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화하는 천하의 추이

 

263년 11월, 촉한의 군주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했다. 천하의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삼국정립의 시대가 무너진 것이었다.

 

이는 촉한과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었던 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때문에 오의 군주 손휴는 분명히 조만간 닥쳐올 위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멸망한 촉한의 영토를 최대한 흡수하여 국력을 신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 육항과 보천, 성만으로 하여금 파동으로 진격하여 촉한의 영토를 확보하도록 명령했는데 위나라의 지원을 받은 촉한의 파동태수 나헌에게 막혀서 퇴각하고 만다.

 

가뜩이나 국력의 우위를 보이는 위가 촉한의 영토를 통째로 집어삼킨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오나라에 또 하나 악재가 발생했다.

 

263년 5월, 軍으로의 징용을 거부하며 교지군의 관리인 여흥 등이 모반하여 태수 손서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상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위나라가 촉한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여흥은 위나라에 귀부하여 병사와 관리를 요청했고 위나라는 이러한 여흥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를 사지절 도독교주제군사 남중대장군에 임명하게 된다.

 

물론, 나중에 여흥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지만 교주에 대한 위나라의 영향력은 지속되어 궁극적으로 교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교지가 위나라로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2. 교주를 탈환하기 위한 오나라의 공세

 

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아 새롭게 황제가 된 진의 사마염은 자신의 치세 동안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다시 하나로 병합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오나라 역시 이런 진나라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결전을 위해서라도 후방에 자리잡은 위협세력, 즉 교지에 주둔하고 있는 진나라의 군세를 소탕하여 전선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오나라는 수차례 양자강을 경계삼아 북방군대의 침입을 격파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과거와는 달랐다. 만일 진나라 대군과 형주와 양주에서 대치하고 있는 사이 교주에 있던 진나라 군대가 후방을 급습한다면 국력에서 떨어지는 오나라로선 전력이 분산되어 진나라의 맹공에 밀려버릴 공산이 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대적인 진나라의 침공이 개시되기 전에 교주를 탈환하여 후방의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먹은 오나라의 군주 손호는 268년 9월에 교주자사 유준, 전부독 수칙, 장군 고용으로 하여금 세 번에 걸쳐 앞뒤로 교지를 공격하게 했으나 진나라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진의 교지태수 양직은 효과적으로 오나라의 침공을 격파했는데 이를 본 울림과 구진의 군현들이 양직에게 귀부하게 된다.

 

이에 힘을 얻은 양직은 역공을 전개, 장수 모경과 동원을 파견하여 합포를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 오나라는 유준과 수칙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승전한 양직은 모경을 울림태수로, 동원을 구진태수로 삼아 새로 얻은 영토를 확보하고 전선을 재정비하여 분명히 있을 오나라의 재차 침공에 대비하게 된다.

 


3. 계속되는 오나라의 공세

 

비록 첫번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오나라로선 물러설 수 없었다. 때문에 첫 공격으로부터 1년만인 269년 11월에 손호는 재차 교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감군 우사, 위남장군 설후, 창오태수 도황을 파견하여 형주에서 육로로 출발하게 하고, 감군 이욱, 독군 서존은 건안에서 바닷길로 출발하여 양군이 모두 합포에서 집결한 뒤 교지를 공격하게 했는데 오나라의 재차 공격은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건안에서 출발한 이욱의 군대가 험난한 길 때문에 진군이 여의치 않자 길안내를 맡았던 장수 풍비를 죽이고 회군했던 것이다. 이를 본 손호가 분개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전중열장으로 있던 하정 역시 이욱과 서존의 죄를 탄핵하여 "소부 이욱은 마음대로 풍비를 살해하고 독단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왔습니다" 라고 진언하자 손호는 즉각 이욱과 서존의 가족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하는 동시에 도황에게는 계속 교지의 공격을 명하면서 교주를 반드시 탈환할 것을 당부한다.

 

※ 이후 기록을 종합적으로 살펴봤을 때, 손호는 합포에 모인 군단을 재정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위남장군 설후를 대도독으로 승진시켜 교지공략을 총괄시키는 한편, 창오태수 도황을 교주자사로 삼고 인근 군현들의 군세를 총동원하여 교지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4. 교지 탈환에 성공한 오나라

 

교지는 오와 진 양국이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진의 교지태수 양직은 이러한 오나라의 움직임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양직은 분명 수차례 표문을 올려 중앙에서의 구원군 파견을 요청했을텐데 이상하게도 진나라 조정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오나라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였다. 설후와 도황은 이러한 진의 내부사정을 간파하고는 합포에서 1년 가까이 머물면서 교지공략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갖춘다. 보급품을 정비하고 인근 군현의 군세를 총동원하여 궁극적으로 교지 공략에 동원한 병력은 총 10만.

 

이는 교주 일대에서의 진나라 세력을 완벽하게 분쇄시킴으로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고 향후 있게 될 양국간의 전면전에서도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노린 전략적인 한수였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끝에 공격에 나선 오나라는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271년 4월에 도황이 진의 구진태수 동원을 습격하여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즉각 양직은 장수 왕소를 파견하여 동원을 대신하게 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추는 되돌리기 어려웠다. 대도독 설후와 교주자사 도황은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식량과 원조가 끊긴 교지성은 마침내 그해 7월에 함락되어 양직과 모경이 포로가 된 것이었다.

 

도황은 모경이 용감하고 건장하여 살려주고자 했지만 모경이 도황을 죽이려고 꾀하자 마침내 그를 죽이게 된다. 특히 예전 전투에서 모경에게 죽은 수칙의 아들 수윤은 모경의 배를 산 채로 갈라 그의 간을 도려내며 이렇게 말한다.

 

"다시금 도적놈의 짓을 하겠는가?"

 

이러한 수윤의 일갈에 모경 또한 물러서지 않고 맞서면서 욕한다.

 

"너의 손호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네 아비는 어찌하여 개처럼 죽었는가?"

 

왕소는 도망하여 남중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붙잡았고 마침내는 구진과 일남이 모두 오에 항복함으로써 오나라를 교주를 온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손호는 대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도황을 교주목으로 삼았고 도황은 근방의 이민족들을 토벌함으로써 교주의 안정화에 주력하게 된다.

 


5. 어째서 진나라는 양직을 구원하지 않았는가?

 

교주 일대에서의 양국간 접전은 결국 오나라의 완벽한 승리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진나라는 양직을 구원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먼저 남중도독호군으로서 익주의 남방을 총괄하고 있던 곽익의 사망을 들 수 있다.

 

곽익은 곽준의 아들로서 유선에게 영창태수를 진수받은 후 줄곧 남중을 관할하고 있었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한 뒤에도 나헌과 같이 관할 군사를 보전하고 있다가 진나라에 귀부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곽익의 종전 벼슬과 직무를 인정하여 그에게 계속 남중의 일을 맡기고 총애와 대우를 더해줬는데 그런 곽익이 270년에 사망했던 것이다.

 

애초에 반란을 일으켰던 여흥도 남중도독호군 곽익을 통해 위나라에로의 귀순의사를 밝혔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오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기 불과 1년 전에 사망한 곽익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양직의 구원요청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알맞은 원조를 취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

 

둘째로는, 진나라가 아직은 오나라와 전면전을 취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염이 진왕조를 새롭게 열었지만 아직 내부정비를 완벽히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익주지방에서는 등애와 종회의 내분으로 인해 확고한 통치체제를 수립하지 못하고 있었고 서북지방은 계속적인 유목민들의 침략으로 인해 소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당시 진나라 조정에서는 오나라 정벌론이 대두되지 않았고 새 왕조의 기틀다지기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 떨어진 최남단 교지로의 군사력 투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오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왕준의 주함 건조가 272년에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279년 두예와 왕준이 대대적인 오나라 공격이 있기 전까지 양국 관계는 줄곧 오나라가 공세적 입장이었다.

 


6. 결론

 

어쨌든, 오나라는 교주를 재탈환함으로써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전선을 양자강 일대로 제한하여 촉한 멸망으로부터 20년을 더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교주는 추후 오나라의 멸망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재차 고찰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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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5030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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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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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8.28
14:28:18
(*.52.91.73)
사묵지 시리즈에서는 매번 찬밥이죠 ㅜㅠ 삼국지 10에서 이 사건 관련해서 인물들을 대거 추가해줬지만 그게 마지막

코렐솔라

2013.08.28
14:37:07
(*.52.91.73)
사묵지->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5분 지났네요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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