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은 루리웹 Leet Meet님의 영상을 편집했습니다)


1. 간웅, 궁지에 몰리다

 

219년 7월, 조조와의 한중공방전에서 승리한 유비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동안 마땅한 근거지도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던 방랑자 유비가 적벽대전 승리 이후 불과 10년만에 형초의 땅과 익주를 아우르는 대군벌로 성장, 마침내 자신과 동등한 지위로까지 올라와버린 것이었다.

 

분명 유비의 한중왕 즉위는 관도대전 이래로 줄곧 이어져 온 조조 우위의 천하향방을 180도 반전시킬 엄청난 사건이었다. 한중과 상용을 얻음으로서 중원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한중점령으로 인해 유비가 얻은 가장 큰 보물은 바로 명분의 획득이었다.

 

한중이 어느 땅인가? 그 옛날 고조 유방이 패업을 시작한 제왕의 영토가 아니었던가? 비록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고 위왕의 자리에 올라 漢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지만 아직까지 천하의 주인은 유씨였고, 천하의 주인으로서 다스림을 펼친 400년 전통의 후광은 아직까지도 백성들과 여러 충의지사들의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구보다도 명분과 전통의 힘을 잘 알고 있던 조조로선 그러한 유비의 행보가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기반 자체가 뿌리채 뽑힐 수도 있는 상황....... 이런 흐름 속에 형주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한중왕의 의제이자 지혜와 용맹을 갖춘 만인지적의 명장 관우가 형주전역 제압을 위해 북상하여 조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조조는 직감했다. 관우의 중원진출은 자신의 명운을 가르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 유비의 기세를 꺾어놓지 못한다면 원소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처참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더욱이 이미 자신은 인생의 황혼기에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 조조에게 있어 더 이상의 실패는 용납할 수 없었다.

 

2. 격동의 시기

 

당시 유비의 기세는 욱일승천하고 있었다. 더욱이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립된 유비&손권 동맹은 얼마간 잡음이 있긴 했지만 유비의 형주3군 반환으로 다시 정상화되어 표면적으로는 돈독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한중에서의 패배로 군사적 공백기가 생긴 조조의 틈을 노려 유비의 한중왕 즉위 이후 손권은 곧장 합비를 공격하여 재차 중원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한 관우의 형북진출.

 

손권의 합비진출과 관우의 번성공격이 사전에 합의된 유비&손권 동맹의 결과물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으나 양 세력의 동시공격으로 인해 가뜩이나 한중에서의 패배로 위축된 조조가 더욱 궁지에 몰렸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처하는 조조의 해답은 재빠르고 명확했다.

 

[주력군을 형주에 동원하여 관우의 진출을 막는다!]

 

아직까지 합비에는 장료가 건재하고 있었고 진등-유복-온회로 이어지는 통치기간 회남의 방위력은 착실히 증강되어 여러 군진들이 손권과의 국경지대에 포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더욱이 결정적인 것은 합비를 재차 공격한 손권의 공세가 생각보다는 위협적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조조는 손권의 능력상 빠른 기간 안에 회남을 석권하고 중원으로 진출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온회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건안 24년(219),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는데 이때 각 주에서는 모두 병사를 변방지역에 주둔시켰다. 온회가 연주자사 배잠에게 말했다. "이곳에 비록 도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걱정거리는 못됩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남방을 정벌하는 군사에게 변고가 잇는 것입니다. 지금 장마로 인해 강물이 불어났고 조자효(=조인)의 군대는 적진 깊숙히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니, 관우는 용맹하고 전쟁을 잘하여 승기를 잡아 진군해오면 반드시 나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관우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명장이었고 더욱이 조인은 상용에 주둔한 맹달과 유봉의 위협도 동시에 받고 있던 터라 구원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위태로운 형주의 상황은 어떻게 보면 조조에게 있어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효과적으로 관우의 공격을 분쇄한다면 한참 치솟는 유비의 기세를 꺾어뜨려 다시 한번 시대의 흐름을 자기에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물론, 한중전에서의 패배로 술렁이는 민심을 달래 내부체제를 다시 한번 단단하게 결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이렇게 마음먹은 조조는 다시 한번 대규모 병력을 준비한다. 자기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고 아직까지 천하의 추세는 조조의 위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관우의 공세를 원천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휘자로 조조는 우금을 선택했다. 거병 초기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며 숱한 전공을 세운 역전의 명장....... 분명 우금에게는 조조의 의중을 이해하고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할 능력과 경력이 있었다.

 

3. 진동하는 관우의 위세와 수도 이전을 고려하는 조조

 

우금을 대장으로 무려 일곱갈래의 병력을 파견한 조조는 관우의 공격을 초기에 분쇄시킬 생각이었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계속되는 장마로 한수가 넘치면서 우금을 비롯한 칠군이 모조리 물에 잠겼고 방덕이 죽고 우금이 사로잡히는 최악의 대패를 당한 것이었다. 우금이 거느렸던 7군 병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지만 권중달 교수의 주석에 의하면 대략 10만 1천5백에 가까운 대군이었다(고대의 병제에 의하면 5사(師)를 1군이라 하는데, 1사는 2천5백명이므로 1군은 1만2천5백명이다. 여기서는 7군이라고 했으므로 10만1천5백명이 된다).

 

관우는 이 한번의 승리로 조조의 구원군을 완벽하게 격퇴했고 포로와 군마 수만을 획득하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기세를 탄 관우는 재차 별동대를 파견하여 양양을 포위하고 자신은 직접 본군을 이끌고 번성을 포위하여 조인을 압박하게 되는데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은 모두 관우에게 항복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의 전개는 조조 개인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고 관우란 존재는 위나라 체제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조조는 황제와 함께 수도를 하북으로 옮겨 관우의 예봉을 피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조조의 판단은 외관상 너무나 성급해보였다. 비록, 우금의 칠로군이 대패했지만 아직까지 조인은 번성에서 버티고 있었고 조조에게는 추가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얼마든지 있었다. 더욱이 완에 주둔하고 있던 서황이 재빠르게 출격하여 조인의 구원세력으로서 번성 북쪽 양릉피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조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 이전이란 극단적인 대책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난세의 간웅 조조를 그토록 몰아붙였을까?

 

(1) 漢 우호세력들의 반란 가능성

 

비록 헌제가 허수아비 황제라고는 해도 명분과 귄위적인 측면에 있어 황제가 가지는 파급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조조를 부정하고 漢에 의한 통치를 노리는 반란세력들에게 있어 황제는 그야말로 좋은 결집체였기 때문에 그러한 세력들이 관우에 호응하는 것을 방지하고 내부불순분자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분란의 씨앗인 황제를 자신의 본거지인 하북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도 한중공방전 1년 전에 경기의 반란이 허도에서 일어났었고, 우금의 패전 이후 위풍의 반란이 본거지 업에서 일어나 수천명이 죽고 공신 종요마저도 연좌되어 면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같은 내부체제에 대한 반기는 조조의 수도이전 결심을 더욱 다그쳤을 것이다.

 

(2) 민심이탈에 따른 소요 우려

 

218년 10월에 완의 수장 후음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남양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번성에 주둔한 조인의 군사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느라 요역에 봉사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후음이 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후음의 반란은 한창 한중공방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219년 정월까지 이어졌는데, 조인이 2개월여만에 완을 도륙하고 후음을 참수하여 반란을 진압한 사실이 있었다.

 

더욱이 우금의 패전 이후, 육혼의 백성인 손랑 등이 반란을 일으켜서 현의 주부를 죽이고 남쪽으로 가서 관우에게 귀부하자 관우는 손랑에게 도장을 주고 병사를 주니 그들은 돌아가서 구적이 되었는데, 허도 이남에서부터 관우에게 호응을 하니 관우의 위세가 화하를 진동시켰다는 기록을 참고해보더라도 당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형북지역의 민심이탈은 꽤나 심각했고 그것의 여파는 황제가 있는 허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3) 허도의 지리적 특징

 

(1),(2)의 요인이 결합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허도의 지리적 특징이었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번성일대는 황제가 있는 허도와 너무 가까웠다. 애초에 제갈량은 융중책에서 유비에게 천하를 통일할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설명하는데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이끌고 진천으로 출병하신다면 단사호장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이 이루어지고 한실은 흥할 것입니다.]

 

제갈량의 말처럼 현재 관우가 공격하고 있는 형북지방은 허도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사정권 내에 있었다. 지금은 조인이 잘 버티고 있었지만 끝내 관우에게 무너져 형북이 유비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공산이 있었다. 명분을 앞세운 유비의 공세에 허도 주위의 재야인사들이 봉기하고 사예 일대의 백성들이 호응한다면 이는 예전 완에 주둔하여 허창을 노렸던 장수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위협과 혼란으로 성장할 것이었다.

 

4. 사마의와 장제의 진언

 

이같이 암울한 정황 속에서 조조는 수도이전이라는 극단적인 대안을 취한다. 이미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가던 터라 젊은날의 패기와 열정이 사라진 탓이었을까? 수도이전은 결국 한중에 이어 형북지방에서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는 한창 치솟고 있는 유비의 기세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의 위기는 극복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같은 조조의 선택은 결국 위를 몰락시키는 결정적인 자충수가 될 공산이 컸는데, 그러한 조조의 정신을 일깨워준 건 사마의와 장제의 진언이었다. 당시 승상부 군사마였던 사마의와 서조속 장제는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우금 등은 홍수로 매몰된 것이지 전투와 공격의 실수는 아니어서 국가의 큰 계획으로 보면 아직은 족히 손해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비와 손권이 겉으로는 친한 것 같지만 안으로는 소원하니 관우가 뜻을 펴는 것을 손권이 반드시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서 손권에게 권하여 관우를 공격하게 하고 형주를 나누어서 손권에게 책봉하겠다는 것을 약속하면 번성의 포위는 절로 풀릴 것입니다."

 

실로 번뜩이는 혜안과 통찰력이었다. 그들은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 손권의 불협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형주분할을 계기로 다시 돈독하게 맺어진 관계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손권은 장강 상류에 걸터앉은채 형주 전역을 겸병할 생각을 품고 있는 관우를 껄끄러워했고, 관우는 관우대로 익양대치를 일으켜 동맹국을 공격하고도 뻔뻔하게 혼담을 요구하는 손권을 불신했다.

 

하지만 유비와 손권은 조조라는 거대한 적 앞에 협력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손권은 조조의 적극적인 공작이 있기 전에는 합비를 통한 회남방면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형주공략을 진언하는 여몽에게 "일단은 서주를 빼앗고 그 뒤에 상황을 봐서 관우를 공격하자"라고 답하는 손권의 모습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조는 역시 날카로웠다. 비록 형주의 대부분을 손권에게 내주는 한이 있어도 형주일대에서 관우의 군세를 지워버리는 것이 앞으로의 전략적 운용에서 더 낫다고 판단한 그는 사마의와 장제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손권과의 동맹을 시도, 마침내는 손권과 맹약을 맺는 것에 성공하여 오나라의 형주 뒤치기를 이끌어낸다.

 

5. 추후의 결과



 (동영상은 루리웹 Leet Meet님의 영상을 편집했습니다)


 

조조의 이 현명한 결단은 사실상 삼국지의 미래를 결정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관우는 손권의 기습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굳건하게 유지되던 유비&손권 동맹은 무참하게 박살나 유비가 대군을 몰고 이릉으로 진격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유비는 이릉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목숨을 잃고 제갈량은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시키고자 손권과의 동맹을 부활시키고 내치에 주력하게 되지만 이미 시대적 흐름은 위나라로 확실하게 넘어간 뒤였다.

 

촉의 입장에선 익주 하나만으로는 국력에서 월등한 위나라를 뒤엎기 힘들었고, 의지만큼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 손권은 비록 광활한 형주의 영토를 손에 넣었지만 조위에게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219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만일 조조가 애초의 계획대로 수도를 이전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손권과의 맹약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혼자만의 힘으로 형북에서의 방위를 노렸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조조는 인생의 황혼기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현명한 결단으로 죽어서도 삼국관계에서의 위의 우세를 잃지 않고 지켜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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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5029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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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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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평화

2013.08.17
04:46:57
(*.129.54.218)
최근에 백랑님 쓰신 주유가 손권에게 정세 판단 후 간언하는 내용 와 사마의와 장제가 조조에게 한 간언을 보면 이런 두 경우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마의와 장제의 간언은 거기다가 군사를 활용하지 않은 전략 상의 한 수 였기 때문에 저는 "부전승" 사상에 의거 최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촉오 동맹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세판단을 정확하게 짚어낸 점에서 그렇구요. 결과적으로 손도 거의 안대고 양쪽에게 최악수를 두게한 점에서도 이것은 정말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결정을 한 조조 앞서 주유 얘기하신 손권의 결정 (물론 촉이 실익을 얻어간 점은 있으나...) 둘 다 지휘관, 군주로서 부하의 간언에 귀기울이고 검증하고 채택하려던 점에서 두 결정 역시 높히 평가합니다.

여담으로 글 쓰시는 스타일을 좀 바꾸신 것 같은데 이런 스타일도 참 잘쓰시네요. 법학개론 들을 때 교수님께서 시험 답안을 사실 예전에 쓰시던 스타일로 쓰게 하셔서 저는 그런대로 그런 스타일도 익숙해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중간 중간 소설같은 문체에 앞 뒤 적절하게 정사 내용 이어지니 더 좋네요. 나중에 정리하셔서 책쓰셔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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