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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에 앞서

 

오랜만에 작성하는 시리즈 게시물입니다.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이란 제목으로 삼국지 갖가지 사건들 중에서


나름대로 제가 역사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을 선정하여 그에 따른 분석과 고찰을 해보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이건 딱히 토론글이 아니므로


감상이든, 반론이든 자유롭게 댓글로 의견개진하시면 되겠습니다.

 

 

 




 


첫번째는 손권의 적벽대전 결단입니다(동영상은 진삼6 오나라 스토리의 영상으로 루리웹의 LEE MEET님이 번역하신 걸 출처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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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조의 남정

 

건안 13년(208) 원가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평정한 조조는 마침내 대대적인 남정을 개시한다. 이미 업에 현무지란 큰 연못을 만들어 수군을 조련시키고 있던 그의 목표는 당연히 형주의 유표와 강동의 손권이었고, 지리적 위치상 그의 칼끝은 형주의 유표에게로 먼저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 유표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 유기와 차남 유종이 그들이었다. 유표는 유종에게 자기의 후처 채씨의 조카딸을 맞이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채씨는 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미워하게 되었고, 유표의 처제 채모와 생질 장윤이 나란히 유표에게 총애를 얻으면서 유기를 험담, 유종을 칭찬하면서 형주의 후계자 자리를 장남에게서 차남으로 넘기려는 모략을 꾸미게 된다.

 

강하, 남군, 장릉의 태수를 두루 지내고 진남대장군군사로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채모가 유종을 밀고 있었다면, 당시 형주의 식객으로 신야와 번성에 자리잡아 조조를 견제하고 있던 유비는 장남 유기의 후원자였다. 이렇게 후계문제를 둘러싼 양 집단간의 갈등이 점차 본격화되던 시기에 조조는 때를 맞춰 남정을 개시했고, 설상가상으로 형주의 정신적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유표마저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렇게 세력이 분열된 형주는 무적의 군단을 거느린 조조의 상대가 아니었다. 유기를 강하태수로 좌천시키고 유종을 옹립하는 데 성공한 채모와 장윤이었지만 조조의 대군이 신야에 이르자 대항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유종은 괴월과 부손의 권고에 따라 항복을 결정함으로써 형주는 유표 사후 1달만에 조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2. 손권과 유비의 연합

 

손권의 모사 노숙은 대국적인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유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노숙은 곧장 손권에게 달려가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형주는 우리나라와 인접해있고 강산이 험준하고 견고하며 비옥한 들은 만 리이고 병사와 백성들은 많고 부유하니, 만약 이곳을 점거하여 소유하면 이는 제왕이 되는 자산입니다. 지금 유표가 막 죽었고 두 아들은 협력하지 못하며 군대 안에 있는 제장들은 각각 이쪽과 저쪽 편에 있습니다. 유비가 천하의 효웅이지만 조조와 틈이 생겨 유표에게 기탁하여 살고 있으나 유표는 그의 재능을 싫어하여 기용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유비가 저들과 마음으로 협력하여 상하가 가지런히 하나가 된다면 의당 안무하여 더불어 맹세하고 우호관계를 맺어야 하며, 만약 떨어져서 서로 어기고 있으면 의당 개별적으로 그들을 도모하여 큰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저 노숙은 청컨대, 명령을 받들어 유표의 두 아들을 조문하고 아울러 그의 군대 안에서 일을 주관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유비에게도 유세하여 유표의 무리를 안무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조조를 다스리자고 하면 유비는 반드시 기뻐하며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흡족하게 된다면 천하는 평정될 수 있습니다. 지금 속히 가지 않으면 조조가 앞서 처리할까 두렵습니다."

 

이는 당시 정국을 정확하게 분석한 명쾌한 통찰이었다. 이미 대륙의 2/3을 움켜쥔 조조에게 대항하는 방법은 분열상태에 빠진 형주의 세력을 흡수하는 수 밖에 없었고 노숙은 그 방안으로 유비를 지목했다. 유비는 비록 세력은 약했으나 지난 수년간 조조에게 꺾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대항하던 유일한 인물이었고 형주 내에서의 신망 역시 대단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손권은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를 형주로 파견했다. 하지만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노숙이 유비를 활용하여 형주의 세력을 규합하기도 전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당양의 장판에서 패배, 하구로 도망쳐 유기와 합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숙은 하구에서 유비를 만나 동맹을 제의했고 유비는 이를 수락하면서 제갈량을 사자로 파견하여 손권을 찾아보고 자신의 뜻을 전하게 된다.



 

3. 조조의 항복권고와 손권의 고민

 

노숙과 함께 강동으로 간 제갈량은 시상에서 손권과 만나 유비와의 연합을 제의한다. 그의 능란한 화술에 손권 역시 마음이 움직여 유비와의 연합을 결심하려 할 때쯤, 조조에게 한통의 편지가 당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래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죄지은 자를 처벌했고 군기가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이 손을 모아 항복했소이다. 지금 수군 80만 명의 무리를 다스려서 바야흐로 장군과 함께 오(吳)에서 만나 사냥하려고 하오."

 

이는 지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손가를 멸망시켜버리겠다는 명백한 군사적 위협이였다. 손권이 굳은 얼굴로 편지를 신하들에게 보이자 장내는 순식간에 술렁이며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곧 두려움과 불안의 기색이었다. 조조의 권고를 받은 오의 여론은 2갈래로 나뉜다.

 

조조의 침공에 대항해 싸우자는 주전론과 권고를 받아들여 항복하자는 항복론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주전론을 외치는 사람은 노숙과 제갈량 뿐이었고 대다수의 모사들은 항복을 권유하고 있었다. 손권 역시 앞서 제갈량에게 다짐할 때와는 달리 선뜻 결전을 외치는 것에 주저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손권은 조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고 실제로도 그럴 만한 저력이 있었다.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손견과 강동의 소패왕이라 불리던 손책으로부터 이어진 손가의 유지 역시 싸움 한번 없이 굴복하기에는 너무나 긍지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손권은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주저하게 했는가? 

(http://blog.naver.com/begagi/50150281605 참고)


 

(1) 압도적인 조조의 군세

 

조조는 유종의 항복으로 형주의 전력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흡수했다. 유표는 이미 200년 경에 형주일대를 모두 평정하면서 갑병 10여만에 영토가 사방 수천 리에 이르는 탄탄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는 손가의 세력과 비교해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손책 사후 손권은 수차례 황조를 공격하면서도 끝내는 강하를 점령하여 형주병합의 전초기지로 삼을 수 없었다. 그만큼 형주의 전력은 막강했는데 조조는 한번의 남정으로 싸움 한번 없이 형주를 병합, 그의 대규모 군단은 오림으로 진출하여 대대적인 도하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구보다 형주의 전력을 잘 알고 있던 손권은 자연스레 조조의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조조의 병력은 80만이었고, 자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정보에 따르면 보병과 기병을 합쳐 수십만에 형주수군 전함(몽충+투함) 수천대였다. 반면에 자신의 병력은 기껏해야 10만 안팎에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 내외였다.


 

(2) 오나라 특유의 호족체제

 

후한의 지방행정은 어디에나 그러했겠지만, 특히 손권이 자리잡은 오&월 지방은 다른 어느 곳보다 지방색이 강한 지역이였다. 오나라 4성이라 불리는 4개의 씨족을 중심으로 토착민들의 기득권이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었고 형 손책의 죽음을 계기로 손권은 호족들과의 협력을 중시하여 최대한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었기에 강동 전역에 손권 자신의 치세가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는 곧 오나라 특유의 병제인 세병제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호족집단들이 자신의 세력과 능력에 맞게 사병을 보유하는 것을 허락하는 제도로서 평시에는 자기 고장을 지키고 있다가 전시에 중앙으로 집결하여 손가의 지휘를 받는, 말하자면 일종의 봉건적 체제였고 이런 측면에서 손권이 속한 손가는 강동에 자리잡은 여러 호족집단의 맹주에 지나지 않았다.

 

호족들이 저마다 결전을 반대하여 군사차출을 거부한다면 손권으로선 조조와의 전투에 온힘을 집중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이는 적벽대전에서 동원할 수 있는 5만의 병력 가운데서 3만만이 참여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3) 조조와의 인척관계

 

외부적으로 손가와 조조는 인척관계였다. 손책이 생존하던 시절, 당시 원소와 맞서고 있던 조조는 빠르게 강동을 제압하고 중원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소패왕을 두려워하여 조조의 동생의 딸을 손권의 동생 손광에게 시집보내고, 손견의 조카 손분의 딸을 조조의 삼남 조창의 며느리로 삼았었다.

 

이는 조조에게 항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4) 시세의 흐름

 

208년은 분명 시세의 흐름이 조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조조는 천자를 옹립한 채, 모든 전쟁들에서 조정의 뜻을 내밀어 명분을 획득하고 있었고 원가를 멸망시켜 대륙의 절반을 획득하여 대륙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조조의 압도적인 행보 앞에 서량의 마등은 귀순하여 마씨 일가가 업에 머물고 있었고 익주의 유장은 조조의 협력요청에 응하여 손권 토벌에 필요한 물자와 군사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상 대륙의 모든 세력이 자신을 적으로 돌린 상황에서 손권은 항복이냐 / 결전이냐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었던 것이다.

 



4. 손권, 결전의 탁자를 베다!

 

망설이는 손권의 결심을 굳힌 것은 노숙과 주유의 격려였다.특히 주유는 정확한 정세분석과 통찰력으로 조조를 이길 수 있는 4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http://blog.naver.com/begagi/50150305605 참고)

 

1) 북쪽 땅이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아 마등과 한수가 배후의 위협으로 자리잡고 있다.

2)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 꼴(=말먹이풀)이 적어 그들의 장기인 기병력을 잘 활용할 수 없다.

3) 중원에서 온 병사들은 강남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장기간 주둔하면 반드시 병이 날 것이다.

4) 손오의 장기는 수전인데, 익숙치 않은 수전으로 도전해오는 조조의 선택은 옳지 못한 전략이다.

 

주유는 이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은 다만 조조의 편지에서 말하는 수군과 보병이 80만 명이라는 것을 보고 각기 두려워하고는 다시 그 허실을 헤아리지 않고 편의대로 이것을 논의한 것이니 심각하게 말할 것이 못됩니다. 지금 사실대로 이를 따져보면 저들이 거느리는 중원의 병사는 15, 16만을 넘지 않으며 또 이미 오래되어 지쳐 있습니다. 획득한 유표의 무리 역시 최고로 쳐서 7,8만 명 뿐이지만 아직 의심하고 주저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무릇 피곤하고 병든 병사를 가지고 의심을 품은 무리를 거느리니, 무리의 숫자는 비록 많으나 두려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 주유가 정예의 병사 5만 명을 얻는다면 스스로 충분히 그들을 제어할 수 있으니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며 손권을 안심시키고 결전을 촉구한다.

 

이에 대한 손권의 결단은 조조와의 결전이었다. 세병제의 영향으로 주유가 요구한 5만 명의 군사를 확보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항복론이 우세한 강동의 여론 속에서도, 시세의 흐름을 타고 있는 조조의 행보 앞에서도 손권은 결국 자신과 동료들의 힘을 믿고 결전의 의지를 표명했고 이는 곧 보검을 빼들어 책상 모서리를 베는 행동으로 뒷받침되어 적벽대전에서의 승리로 이어지게 된다.



 

5.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손권의 결단은 삼국지의 여러 사건들 중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든 역사의 결단이었다. 적벽대전을 계기로 조조의 혼일사해의 야망이 좌절되어 궁극적으로 삼국정립의 시대로 나아갔고, 주유는 조조의 세력이 주춤한 틈을 타 형주를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손가의 숙원인 형주병합의 기초를 제공했다.

 

또한 손권 개인에게 있어 의의깊은 것은, 비로소 적벽대전을 계기로 강동의 세력을 한손에 규합하여 본격적인 천하쟁탈전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전까지는 손가는 여러 호족집단들의 맹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적벽대전 승리를 계기로 강동의 지배자로서 손가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중원진출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로 나타난다.

(http://blog.naver.com/begagi/50150305331 참고)

 

분명 손권에게 있어 조조와의 결전은 참으로 피하고 싶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손권은 현명했다.

그를 손제리라 폄하는 범인들은 과연 그와 같은 상황에서 단호히 결전을 외칠 수 있었을까?

손권, 그는 분명한 삼국시대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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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5030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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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8.15
00:40:32
(*.131.108.250)
제가 이 부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5만밖에 동원 못하는 걸 알면서도 조조군 20만밖에 안 돼ㅋㅋ 라고 하는 주유와 노숙하고 주유에게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를 연발하면서 뭔가 저 어구가 상용구같이 느끼게 한 손권이라고나 할까요;;

아리에스

2013.08.15
10:47:04
(*.223.41.157)
적벽이 손권의 입지를 크게 성장시켰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54세의 명장이 자기보다 20살도 더 어린 자들에게 박살이 날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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