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에 앞서

(http://blog.naver.com/begagi/50150306218 참고)

 

촉한 멸망 이후 15년을 버틴 오나라의 운명도 풍전등화로 치닫고 있었다. 그동안 새 왕조의 기틀을 세우느라 오에 대한 전략에서 줄곧 수세적 입장에 처해있던 사마씨의 진이 마침내 반격을 개시하여 대대적인 오나라 정벌을 단행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 기록에서 보여지는 오나라의 마지막은 너무나 허무했다. 아무리 진나라와의 국력의 차이가 있었다지만 오나라는 삼국정립의 마지막 왕조였고 형주와 교주, 양주를 장기간 차지한 장강 이남의 강자였다. 하지만 오의 최후는 그러한 겉모습에 걸맞는 저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촉한의 최후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물론, 험준한 산악지형의 덕을 봤다지만 강유는 10만에 달하는 정벌군을 상대로 검각을 끝끝내 지켜내며 성도로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고 제갈첨 부자 역시 등애의 별동대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면죽에서 역사에 남을 항전을 보여줬다.

 

그러나 오나라는 어떠했는가? 두예와 왕준을 필두로 한 20만의 정벌군에 전투다운 전투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진나라의 정벌군이 출발한 것은 279년 11월이었고 최초의 전장인 강릉에 도착하여 전투를 벌인 시점은 다음 해인 280년 1월과 2월 사이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왕준의 수군이 건업에 당도하여 손호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시점이 다름아닌 3월.......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지 불과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에 진나라는 형주와 양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한꺼번에 평정하고 적의 황제로부터 항복까지 받아내어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것이었다.

 

분명 오나라의 전력은 이정도로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있었던 교주를 둘러싼 진과의 공방전에서도 10만의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군사력이 탄탄했고 멀게는 손권, 가깝게는 제갈각까지 마음만 먹으면 오나라가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0만에서 20만에 가까웠다.

 

아무리 손호의 폭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촉한의 산악지형 못지않은 장강의 험준함을 생각해볼 때 진나라의 이토록 빠른 쾌진격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아마 애초에 오나라 정벌을 계획한 사마염, 실제 전투지휘관이었던 두예와 왕준조차 자신들이 이토록 빨리 오나라를 멸망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나라는 이토록 맥없이 무너졌는가? 한번 당시의 상황을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2. 곽마의 반란

 

진나라의 교지태수였던 양직을 사로잡음으로써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오나라는 279년까지 줄곧 진나라에 대하여 공세적 입장을 취해왔다. 형주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오나라는 강릉과 이릉 일대를 중심으로 수차례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진은 이를 모두 방어해냈고 오나라 역시 소규모이긴 하나 형남으로 진출하려는 진나라의 공세를 잘 버텨내며 양국은 장강을 중심으로 한 전체적인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나라에 예기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279년 여름에 교주의 독장이었던 곽마가 동료인 하전, 왕족 등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반란이유는 예전의 여흥과 마찬가지로 군대로의 징집거부였고 이는 당시 오나라의 내부사정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오나라 황제 손호는 국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백성에 대한 안민보다는 개인의 향락을 추구했고 진나라에 대한 무리한 공세로 계속적인 군사력 누수를 경험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렇게 민심이 동요하고 있음에도 손호는 선정을 펼치라는 대신들의 간언을 잇달아 무시했고 백성들을 계속 군사로 징발하고 있었는데, 마침 손호가 교주와 광주(광주는 교주를 분할하여 새롭게 만든 주이다)의 호구를 조사하여 다시금 그 지역의 백성을 징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곽마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병한 곽마는 광주독 우수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그 무리를 흡수하는 동시에 교주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창오와 시흥까지 공격을 가하기에 이르게 된다. 상황이 악화되자 손호는 즉각 등수를 새로운 광주목으로 임명하여 곽마의 토벌을 명했는데 그러는 동안 곽마는 남해태수 유략을 죽이고 광주자사 서기를 축출함으로써 교주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통합하기 시작한다.

 

곽마 토벌을 명받은 등수는 즉각 1만명을 통솔하여 교주로 향하고 따로 서릉독 도준이 파견되어 휘하 병사 7천명과 함께 교주목 도황과 합세하여 곽마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는데 이렇게 오나라 군대가 바삐 움직이는 동안 그동안 수세에 몰렸던 진나라는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두예와 왕준을 필두로 한 오나라 정벌군을 충돌시키게 된다.

 

 

 

3. 진나라의 오나라 정벌 경로

 

279년 11월,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충돌한 진나라의 정벌군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군장군 낭야왕 사마주를 파견하여 도중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안동장군 왕혼은 강서로 나아가게 하였고, 건위장군 왕융은 무창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평남장군 호분은 하구로, 진남장군 두예는 강릉으로 진출하게 했으며 용양장군 왕준과 파동장군 당빈은 파촉에서 내려가게 하니 동쪽과 서쪽과 군사는 무릇 20여만 명이었다.

(자치통감 279년 6번째 기사)

 

이 중에서도 오나라 공격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군대는 두예와 왕혼, 왕준과 당빈이었는데 대충 그들의 전력을 헤아려보면 5~8만 내외라 생각된다. 이후 기록에서 보여지는 진나라 정벌군의 행보를 살펴보면 애초에 진나라가 취했던 전략은 다음과 같이 추정해볼 수 있다.

 

'일단 강릉을 점령하고 일대 군현을 제압하여 정벌군의 거점을 마련한 다음

 대대적인 선단과 함께 장강을 도하하여 양주로 향한다'

 

이는 207년 조조가 보여줬던 적벽대전에서의 행보와 비슷한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길은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합비방면으로 진출하여 유수구에서의 수전을 통해 장강을 도하하여 수도 건업으로 향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강릉에 거점을 꾸민 다음 수륙양면으로 양주로 향하는 것이었다.

 

유수구로 진출하는 것은 비록 이동거리는 짧지만 적의 수군과 정면대결을 벌여야 하므로 여러 모로 위험부담이 많았기 때문에 진나라는 육군을 활용할 수 있는 후자의 방법을 오나라 공격의 대전략으로 삼은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전략에 따라 두예는 강릉으로 진출하고 왕혼은 횡강을 나와서 일대 오나라 군영들을 공격하니 모두 승리한다.

 

왕준과 당빈 역시 단양감 성기를 격파한 뒤 장강에 쇠말뚝을 박은 오나라의 방어선을 뗏목작전으로 돌파하여 서릉을 공격, 이 전투에서 오나라의 서릉도독 유헌을 죽이는 승전을 거둔다.

 

당시 오의 도독 손흠은 이러한 진나라 군대의 진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강릉독 오연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쪽에서 내려온 여러 군사들이 마침내 장강을 날아서 건넌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을 미루어 생각해볼 때, 오나라는 진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미처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 듯 싶다. 이렇게 오나라 군사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두예는 오연을 격파하고 그의 목을 벰으로써 강릉을 확보하게 되니 교주와 광주에 접해있는 군들이 모두 두예에 투항하게 된다.

 

이로써 전략의 1단계를 완수함과 동시에 오나라의 1차적 전선이었던 형주가 진나라에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4. 형주전선이 이토록 쉽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곽마의 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오나라는 곽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군 1만과 함께 서릉독 도준을 교주로 파견하여 교주목 도황과 합세하게 했다. 269년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이번에도 도황은 교주의 자체 군세와 형남일대의 군현들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토벌군을 편성했을 것이다.

 

둘째로, 손흠이 오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여지듯이 오나라는 진나라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오나라가 제대로 된 정보망을 갖추고 진나라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었더라면 곽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릉의 군사를 빼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형주방면의 주력군이 교주로 투입되어 있는 동안 진나라의 대군은 효과적으로 서릉과 강릉을 공격하여 거점을 마련했고 오나라는 군사력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별다른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한채 형주를 통째로 진나라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쉽게 형주를 손에 넣은 진은 오나라 전역에 파상공세를 가할 준비를 한다. 두예는 강릉을 거점으로 계양과 영릉을 비롯한 형남일대를 소탕하도록 하고 파구를 점령한 왕준은 왕융과 호분과 합세하여 물길을 따라 건업으로 진격하게 한다. 두예는 이러한 왕준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휘하 군사들을 파견함으로써 왕준의 군대는 총 8만으로 늘어났는데 진나라의 군대는 효과적으로 강하와 무창을 점령함으로써 건업으로의 진격로를 확보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급히 손호는 승상 장제를 필두로 하여 중앙군 3만을 편성하여 장강을 건너 왕준의 진격을 저지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옳지 못한 판단이었다. 당시 장제와 동행했던 단양태수 심영은 장제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진이 촉에서 수군을 다스린 지 오래되었는데(왕준의 전선 건조를 말한다) 장강 상류에 있는 여러 군사들은 평소에 경계하고 대비함이 없었고, 이름난 장수들은 모두 죽었으며 어리고 젊은 사람이 책임을 맡고 있어서 아마도 방어할 수 없을까 걱정입니다. 진나라의 수군은 반드시 이곳으로 도착할 것이니 마땅히 많은 사람의 힘을 쌓아 두고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들과 한번 싸워야할 것이고, 만약 다행히 그들을 이기면 장강의 서쪽 지역은 스스로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장강을 건너서 진의 대군과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실패하면 큰일은 멀리 가버리고 맙니다."

 

그랬다. 왕준이 이끄는 병력은 8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는데 고작 3만의 사기 떨어진 군대로 육전을 벌이는 건 자멸의 지름길이었다. 더욱이 오나라의 주력군은 저 멀리 교주에 있었으므로 마땅히 장제는 장강을 방위선 삼아 시간을 끌면서 교주의 군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었다. 하지만 장제는 심영의 의견을 묵살했다. 지키고만 있으면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이 달아날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어쨌든 장제는 판교에서 진나라 군대와 한바탕 백병전을 벌였고 결과는 3만 병력이 모조리 전멸하는 처참한 패배였다.

 

 

 

5. 오나라의 멸망

 

판교에서 당한 패배는 오나라의 항전의지를 결정적으로 꺾어놓았다. 파죽지세와 같은 진나라 군대의 진격에 오나라 장군 장상은 휘하병력 1만을 이끌고 왕준에게 항복했고 진나라 대군은 마침내 수도 건업의 최후의 보루 석두성에 근접하게 된다. 곽마를 토벌하기 위해 무창으로 향했던 도준이 진의 침공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하여 나머지 전력을 가지고 왕준에 맞섰으나 이미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이 밤새 도망치면서 자멸, 마침내 손호는 왕준에게 항복함으로써 오나라는 4대 57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당시 왕준이 도적(圖籍)을 거두어들여 오나라의 전력을 파악해보니 4개 주의 43개 군, 52만3천호에 병사 23만이었다.

 

오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하지만 너무나 아쉬운 최후였다. 오나라는 가진 힘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렇게 오나라 수도 건업이 함락됨으로써 나라가 멸망할 동안 교주로 파견된 주력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서릉독 등수는 곽마와 싸우던 도중 진이 오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무리를 인솔하고 전투가 벌어진 파구로 달려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손호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흰 상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면서 광주자사 여풍과 창오태수 왕의와 함께 각기 인수를 보내며 진나라에 항복했고, 교주목 도황 역시 손호의 서신을 받고 휘하 군세를 들어 진나라에 항복한다.

 

269년에 벌어진 교주에서의 진나라와의 전쟁을 생각해볼 때, 분명 등수와 도황이 이끌던 군세는 오나라의 주력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규모 역시 10만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상당한 대군이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군단이 곽마에게 묶여 저 멀리 남쪽에 떨어져있는 동안 진나라의 대군은 순식간에 형주를 제압하고 장강을 타고 건업을 공략했다. 이는 진나라에게 있어 천운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오나라는 아무 것도 못해보고 멸망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삼국시대는 끝이었다.

 

오늘날 여러 장르로 발간되는 삼국시대에 관한 소설에 오나라의 최후가 상세히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도 별 거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


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50306288

분류 :
조회 수 :
6706
등록일 :
2013.08.31
00:26:49 (*.233.63.81)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private_begagi/41827/f33/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41827

코렐솔라

2013.08.31
00:30:40
(*.166.245.166)
"실제로도 별 거 없었기 때문이다." 가 적절하군요 ㅋㅋ

미백랑

2013.08.31
00:47:37
(*.233.63.81)
정말 안타깝죠. 이문열 삼국지에서도 오나라 멸망은 기껏해야 한두 페이지로 끝나버려서 '오나라 차별~' 이러고 있었는데, 직접 조사해보니깐 정말로 순삭 당해버렸죠 ㅠㅠ

사마중달

2013.08.31
01:04:30
(*.77.32.51)
승상 장제의 3만 중앙군이 왕준에게 격파당한것은 검각공방전에 비유할수있겠고 형주와 강릉을 빼앗긴것은 한중을 잃은것에 비교할수있겠네요. 물론 촉은 주력군이 빠지지 않았기에 나름 치열했지만, 오는 형주주력군이 곽마토벌로 빠진틈을 탔기때문에 좀 싱거운 감은있겠네요.

아리에스

2013.08.31
12:13:44
(*.223.41.127)
육항이 서릉은 국가의 문호니 군역 빠지는 생키들 잡아다가 형주도호에게 8만명은 주시어요 했는데 손호가 몽땅 씹은거 같지는 않은데, 빈집털이에는 장사가 없군요.

미백랑

2013.08.31
12:27:02
(*.233.63.81)
네, 그 서릉을 담당하는 서릉독이 남쪽에서 곽마와 싸우고 있었죠....ㅠㅠ 완벽한 빈집털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오(吳)나라 멸망과 곽마의 반란 [5] 미백랑 2013-08-31 6706
23 마속과 제갈량의 북벌 : 작전참모 마속 [7] 미백랑 2013-08-30 4888
22 교주를 둘러싼 진나라(晉)와 오나라(吳)의 전쟁 [2] 미백랑 2013-08-28 5072
21 기타 삼국지 불가사의 사건 (5) 진궁, 연주를 여포에게 바치다 [5] file 미백랑 2013-08-26 7580
20 마속은 제갈량에게 엄청난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4] 미백랑 2013-08-22 4598
19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3) - 손권, 머리를 조아려 나라를 구하다! [2] 미백랑 2013-08-18 5135
18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2) - 조조, 천하의 대세를 결정짓다 [1] 미백랑 2013-08-16 4436
17 기타 시세를 바꾼 역사의 결단 (1) - 손권, 결전의 탁자를 베다! [2] 미백랑 2013-08-14 3969
16 제갈량 사후 위연과 양의의 대립 : 위연과 양의는 왜 싸웠을까? [21] 미백랑 2013-08-13 6509
15 북벌로 살펴보는 제갈량의 군략 (2) - 북벌 군략 '서북지방 경략' [1] 미백랑 2013-08-12 4063
14 북벌로 살펴보는 제갈량의 군략 (1) - 공명의 군략은 너무나 정직했다 [1] 미백랑 2013-08-12 5065
13 주유 남군 전투 고찰 : 주유는 단순히 강릉만 점령한 것이 아니다 [15] file 미백랑 2013-08-11 7193
12 주유가 1년 동안 조인과 싸운 것은 폄하될 일이 아니다 [18] 미백랑 2013-08-11 5464
11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 - 그의 이른 죽음이 아쉽다! [7] 미백랑 2013-08-10 4794
10 유비는 무슨 까닭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형주에서 도망쳤을까? [5] 미백랑 2013-08-09 4771
9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것은 헌제에 대한 배신행위다? [12] 미백랑 2013-08-08 4771
8 손권의 칭제와 제갈량의 절맹호의(부제 : 제갈량의 굴욕) [7] 미백랑 2013-08-08 4414
7 조조는 왜 '찬탈자'로 불리는 것일까? [8] 미백랑 2013-08-08 4646
6 기타 삼국지 불가사의 사건 (4) 서량의 금마초, 조조에게 반기를 들다 [9] file 미백랑 2013-08-06 7795
5 관우뢰 사건 : 관우는 기밀유지에 실패했다 [8] 미백랑 2013-08-04 5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