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序

 

우리가 아는 三國志는 대략 황건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삼국의 마지막 왕조 오나라가 멸망한 280년까지 약 100여년에 걸친 역사를 말한다. 아무래도 분열시기 역사답게 사건, 사고가 많은 시대였는데 본문에서는‘정사’를 기반으로 사서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불가사의라고 할 만한 기록들을 뽑아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다섯 번째로 선정된 사건은 진궁이 조조를 배반한 사건이다.

 

 

2. 진궁, 연주를 여포에게 바치다

 


untitled_tjsry4165.png

 

 

(1) 진궁이란 인물은 누구인가?

 

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하고 진류로 도주하는 길에서 만난 뒤, 여백사 사건을 통해 실망하고 떠나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진궁은 처음부터 조조의 수하였다. 그것도 단순한 수하가 아니라 꽤나 신임 받는 모사의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무제기(조조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

 

[무제기]

 

유대가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더불어 싸웠으나 과연 죽임을 당했다.

 

(이에 대한 세설신어 배주의 내용)

 

유대가 죽고 난 후 진궁(陳宮)이 태조에게 말했다,

 

“지금 주(州)에 주인이 없고 왕명(王命)이 단절되었습니다. 저 진궁이 가서 주(州) 사람들을 설득케 하시고, 명부(明府-주목, 태수 등에 대한 존칭)께서는 뒤이어 와서 주목에 오르시어 천하를 거두는 데 바탕으로 삼으십시오. 이는 패왕(霸王)의 업(業)입니다.”

 

진궁이 (연주의) 별가, 치중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었는데 주(州)에 주인이 없소. 조동군(曹東郡-동군태수 조조)은 명세지재(命世之才-세상을 바로 잡을 인재)이니 만약 그 분을 맞아들여 주목으로 삼는다면 필시 생민들을 평안케 할 것이오.”

 

포신 등이 또한 이를 옳다고 여겼다.

 

------------------

 

이것이 사서에서 나오는 진궁의 첫 등장이다. 당시 진궁의 직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조조에게 직접 간언할 수 있는 위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건 결과 조조는 황건적을 무찌르고 유대를 대신하여 연주목에 올랐으며 그가 천하 대부분을 제패하는 데 큰 힘이 된 청주병을 편성하게 되니 진궁에 대한 그의 신임은 두터워졌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진궁은 훗날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는 사이 배반하여 여포에게 투항한다. 그것도 단순한 배반이 아니라 근거지를 통째로 여포에게 바침으로써 조조를 멸망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것이다. 아마 이때가 조조 생전 가장 힘들고 위급했던 순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어째서 진궁은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에게 투항했을까?

 

 

(2) 사서의 기록

 

진궁이 조조를 저버리고 여포에게 간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불가사의한 일로 평가되고 있다. 여포가 누구인가? 정원과 동탁을 차례로 저버린 배신자의 대명사가 아니었던가? 반면에 조조는 동탁에게 대항하고, 황건적을 토벌하는 등 여러 모로 사람들의 신망과 명분을 얻고 있던 떠오르는 신진 세력이었다. 연의에서야 여백사 사건이라는 큰 계기가 있었지만 역사에서는 그러한 일이 없는 만큼 진궁이 조조를 배신한 이유에 대해서는 갖은 추측이 돌고 있다. 일단 사서에서는 진궁이 배신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여포전]

 

태조가 진궁을 사로잡았을 때, 그의 노모와 딸을 살려야 할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물었다. 진궁이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 하고 사해(四海)에 인(仁)을 베푸는 자는 남의 제사를 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노모의 일은 공에게 달려 있을 뿐 제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태조가 명을 내려 그의 노모를 죽을 때까지 보살피게 하고 그의 딸을 시집보내 주었다.

 

(이에 대한 배주로 딸린 전략의 기록)

 

진궁(陳宮)의 자는 공대(公臺)이고 동군(東郡) 사람이다. 강직(剛直) 열장(烈壯-장렬)하고 어려서 해내(海內)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과 모두 서로 연결(連結-교우)했다. 천하에 난이 일자 처음에는 태조를 따랐는데 그 뒤 스스로 의심을 품고 여포를 따랐다.

 

------------------

 

단지‘스스로 의심을 품었다’라는 짤막한 구절로 진궁의 심경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 의심을 품은 이유와 내용은 무엇일까? 다음의 목차에서 살펴보자.

 

 

3. 진궁이 배신한 이유

 

(1) 원소위협설

 

조조는 낙양에 있을 때부터 원소와 한 배를 탄 몸이었다. 아니, 냉정하게 말하자면 원소의 부하장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동탁연합 시절에는 독자적인 군웅의 자격으로 참가하지 못하고 분무장군직을 대행했는데 이는 정황상 연합의 맹주인 원소를 보좌하는 직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조가 완연히 원소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것은 장안에서 도망친 황제를 옹립하고 허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원소의 그늘에서 함께 원술에 대항했으며 여포의 기습으로 연주를 잃은 직후에는 원소의 권유를 받아 가솔들을 업으로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진궁이 조조를 배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처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바로 원소위협설이다. 이 주장은 여포전에 나오는 장막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 여포전을 살펴보자.

 

-------------------

 

[여포전]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태조는 장막과 함께 앞서서 의병을 일으켰고 변수(汴水) 싸움에서 장막은 위자(衛茲)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태조를 뒤따르게 했다. 원소가 맹주가 된 후 교만하고 자만하는 기색을 띄자 장막은 정의(正議)로써 원소를 질책했다. 원소는 태조에게 장막을 죽이도록 했는데, 태조는 이를 거절하며 원소를 질책하며 말했다.

 

“맹탁은 친한 벗이니 옳든 그르든 마땅히 용납해야 하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했으니 서로 해쳐서는 안되오.”

 

장막을 이 일을 알고 태조를 더욱 덕으로 대했다. 태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할 때 그 집안 사람들에게 이르길,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맹탁에게 가서 의지하라.”

 

라고 하고 그 뒤 돌아와 장막을 만나서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대하니 그 친밀함이 이와 같았다.

 

여포가 원소를 버리고 장양을 좇으려 할 때 장막에게 들렀는데, 서로 헤어질 때 손을 잡고 맹세하니 원소가 이 일을 듣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장막은 태조가 끝내 원소를 위해 자신을 해치리라 생각하고 내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

 

이를 토대로 원소위협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조조의 세력은 원소에 종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독자적으로는 살아남을 길이 없어 원소와는 별개의 인물인 여포에게 의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막과 진궁의 입장을 구별하지 않은 데서 온 오류라고 생각한다. 해당 기록을 볼 때 장막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에게 붙은 것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정작 장막에게 배신을 권유한 진궁의 속내를 설명할 수가 없다.

 

진궁은 원소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도 아니었고, 조조의 신임을 잃은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궁이 장막을 위해 조조를 저버릴 만큼 장막과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따라서 필자는 원소위협설을 배척한다.

 

 

(2) 출세설

 

진궁 개인의 영달을 위해 조조를 저버렸다는 주장이다. 진궁이 비록 조조를 섬기면서 모사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그 후 순욱, 순유, 정욱과 같은 뛰어난 모사들이 대거 합류함으로써 조조 진영에서 입지가 밀릴 것을 걱정하여 새로운 주인을 찾아 나섰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본다면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근거가 부족하다. 역시 여포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

 

[여포전]

 

흥평 원년(194년), 태조가 다시 도겸을 정벌하자 장막의 동생 장초(張超)는 태조의 장수 진궁(陳宮), 종사중랑 허사(許汜), 왕해(王楷)와 함께 태조에게 모반할 것을 공모했다.

 

진궁이 장막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웅걸(雄傑)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천하가 나뉘고 무너졌습니다. 그대는 천리에 걸쳐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사전지지(四戰之地-사방으로 적의 공격을 받는 땅.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으니 칼을 움켜쥐고 노려본다면(撫劍顧眄) 또한 족히 인호(人豪-인걸, 호걸)가 될 만합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남에게 제어당하고 있으니 비루하지 않습니까! 지금 연주는 군사들이 동쪽을 정벌하느라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壯士)로 싸움을 잘해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善戰無前) 만약 잠시 그를 맞아들여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천하 형세를 관망하며 시사(時事)가 변통(變通)하기를 기다린다면 또한 한 시대를 종횡할 수 있습니다.”

 

장막이 이를 좇았다.

 

당초 태조는 진궁에게 군을 이끌고 동군(東郡)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는데 마침내 그 군사들로 동쪽으로 여포를 맞아 연주목(兗州牧)으로 삼았다. 군현(郡縣)이 모두 호응했고 다만 견성(鄄城), 동아(東阿), 범(範)현만이 태조 편에 남아 수비했다.

 

-----------------

 

이상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조는 도겸을 토벌하기 위해 본거지를 비우면서 진궁에게 동군을 맡긴다. 동군이 어디인가? 조조가 동탁토벌 이후 정식으로 태수가 되어 부임한 세력의 본거지였다. 본래 본거지를 수비하는 임무는 가장 신임하는 인물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볼 때(유비의 제갈량과 조조의 순욱을 생각해보자) 진궁에 대한 조조의 신뢰는 보통이 아니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아마 조조는 진궁이 자신을 배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진궁이 다른 모사들에게 밀려 입지를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정황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배신하지 않았다면 순욱, 순유의 역할을 진궁이 맡을 수 있지도 않았을까? 따라서 필자는 출세설 역시 배척한다.

 

 

(3) 실망설

 

진궁이 조조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실망하여 그를 배신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실망설이다. 필자가 가장 신뢰하는 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진궁은 조조에게 실망하게 됐을까? 그것은 바로 서주대학살 때문이다. 조조는 연주를 얻은 뒤 낭야에 있던 부친(=조숭)을 자신의 영지로 모셔오게 했는데, 그 와중에 조숭은 서주를 지나다가 도겸의 부하에게 목숨을 잃는다. 이에 분노한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여 10여 개에 달하는 성을 떨어뜨렸고 연주로 돌아오는 길에 5개 현을 약탈했는데 사서의 기록을 보면‘죽은 자가 십만에 달했고 닭이나 개도 남아나지 않았으며 시체가 사수를 막아 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 후 5개 현의 성곽에는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기록으로만 봐도 얼마나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두고 후세의 학자들은 조조의 악행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는데 이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았던 서주 근방의 호족들과 백성들의 충격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들 입장에서 조조는 동탁보다 더 잔인한 악마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는 진궁이 여포에게 투항하자 주위 군현들이 모두 호응했다는 기록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위에서 이미 인용한 여포전을 보더라도 연주의 모든 군현들이 조조를 배반했고 오직 견성, 동아, 범현만이 순욱과 정욱의 지휘 아래에 남아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배신자의 대명사인 여포에게 호응할 정도로 조조가 민심을 잃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바로 직전에 있었던 서주대학살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4. 결론

 

아무리 난세라고 하지만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는 사람들의 반발을 자아낸다. 이는 그 이전의 학살자들이 역사로서 증명한다.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생매장한 백기도 죽기 전에 자신의 업보를 후회했고, 초한쟁패기 시절 항우도 숱한 학살을 벌였다가 결국 민심을 잃어 유방에게 패배하고 만다. 조조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가 수많은 전쟁을 통해 천하 대부분을 차지하고, 둔전제 및 구현령 반포와 같은 선진적인 제도를 도입했으나 끝내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고 천하통일에 실패한 것은 서주대학살과 같은 만행으로 사람들에게 뿌리 깊은 불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훗날 하비에서 패배하고 조조에게 잡힌 진궁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조조가 진궁을 죽이기 전에 그의 늙으신 어머니와 딸들을 어찌해야할 지 물어보는 것에 대한 진궁의 대답이다.)

 

“제가 듣기로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고 사해(四海)에 인(仁)을 베푸는 자는 남의 제사를 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노모의 일은 공에게 달려 있을 뿐 제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진궁의 말이 참으로 묘하다. 얼핏 보면 단순히 조조의 인정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가솔을 살려줄 것을 부탁하는 말처럼 보이는데 그 말에는 왠지 뼈가 숨어있다.

 

진궁은 조조에게‘효와 인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준엄한 추궁인 것 같다. 즉, 진궁 자신이 조조를 배반한 속내가 바로 이 말 속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통해 인륜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저버렸다. 진궁은 마지막 길에 이를 지적하여 조조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앞으로는 서주대학살과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조조 역시 진궁의 마지막 말에 큰 깨우침을 얻었던지 형장으로 향하는 진궁을 울면서 전송했고, 그의 바람대로 진궁의 가솔들을 죽을 때까지 후하게 대우한다. 이것은 일종의 속죄이자 반성이 아니었을까?

 


lh blank rh
설문조사 종료일: 2023-09-30
blank
A : 진궁이 배신한 이유
blank
lb blank rb



-----------------------------

 

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78281904

 

 

조회 수 :
7580
등록일 :
2013.08.26
21:16:01 (*.233.63.81)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private_begagi/39911/83d/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39911

코렐솔라

2013.08.26
21:52:04
(*.166.245.166)
세어는 세설신어가 아니고 위진세어 로 알고 있어요.

전 개인적으로 나중에 원술하고 연결하는 걸 보면 2+ 3 약간?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마휘

2013.08.26
21:58:13
(*.234.26.150)
개인적으로 제목이 "그 까닭을 짐작하기 힘들다"를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불가해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망탁조의

2013.08.27
03:44:15
(*.250.43.215)
진궁은 공식적으로 조조가 의로운 선비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했네요.
조조에게 직언한 선비들 중에서 조조의 심기를 거슬린 애들을, 조조가 공융, 예형 죽이듯 제거했던 모양.

맘평화

2013.08.27
04:07:32
(*.129.54.218)
개인적으로는 3번이 가장 설득력있게 느껴지네요.

venne

2013.08.28
00:01:58
(*.149.56.36)
설득력있는 3번설이네요. 사견이지만 설문조사가 본문보다 먼저 위치하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4 오(吳)나라 멸망과 곽마의 반란 [5] 미백랑 2013-08-31 6707
23 마속과 제갈량의 북벌 : 작전참모 마속 [7] 미백랑 2013-08-30 4889
22 교주를 둘러싼 진나라(晉)와 오나라(吳)의 전쟁 [2] 미백랑 2013-08-28 5072
» 기타 삼국지 불가사의 사건 (5) 진궁, 연주를 여포에게 바치다 [5] file 미백랑 2013-08-26 7580
20 마속은 제갈량에게 엄청난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4] 미백랑 2013-08-22 4599
19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3) - 손권, 머리를 조아려 나라를 구하다! [2] 미백랑 2013-08-18 5136
18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2) - 조조, 천하의 대세를 결정짓다 [1] 미백랑 2013-08-16 4436
17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1) - 손권, 결전의 탁자를 베다! [2] 미백랑 2013-08-14 3970
16 제갈량 사후 위연과 양의의 대립 : 위연과 양의는 왜 싸웠을까? [21] 미백랑 2013-08-13 6509
15 북벌로 살펴보는 제갈량의 군략 (2) - 북벌 군략 '서북지방 경략' [1] 미백랑 2013-08-12 4064
14 북벌로 살펴보는 제갈량의 군략 (1) - 공명의 군략은 너무나 정직했다 [1] 미백랑 2013-08-12 5065
13 주유 남군 전투 고찰 : 주유는 단순히 강릉만 점령한 것이 아니다 [15] file 미백랑 2013-08-11 7194
12 주유가 1년 동안 조인과 싸운 것은 폄하될 일이 아니다 [18] 미백랑 2013-08-11 5465
11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 - 그의 이른 죽음이 아쉽다! [7] 미백랑 2013-08-10 4794
10 유비는 무슨 까닭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형주에서 도망쳤을까? [5] 미백랑 2013-08-09 4772
9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것은 헌제에 대한 배신행위다? [12] 미백랑 2013-08-08 4772
8 손권의 칭제와 제갈량의 절맹호의(부제 : 제갈량의 굴욕) [7] 미백랑 2013-08-08 4414
7 조조는 왜 '찬탈자'로 불리는 것일까? [8] 미백랑 2013-08-08 4646
6 기타 삼국지 불가사의 사건 (4) 서량의 금마초, 조조에게 반기를 들다 [9] file 미백랑 2013-08-06 7795
5 관우뢰 사건 : 관우는 기밀유지에 실패했다 [8] 미백랑 2013-08-04 5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