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序

  

삼국지 전편을 통틀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유비, 조조, 손권을 제외하고는 제갈량(이하 공명)만큼 비중이 높은 인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공명은 어떤 면에선 이들 군웅을 압도하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데 그것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본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토론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공명과 관련된 주제라는 점이다. 삼국지 연의에서 공명은 신기의 군사로 표현된다. 그리고 정사가 많이 보급된 지금에 와서도 공명은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아니 시대를 뛰어넘어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될 만한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으나 문제는 그의 군재다.

 

삼국지 연의에 의하면 유비에게 임관한 뒤로 공명은 ‘신기의 군사’로서 유비군의 작전을 총괄지휘하고 전투를 수행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공명이 직,간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유비 사후 승상이 되고 난 이후였고, 그의 주요한 전장이었던 남만정벌과 5번에 걸친 북벌 중에서 사실상 공명의 군재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북벌뿐인데 그 북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 공명의 군략에 대한 평가에서 숱한 주장을 만들어낸 이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공명의 군략은 어떠했을까? 이미 이 주제는 카페 내에서 많은 토론을 거친 내용이지만 의외로 심도있게 고찰한 글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주장들은

 

‘국력이 약한 촉의 입장에서 북벌 내내 공세적 입장을 취했으니 그의 군재는 비범하다’

‘비록 패배했지만 패배의 후유증의 거의 없었으니 그의 군재는 비범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공명이 구상한 북벌전략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라는 식의 추상적인 주장들이 대부분이었다. 본문에서는 이런 추상적인 고찰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정립한 기준을 가지고 한번 구체적으로 다뤄볼 예정이며 추후 많은 지자(知者)들과 함께 토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북벌을 통해 나타난 군략의 특징

 

공명의 5번에 걸친 북벌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군략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이 점을 간과하고 넘어가면 그의 군략을 평가하는 데 있어 많은 오류를 낳게 되는데 한번 항목별로 살펴보겠다.

 

 

(1) 전장결정에 이은 전선의 형성

 

공명의 군략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전장결정에 이은 전선의 형성이다. 이는 북벌의 기본전략이 적의 주력군 격파가 아닌 옹양주 겸병을 통한 근거지 확보에 있기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인데 1차, 3차 북벌 때는 주전장이 기산을 중심으로 한 쿤룬, 치렌, 알타이 일대의 산맥들이었고 5차 북벌 때는 위수를 경계로 한 오장원과 그 일대였다.

(2차 진창전투는 기습전의 의미라 전쟁이 단기전이었고 4차 북벌은 곽회를 상대로 한 무도, 음평의 공략이었기 때문에 다른 북벌에 비해 비중이 낮아 제외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수행단계에 있어 전장이 결정되면 그 다음 행보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속전속결의 전술로서 미처 적군이 전력이 집결되기 전에 약한 곳을 찾아 쳐부수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전장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아군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뒤 적의 주력을 상대하는 방법이다.

 

이 두 개의 방법들 중에서 공명이 선택한 방법은 항상 후자였다. 북벌 전반에 있어 공수의 우선권과 전장결정권은 항상 공명에게 있었는데 그는 전투수행의 첫 단계에 있어 항상 정석을 택했다. 공명이 선택한 전술은 현대전으로 비추어 볼 때 고지선점과 참호전의 집합체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 전술은 상당히 안정적이며 방어에 유리하나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상실되며 전쟁수행에 있어 근본적으로 장기전을 바라는 것이다.

 

공명이 첫 북벌의 전장을 기산일대의 산맥으로 정한 것은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http://blog.naver.com/begagi/50150234107 참고)

 

천수 - 남안 - 안정으로 이어지는 전선을 형성한 뒤 그에 따른 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거점으로 삼아 방어진지를 구축, 그러한 방어권 내의 지역들을 겸병하면서 촉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는 가정에 파견한 마속에게 내린 군령의 내용만 살펴봐도 추정할 수 있다.

 

가정전투의 관련 기록인 마속전, 장합전, 왕평전을 살펴보면 마속은 공명의 지시대로 성을 점거하지 않았으며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고 나오는데 여기에서 물의 의미는 용수로의 의미인 동시에 위수의 지류를 경계로 삼은 자연방위선을 뜻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촉군의 주력은 가정의 성채에 위치하여 전장을 총괄하고 왕평을 비롯한 부대들은 제각기 물을 근거로 거점에 위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해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가정전투에서 그린 공명의 원래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는 마속의 본대가 무너진 후에 왕평이 제자리를 지키며 장합을 막았다는 것과 추후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력을 인솔하여 귀환했다는 기록을 고찰하면 능히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다.

 

이러한 공명의 전술성향은 마지막 북벌인 5차 북벌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http://blog.naver.com/begagi/50150337578 참고)

 

먼저 수경주 권 17 - 18편 위수편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공명은 본대를 오장원에 주둔시키고 북으로는 위수를 경계로, 동으로 위수의 지류인 야수를 경계로 전선을 형성하여 사마의와 대치했는데 동시에 여러 곳의 방어거점을 형성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갔고 둔전을 활용하여 자신의 전선 안의 지역들을 겸병, 이를 촉의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것이 공명의 주된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장결정에 이은 전선형성의 전술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안전하고 방어에 유리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간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이 전술은 설사 다른 거점이 무너져 종국적으로 전쟁이 패배하더라도 다른 거점에 위치한 병력들을 무사히 귀환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가정에서의 패배 이후에 정연했던 촉군의 철수라든지, 오장원에서 공명이 병사한 후에 이루어진 촉군의 무사귀환은 공명 개인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기본 바탕이 되는 전술의 특성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2) 군세간 대회전을 통한 주도권 확보

 

그렇게 전선이 형성된 후 공명의 공격은 항상 주력군을 동원한 대회전으로 전장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4차 북벌과 5차 북벌에서 나타나는데 결과는 한번의 성공, 한번의 실패였다.

 

4차 북벌에서 공명은 다시 기산으로 출병했는데 사마의가 주력군을 이끌고 기산을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공명은 상규로 나가 위군을 요격하려 한다. 사서를 보면 이때 촉군의 행보를 ‘역격’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역격은 수비하고 있는 쪽이 공세로 전환하여 전투를 벌이는 경우에 쓰는 용어이다. 즉, 공명은 기산으로 출병한 뒤 곳곳에 방어거점을 설치하여 전선을 형성한 뒤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서 적의 주력과의 대회전을 벌이고자 하는 것이 속내였는데 여기에 말려들어간 위군측의 곽회와 비요는 여지없이 촉군에게 격파당한다.

 

사마의도 별반 다를 바가 없어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는 촉군의 뒤를 무리하게 쫓다가 한판 싸움에 대패하여 장합까지 잃고 마는데, 당시 전투기록을 살펴보면 공명이 이끄는 촉군은 군량이 떨어졌다고 촉군 전부를 한번에 대대적으로 철수한 것이 아니라 기본전선은 유지하면서 순차적으로 군을 물리고 있었다. 이는 장합전의 기록에서 [제갈량이 물러나 기산을 지키고 있었다.], 선제의 기록에서 [제갈량은 노성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점거하고 물을 끊은채 두텁게 포위했다.] 등등의 기록과 촉군이 장합을 활로 쏘아 죽이는 장면에서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를 난사했다.]란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추정할 수 있다.

 

즉, 사마의는 무리하게 촉군의 방어전선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가 이미 지형과 수비의 이익을 가진 촉군에게 격파당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공명의 군략특성을 깨달은 사마의는 마지막 5차 북벌에서는 기존의 호전적인 태도를 버리고 견벽거수로 일관한다. 이미 방어태세를 갖추고 자신이 유리한 전장에서 싸움을 거는 공명에게 그대로 응하는 건 사마의에게 있어 자멸의 지름길이었다. 그렇다면 안싸우면 되는 것이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갈수록 승패를 결정하는 바로 물자와 식량의 보급. 이 부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던 사마의로서는 장기전 그 자체가 승리로 향하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3. 評

 

5차 북벌에서 공명의 행보와 정반대되는 사례를 찾으라면 관도전에서의 조조를 들 수 있다. 관도전 초기 원소는 막강한 군사적 우위를 활용하여 안량으로 하여금 동군태수 유연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연진 남쪽에 머물며 황하를 사이에 두고 조조와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조조는 주력을 동원하여 원소의 본대를 상대하는 대신, 성동격서의 책을 이용하여 원소의 주의를 끈 뒤 기습적으로 안량을 공격하여 그의 부대를 궤멸시킨다. 그 후의 오소급습도 마찬가지.

 

관도대전 내내 조조는 적의 주력과 결전을 벌이기보단 끊임없이 기회를 살피고 기동성을 발휘하여 적의 취약한 곳을 급습하는 전술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공명과 대비되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물론, 공명 역시 오장원 대치에서 북원을 급습하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행보, 공명의 주된 의도는 둔전책을 통한 장기전이었고 이를 통한 영토확보였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공명의 군략은 너무나 정직했다. 그것이 위와의 근본적인 국력이 차이에서 오는 제한이든, 공명 자신의 신중성이 반영된 모습이든 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북벌에서 꺼내든 공명의 군략은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선택들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위나라 입장에선 공명은 막아내기가 너무나 수월했다.

 

분명 공명의 군사적 통솔력은 분명 매우 뛰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공명이 이끄는 촉군에게는 역동성과 과감성이 부족했고 그것이 결국 패인이었다. 이런 면에서 진수가 공명에게 내린 평은 되새겨볼만 하다. 진수는 공명을 평가하면서

 

[응변의 장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라고 했는데 이건 매우 정확한 평이다.

 

진수는 공명의 군재가 나빴다고 평한 것이 아니다. 응변, 즉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융통성을 발휘하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임기응변적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관우는 형주의 군세만으로 조인을 몰아내고 우금과 방덕의 7로군을 궤멸시켰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공명이 처한 상황이 관우보다 힘들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관우는 너무나 용맹했고 공명은 너무나 신중했다. 하지만 관우는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공명은 패배는 항상 피해가 최소한에 그쳤다.

 

명장의 조건에는 원칙과 기공이 모두 요구된다는 점을 볼 때 공명을 한신이나 백기, 악의나 손빈 같은 대군략가로 올려세우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공명은 원칙에 충실하고 신중했던 좋은 지휘관.

 

딱 이정도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좋은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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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서는 공명의 오장원 둔전책과 조선 초기 4군 6진 개척과의 비교를 통해 공명의 군략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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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50339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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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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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평화

2013.08.12
15:17:24
(*.129.54.218)
‘국력이 약한 촉의 입장에서 북벌 내내 공세적 입장을 취했으니 그의 군재는 비범하다’
- 국력 비교 시에 5번에 걸친 주도권 쟁탈이나 전세 역전의 기회를 노렸다는 점에서는 비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패배했지만 패배의 후유증의 거의 없었으니 그의 군재는 비범했다.’
- 전투력 보존, 퇴각 시 지연전술로 장합 등 추격하는 적에게 피해를 입힌바 있다. 이런 점에서는 칭찬 받을 만하다.

‘비록 실패했지만 공명이 구상한 북벌전략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전략 자체는 준수 했으며 일단 천하이분지계를 상황적으로 잘 이용해 유비가 마초보다도 한단계 세력이 낮게 평가되던 것을 역전시켜서 하나의 세력으로 발돋움 시킴, 특히나 오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실리를 취하고 북벌을 도모할 위치까지 간 것은 인정 받을 만하다.

하지만.....제갈량의 용병시 가장 큰 단점은 앞서 미백랑님께서 지적하신 모택동의 의견에 잘 나와 있는데 전략 보다는 전술적인 레벨에서 "기동성을 희생"시킨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전쟁의 원칙 중 기동의 원칙에 위배,

두번째 단점은 단기적인 전술 목표 제시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1차 북벌 시에 1차적인 달성 목표가 옹양주 겸병인지 아니면 장안행인지 애매한 기동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표의 원칙 그리고 집중의 원칙에 위배되는 전술적인 우를 범했다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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