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戩字叔茂,長陵人,性質正多謀。初平中,爲尙書,典選擧。董卓數欲有所私授,戩輒堅拒不聽,言色強厲。卓怒,召將殺之,衆人悚慄,而戩辭貌自若。
卓悔,謝釋之。長安之亂,容於荊州,劉表厚禮焉。及曹操平荊州,乃辟之,執戩手曰:「恨相見晩。」卒相國鐘繇長史。[一] 注[一]鐘繇字元常,魏太祖時為相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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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전趙戩의 자는 숙무叔茂이며,
[집해] 혜동(惠棟) : 조전은 조기岐의 조카이다.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서 이르길, 조전은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고 말에 조리가 있었으며,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좋아하였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인간관계에 대해 논하지 않았고, 공부公府에 벽소되어 상서선부랑尙書選部郞이 되었다가 평릉령平陵令으로 옮겼다.
장릉長陵 사람이다. 성품이 곧고 꾀가 많았다. 초평初平 연간에 상서尙書가 되어 전선典選을 맡았는데, 동탁董卓이 자주 욕심을 내어 사사로이 자기 사람을 뽑아줄 것을 요구하자, 조전은 완강히 거절하고 듣지 않았는데 (거절하는) 말씨와 기색이 매우 단호하였다. 동탁은 노하여 (조전을) 죽이려 하였고,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였으나 조전만은 말과 행동이 태연하였다.
동탁은 곧 후회하여 (조전을) 풀어주었다. 장안長安에서 난리가 일어났을 때, (조전은) 형주荊州로 갔고 유표劉表가 예를 다하여 후하게 대하였다.
[집해2] 혜동 : 《전략典略》에서 이르길, 예형禰衡이 경사京師에서 노닐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헐뜯다가, 남쪽에서 조전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검은 간장幹將과 막야莫耶요, 나무는 의나무 · 오동나무 · 가래나무 · 옻나무이고, 사람은 안회顔 · 염구冉 · 중궁仲弓이로다."
이윽고 조조曹操가 형주를 차지한 후 벽소하니, 조전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
"늦게 만난 것이 한스럽소."
(조전은) 상국相國 종요鐘繇의 장사長史로 있다가 죽었다.[1]
[1] 종요의 자는 원상元常이며, 위魏나라 태조太祖(=조조) 때 상국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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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6 진왕열전의 말미에 부전으로 딸려있습니다.
http://rexhistoria.net/private_friedchess/68039
예전에 얘기했던 바로 그 조전이로군요.
'典選擧' 빼고는 다 해석했습니다 ㅎㅎ;;
망탁조의
- 2013.11.29
- 12:09:42
- (*.155.148.94)
예형이 독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어쩌면 본성(?)은 그게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형이 독설을 했던 상대는 조조처럼 한나라 황실을 무너뜨리거나 유표처럼 그걸 방조하는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들의 막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공융처럼 한나라에 충성을 바친 위인들에 대해서 에형은 정말 기준을 능가하는 좋은 평가를 했거든요.
한나라 말기에 이르러 유교로는 난리를 극복할 수 없자 유교를 조롱하는 사상적 기류가 생겼고 공융, 예형, 조조 등이 그 선봉에 섰는데 공융과 예형은 그래도 한나라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고 그럼에도 현실은 힘이 없으니 말로써 저항했던 것 같습니다.
-- 초평연간에 상서가 되어 선거(관리 선발)를 맡았다.[집해에 나온 상서선부랑과 동격] 동탁이 자주 자기 사람을 임명하고자 하였지만, 조전은 번번이 굳세게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동탁이 노하여 불러서 죽이려고 하자, 많은 사람은 벌벌 떨었지만 조전은 언사와 모습이 태연자약했다. 동탁이 뉘우치며 사과하고 그를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