2013-08-22 4599
19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3) - 손권, 머리를 조아려 나라를 구하다! [2] 미백랑 2013-08-18 5136
18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2) - 조조, 천하의 대세를 결정짓다 [1] 미백랑 2013-08-16 4436
17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1) - 손권, 결전의 탁자를 베다! [2] 미백랑 2013-08-14 3970
16 제갈량 사후 위연과 양의의 대립 : 위연과 양의는 왜 싸웠을까? [21] 미백랑 2013-08-13 6510
15 북벌로 살펴보는 제갈량의 군략 (2) - 북벌 군략 '서북지방 경략' [1] 미백랑 2013-08-12 4064
14 북벌로 살펴보는 제갈량의 군략 (1) - 공명의 군략은 너무나 정직했다 [1] 미백랑 2013-08-12 5065
13 주유 남군 전투 고찰 : 주유는 단순히 강릉만 점령한 것이 아니다 [15] file 미백랑 2013-08-11 7194
12 주유가 1년 동안 조인과 싸운 것은 폄하될 일이 아니다 [18] 미백랑 2013-08-11 5465
11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 - 그의 이른 죽음이 아쉽다! [7] 미백랑 2013-08-10 4794
10 유비는 무슨 까닭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형주에서 도망쳤을까? [5] 미백랑 2013-08-09 4772
9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것은 헌제에 대한 배신행위다? [12] 미백랑 2013-08-08 4772
8 손권의 칭제와 제갈량의 절맹호의(부제 : 제갈량의 굴욕) [7] 미백랑 2013-08-08 4415
7 조조는 왜 '찬탈자'로 불리는 것일까? [8] 미백랑 2013-08-08 4646
» 기타 삼국지 불가사의 사건 (4) 서량의 금마초, 조조에게 반기를 들다 [9] file 미백랑 2013-08-06 7795
5 관우뢰 사건 : 관우는 기밀유지에 실패했다 [8] 미백랑 2013-08-04 5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