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을 쓰기에 앞서


일단 공명은 위나라를 멸하고 한실을 부흥시킨다는 국가정책 하에 북벌을 개시했으며 그에 대한 첫 단계가 장안을 포함한 옹ㆍ양주의 확보였고 그 뒤에 추후 중원으로 진출하여 선대의 숙원을 완수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며 이는 그동안 저를 비롯하여 북벌 관련 토론에 참여했던 토론자들의 일관적인 입장이었다는 점을 밝힙니다. 즉 이 사안은 본 토론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는 뜻으로 해당 본문에 설사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내용을 충분히 유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제 이름으로 게시물을 검색하면 충분히 숙지할 수 있는 내용이니 일일이 근거링크를 걸진 않겠습니다.)

 

또한 가장 많이 들어온 용어정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선, 시각과 입장, 구체적 사안에 따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긴 하지만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겠습니다.

(http://blog.naver.com/begagi/50149487023 참고)

 

일단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기준을 기본으로 하고 현재 확립된 국방부의 공식적인 정의를 수용하여 ‘전략’의 광범위한 의미들 중에서 군사적인 부분만 발췌하여 ‘군략’이란 단어로 표현할 것이며 ‘군략’은 ‘군사전략’의 줄임말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적용하자면 본문에서는 ‘멸위복한’은 기본 전제이므로 일단 제외하고 쟁점이 되는 5차 북벌에서의 당면과제였던 옹ㆍ양주(이하 서북지방) 겸병을 ‘군략’으로, 공명의 둔전책이나 북원진출과 같은 군사적인 기동적인 측면을 ‘작전’으로, 부대장악력이라 할 수 있는 통솔적인 측면을 ‘전술’로 정의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물론, 실제 용어들의 의미와는 다소 어긋날 수도 있지만 구분이 매우 애매하기 때문에 편의상 본문에서는 위의 기준에 따를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그럼 본문을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북벌의 기본 ‘군략’인 서북지방 경략

 

공명은 여러 차례 북벌을 감행했는데, 사서상에서 느껴지는 뉘앙스 혹은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다면 공명의 진출은 ‘영토침공’이 아닌 ‘경략’으로 느껴진다. 경략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림 혹은 침략하여 점령한 지방이나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쉽게 말하자면 북벌의 1차적 대상이었던 서북지방을 점령하고 그곳을 촉한의 영토로 흡수하여 근거지를 넓힌다는 것이 북벌의 기본 군략이란 것이다.

 

보통 사서에서 경략이란 용어는 진나라 멸망 후 유방과 항우의 초한쟁패 시기에 많이 등장하는데 ‘유방이 한신에게 군사를 주어 제나라를 경략하게 하였다.’ 등등의 표현이 그것으로 자치통감에도 많이 보이는 단어다. 기본적으로 경략은 왕조의 멸망이나 교체기에 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력의 결어로 생긴 행정적 공백기를 이용하여 군벌집단이 거점을 점령하고 주위 고을들에 대한 세력권을 확보할 때 사용되는데 공명의 북벌의 경우를 적용하여 살펴보면, 1차 북벌 당시 가정전투의 패배 후 한중으로 철수할 때 1천여 인가를 끌고 왔다는 점, 3차 북벌에서 음평과 무도를 점령하여 촉한의 영토로 편입시켰다는 점, 5차 북벌에서 오장원으로 진출하여 둔전책을 펼치며 토착주민들 집단에로의 정착을 유도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공명의 북벌 기본군략이 서북지방에 대한 경략으로 결정되자 이는 실제 작전에서의 몇 가지 특성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 역사의 대표적 경략사례라 할 수 있는 김종서의 6진 개척을 예시로 양자를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1)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살펴본 경략의 특성

 

1432년(세종 16) 12월, 조정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북방영토를 개척하게 했다. 김종서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관내를 순시한 다음 서북방 영토개척계획을 조정에 보고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석막에 설치한 목책을 동량북과 알목하로 옮기고 그 주변의 논과 밭을 경작하는 주민들 중에서 토관을 임명해 목책 안의 백성들을 통솔케 한다.

2. 알목하 주위에 3천척의 석성을 축조하여 판관과 군인을 배치하고 절제사가 왕래하면서 통솔한다.

3.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옮겨 주위에 6천척의 석성을 축조하고 판관과 군인을 배치하여 절제사가 왕래하면서 통솔한다.

4. 경원부를 소다로로 옮기고 주위에 6천척의 석성을 축조한다.

5. 공주성에 해도만호 겸 첨절제사를 배치하고 군인 200명을 지휘하여 육지와 바다를 방어하게 한다.

6. 경원과 영북진에 판관을 신설하여 민사를 담당케 하고 군무는 절제사가 담당한다.

7. 영북진과 경원부를 도호부로 승격시킨다.

 

이렇게 시작된 김종서의 영토개척은 1434년에 시작되어 1449년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의 6진이 설치되기까지 무려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6진 설치의 방식은 먼저 관내 여진족의 세력을 축출하고, 주요 요새지를 선정하여 성곽과 초소를 건축하여 방어선을 형성한 뒤, 백성들을 이주시켜 해당 영토에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다 수월한 개척을 위해 우호적인 여진족의 부락을 끌어들여 벼슬을 주는 형식으로 동화정책을 구사하기도 했는데 근본적으로 이러한 영토경략은 국책사업으로 장기간을 요하는 사업이었다.

 

 

(2) 경략방식의 영토확장의 문제점

 

경략방식의 영토확장은 자체방위가 가능하고 비용을 절감시킨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장기간의 사업이라는 것과 해당 지역의 군사적 적대집단을 완벽하게 소탕하여 축출해야 한다는 선결과제가 있다는 점이 큰 장애요인이었다. 이러한 장애는 곧 동시대에 추진된 또다른 경략지역인 압록강 상류에 대한 4군의 폐지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1450년(문종 1) 8월 중신회의에서 하연과 남지, 김종서, 정갑손 등의 군사전략가들은 4군 중 3군의 폐지를 건의하고 나서는데 그 주된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4군이 설치된 압록강 상류지대는 돌출지대로 적지 깊숙이 위치하여 여진족의 침입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주한 백성들이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힘들다.

둘쨰, 배후에 겹쳐있는 험준한 산악은 인근지역과의 교통을 불편하게 하여 유사시 구원하기가 어려워 방어에 취약하다.

 

 

(3) 공명의 북벌에로의 대입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이, 기본적으로 경략의 군략을 취한 공명은 장기전을 바라는 특성의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명의 이러한 군략은 큰 허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북지방에 대한 위나라의 통치력은 생각보다 확고했다는 것이다. 일단 조조 시절에는 종요와 장기의 사업으로 서북일대에 대한 통치력을 수립해놨고 조비 시절에는 도독제군의 관직을 설치하여 요소요소마다 거점을 설치하고 방위를 도맡고 있었다.

(즉, 쉽게 말해 장안을 중심으로 사령부를 설치하고 옹주와 양주의 요새지마다 군대를 파견하여 일종의 진관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으로 자치통감 진기2 무제 함녕 5년조 호삼성의 주석을 참고하기 바람.)

 

이러한 위나라의 통치체제는 비록 1차 북벌 당시 3군이 투항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잘 막아낼 수 있는 원인이 되었고, 그 후 공명의 계속적인 북벌로 위나라의 관심이 증대되면서 서북지방에 대한 방위력이 증가하면서 공명이 추구한 경략의 선결조건인 적대 군사집단의 완전한 축출이 상대적으로 힘들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북벌을 위해 공명이 출진한 시기이다. 1차 북벌은 봄 정월, 2차 북벌은 12월, 4차 북벌은 3월, 5차 북벌은 4월인데 2차 북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따뜻한 날씨의 봄에 이루어졌다. 이 이유는 바로 북벌의 기본 군략인 경략에 있다. 내가 전에 올린 유목민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위는 오환과 강을 정벌하여 높은 수준의 기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기병력을 저하시키기 위해선 얼었던 강이 녹아 주위가 진창으로 변하는 시기가 유리했고 또한 5차 북벌 당시 얼었던 위수가 녹아 강 자체가 자연방위선으로 변모하면서 공명은 위수를 사이에 두고 위남을 점거하여 그 일대를 경략하여 촉한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일부러 출진시기를 따뜻한 봄날로 잡은 것이다.

 

하지만 공명의 이러한 경략의 북벌은 생각보다 서북일대에 대한 위나라의 군사력이 막강하여 축출이 마땅하지 않았다는 점과, 장기전에 필요한 보급이 험한 지형으로 인해 쉽지 않았다는 점, 촉한은 위나라에 비해 기동성이 부족하여 넓은 전선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힘들었다는 점, 더욱이 사마의의 현명한 판단으로 위나라 주력이 위수를 건너 위남에 주둔함으로써 경략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이는 곧 4군 폐지를 주장했던 김종서를 비롯한 군략가들이 거론한 이유들에 합치된다. 즉, 공명의 기본적 군략 자체가 당시 촉한과 위나라의 형편상 성공하기 힘든 것이었고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노선이었던 것이다.

 

 

3. 군략에 따른 작전술의 미흡.

 

(1) 전쟁론 기준에 따른 고찰

 

서북지방에 대한 경략을 군략의 기본 노선으로 잡으면서 공명의 작전은 장기전 형태의 방어적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는 결과론적의 이야기로서 그러한 군략과 작전을 펼쳤던 공명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러한 움직임은 많은 비판을 낳고 있는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기준에 따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수립에 있어서(여기서는 군략과 작전 구사의 의미로 봐도 무방하다.) 대담성을 실제 전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그의 말을 빌어서 살펴보자면 대담성은 수송병에서 야전사령관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귀한 덕이며 무기가 예리함과 광채를 띠도록 해주는 진정한 강철이라고 평가했는데 대담성은 공간, 시간, 전투력의 규모 등을 계산하여 얻는 예상적 결과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는 중요한 말을 했는데 ‘직위가 높아질수록 외부요인에 강한 압박을 받게 되므로 대담성이 약화된다’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선 후술한다.

 

두 번째로, 클라우제비츠는 기습을 모든 작전의 기초로 두었다. 설사 병력의 차이가 있더라도 중요한 건 실제 전투에 있어서 전투력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인데, 이를 위한 방편으로 가장 효율적인 것이 기습이기 때문이다. 즉, 기습은 군대의 속도와 작전의 비밀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여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작전술(전쟁론에 따르면 전술)의 하나로서 철저한 계산과 적에게 자신의 법칙을 강요하는 야전사령관만이 기습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 번째로, 책략이다. 일종의 기만, 계략의 개념으로서 어떤 예측과 지혜로도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을 때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평하였다.

 

네 번째로, 끈기이다. 이것은 군대의 안정성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 지휘관은 결정적 저항원인이 발생하지 않는 한 최초의 군략의도를 지키는 끈기가 평형력을 이루는 데 필수적 요인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4가지 기준을 근거로 공명의 작전을 평가한다면, 그는 네 번째 요인인 끈기적인 측면에서는 훌륭했으나 다른 요인에서 뒤떨어졌다. 특히 대담성적인 측면에서 클라우제비츠가 언급한 ‘직위가 높아질수록 대담성이 약화된다’는 말은 섬뜩할 정도로 공명에게 들어맞는 구절인 것 같다.

 

 

(2) 구체적 적용

 

그렇다면 구체적 사례에서 어떠한 작전술적 비판을 공명에게 가할 수 있을까? 현재 본문에서 쟁점으로 삼고 있는 5차 북벌 時 오장원 진출에 따른 둔전책의 경우로 한정해서 살펴보자면, 당시 사마의는 견벽거수의 작전으로 공명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가는 경우 승패를 결정하는 기본적 요인은 보급이라는 것은 진리이다. 이 부분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공명은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둔전이란 작전을 들고 왔다. 기본적인 군략방침이었던 ‘경략’과 맞물리는 작전으로 군량을 현지조달하여 장기전을 유지하고 1차 글에서 밝힌 대로 주력군간 회전을 통해 승기를 잡으려는 것이 5차 북벌 당시 공명의 작전이었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서 당시 사마의의 견벽거수를 깨려면 장기전의 방식이 아닌, 기공적인 측면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인 방책을 제시해보자면

(물론 이는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며 군사학에 있어서 전문가도 아니므로 하나의 참고의견으로 봐주길 바란다.)

 

 

① 유목민 병력을 활용해 후방급습

 

당시 제갈량은 선비족의 선우 가비능과 연합한 상태였다. 물론 4차 북벌 당시 가비능이 제갈량에게 호응하여 봉기한 적이 있었는데 가비능의 호응 그 자체만으로도 위나라 입장에선 상당한 골치가 아닐 수 없었다. 오장원 대치 상황 때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가비능의 협력을 이끌어내거나, 혹은 강유가 농서로 나올 때 강족 부락 미당과 연합한 것처럼 주변 유목민들을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그들의 별도 군세를 활용했더라면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② 적극적인 기만전술

 

성동격서를 구사하거나 소수의 정예병을 활용하여 교란작전 등의 특공전술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것도 한 방책이 될 수 있다. 오장원 대치 상황에서 공명이 구사한 기만전술은 북원공략 하나였고 기본적으로는 둔전책을 통한 방위작전이었는데 클라우제비츠가 지적한 것처럼 기만전술과 기습작전은 구체적 전장에서 전투력의 우위를 확보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공격자의 입장이었던 공명에게 있어 조금 더 활발한 기동작전의 구사가 있었야만 했다고 본다.

 

 

③ 책략의 활용

 

악의의 질풍노도와 같은 진격에서 제나라를 구한 것은 전단의 이간책이었다. 실로 풍전등화와 같은 제나라의 운명에서 마지막 구원요소로 등장한 것은 책략의 활용으로 클라우제비츠가 지적한 것처럼 전투의 활로가 보이지 않을 경우엔 기발한 책략이 현 상황을 타개하는 데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전단이 연나라 수뇌부를 상대로 구사했던 것처럼 이간책 등의 계략적인 측면을 구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사마의의 견벽거수에 대하여 휘하 무장들의 불만은 많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투유도를 사마의가 아닌 휘하 무장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각 군진간의 상하지휘관계에 대한 분열작전을 활용하는 등의 방법도 괜찮지 않았을까?

 

 

④ 토착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회유 및 투항권고

 

서북지방은 전통적으로 위나라의 통치력이 느슨한 곳이었다. 물론 종요와 장기의 활약이 있었다고 하지만 1차 북벌에서 보여지듯, 토착세력들의 반란의 여지는 분명 있었다. 예전 이성계가 여진족 부락을 적극 회유하여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고 그들의 군사력을 활용하여 적대세력을 공략했던 것처럼, 공명 역시 주변 군들에 대한 회유작전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서북지방에 대한 위나라의 통치력을 깨뜨렸다면 사마의로서도 견벽거수의 작전으로만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⑤ 과감한 공격작전

 

5차 북벌은 손권과 연합하여 촉, 오가 양방향에서 위나라를 공략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때문에 호전적인 성격의 사마의도 섣불리 전투에 임하지 못하고 견벽거수로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공명이 구사한 장기전은 배경적 원인이 비추어볼 때 좋은 작전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손권과 위나라의 전쟁이 끝나기 전에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선 자신의 전투력을 믿고 사마의가 우려했던 것처럼 무공을 따라 동진하는 방법 등의 보다 적극적인 기동전술이 필요했다고 본다. 자신의 전투력에 대한 확신을 믿고 움직이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한 예로, 1794년 영국의 리처드 하우 제독이 이끄는 25척의 영국함대와 26척의 프랑스 함대가 교전한 ‘6월의 영광스러운 첫날 해전’이 그것이다. 당시 하우 제독은 함포전의 정석인 횡대열을 버리고 기함을 선두로 하여 종대열의 돌격전술을 구사하여 프랑스 함대의 고물과 이물을 동시에 공략했는데, 이는 해전사에 획기적인 전술로 기록되었고 이것이 더욱 정밀하게 연구되어 결국 트라팔가에서 순풍을 활용한 넬슨의 돌격전술로 진화, 사상자 2백 대 5천이라는 엄청난 대승의 원동력이 되었다.

 

분명 공명의 군대는 매우 강력했다. 엄밀히 따져본다면, 상대의 장기는 보급을 활용한 장기전이었고 공명의 장기는 막강한 전투력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장기를 활용하고 상대의 장점을 봉인하는 것, 이것이 유능한 군략가의 요건이 아닐까?

 

 

3. 총평

 

본문은 오장원 대치를 예로 들어 공명의 군략을 평가했는데, 생각해본다면 오장원에서의 공명 역시 위에서 언급한 작전들을 다 구사해봤을 수도 있다.(단지 기록에 남지 않았던 것일 수도.......) 다 해봤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장기전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밝혀둘 것은 분명 공명의 통솔적 측면, 즉 전술적 능력은 우수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림을 잘못 그렸다. 공명의 군략은 서북지방에 대한 경략이었고 그에 따른 전술은 필연적으로 장기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제비츠가 지적한 것처럼 군략의 수립과 더불어 전쟁의 목표는 최우선적으로 적의 전투력 격멸에 주를 둬야 한다. 하지만 사서에서 보여지는 공명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따지고보면 이런 말들은 다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결과로 나타난 공명의 군사학에는 기동성과 대담성이 부족했고, 일반적으로 그것이 궁극적인 북벌의 패인으로 비판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명의 군략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지양해야 되지 않을까?

 

단순히 약한 촉의 군세로 위나라를 긴장시켰다는 이유만으로는 말이다. 더욱이 1차 북벌처럼 최상의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도 군략적 판단의 실패로 한순간에 북벌 전체를 날려먹은 걸 보면,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공명을 삼국시대 최고의 군략가란 칭호로 부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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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5034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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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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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백랑

2013.08.12
14:54:41
(*.233.63.81)
예전에 쓴 글이고,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현재 제 견해와 다르지 않기에, 관련 논점이 나와서 제 견해를 정립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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