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 卷六十四‧列傳第五十四 「盧植傳」


원문출처 : http://www.sidneyluo.net/a/a03/064.htm


번역 : 사마휘

 

 

盧植字子幹,涿郡涿人也。身長八尺二寸,音聲如鍾。少與鄭玄俱事馬融,能通古今學,好研精而不守章句。融外戚豪家,[注一] 多列女倡歌舞於前。植侍講積年,未甞轉眄,融以是敬之。學終辭歸,闔門敎授。性剛毅有大節,常懷濟世志,不好辭賦,能飲酒一石。

 

노식(盧植)의 자는 자간(子幹)이고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이다. 신장은 8척 2촌(후한 도량형 척 기준 약 23.4cm, 따라서 약 192cm) 음성은 종소리와 같았다. 어릴 적에 정현(鄭玄)과 함께 마융(馬融)을 섬겨, 고금학에 능통하였고, 자세히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나 장구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융은 외척으로 호가(豪家)에 살면서 [注一] 많은 여창(女倡)을 세워 그 앞에서 가무(歌舞)토록 했다. 노식이 시강의 책임을 맡은 해에 일찍이 잠시 눈을 돌림도 없었으니 마융이 이로써 그를 예우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사례하며 돌아가게 되니, 합문(闔門)하고* 교수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굴함이 없었으며 큰 절개가 있었고 항상 제세(濟世)의 뜻을 품고 있어 사(辭)와 부(賦)를 좋아하지 않았고, 능히 술 한 석을 마셨다.

 

[注一] 融,明德皇后之從姪也。

마융은 명덕황후(明德皇后)의 종질(從姪)이다.

 

自注

* 장구에 얽매이지 않았다 : 원문에서 不守章句라고 나와 있으니 직역하면 “장구를 지키지 않다.”인데 이는 앞에서 나오는 고금학에 능통했다는 것과 뒤에 나오는 마융을 시강했다는 내용과 일치하게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研精 부분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문의를 자세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파악하는 것을 좋아하니, 장구에 얽매임이 없었다.”로 보는 것이 가장 매끄럽다고 생각합니다.

* 예우하였다 : 직역하면 “그를 공경하였다.” 정도가 될 것이나 문맥상 의역하였습니다.

* 합문(闔門)하고 : 합문은 기본적으로 폐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문을 닫아걸다 인데, 어떻게 번역하는 게 좋을까 하다 원문의 말뭉치를 살려 번역했습니다.

 

 

時皇后父大將軍竇武援立靈帝,初秉機政,朝議欲加封爵。植雖布衣,以武素有名譽,乃獻書以規之曰:「植聞嫠有不恤緯之事,[注二] 漆室有倚楹之戚,[注三] 憂深思遠,君子之情。[注四] 書陳『謀及庶人』,[注五] 詩詠『詢于芻蕘』。[注六] 植誦先王之書乆矣,敢愛其瞽言哉![注七] 今足下之於漢朝,猶旦、奭之在周室,建立聖主,四海有繫。論者以為吾子之功,於斯為重。天下聚目而視,攢耳而聽,[注八] 謂準之前事,將有景風之祚。[注九] 尋春秋之義,王后無嗣,擇立親長,年均以德,德均則決之卜筮 [注十] 今同宗相後,披圖案牒,以次建之,何勳之有?豈橫叨天功以為己力乎![注十一] 冝辭大賞,以全身名。又比世祚不競 [注十二] 仍外求嗣,可謂危矣。而四方未寧,盜賊伺隙,恒岳、勃碣,[注十三] 特多姦盜,將有楚人脅比,尹氏立朝之變。 [注十四] 冝依古禮,置諸子之官,徵王侯愛子,宗室賢才,外崇訓道之義,內息貪利之心,簡其良能,隨用爵之,彊幹弱枝之道也。」[注十五] 武並不能用。

 

 

당시 황후의 부친 대장군 두무(竇武)가 영제를 원립(援立)하였는데 처음 기정(機政)*을 잡고 조정에서 의논하여 봉작을 더하고자 하였다. 노식이 비록 벼슬이 없는 이나 두무가 본래 명예(名譽)가 있었기에 글을 올려 바로잡기 위해 말하였다.

 

「제가 과부도 씨줄이 모자람을 걱정하지 않은 일이 있었음과[注二], 칠실(漆室)도 기둥에 기대어 근심함이 있었음[注三], 그리고 깊이 근심하고 멀리 생각하는 것은 군자의 정이라 들었습니다.[注四] 서경(書經)에서 『백성들에게 미치어 물어보라.』[注五]라고 하였고, 시경에서 『목동과 나무꾼에게 물어보라.』고 읊었습니다. [注六] 제가 선왕의 글을 암송한지 오래되었으니 구태여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말을 사랑하겠습니까? [注七] 

 

지금 그대는 한나라 조정에 있어서 주실에 있었던 단(旦, 주공 단)과 석(奭, 소공 석)과 같으니 성상(聖主)을 건립하여 사해(四海)로 이어짐이 있습니다. 논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의 공이라 여기는 것이,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천하의 이목이 모이면 보게 되고, 귀가 모이면 듣게 되니[注八] 전사(前事)에 준하여 이르길 장차 경풍(景風)의 징조가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注九] 춘추(春秋)의 의를 찾아보면, 왕후가 이어지질 후손이 없을 때, 종친의 어른을 택립(擇立)하여, 나이가 같으면 덕으로써 하고, 덕이 같은 즉 점을 쳐서 결정한다 하였습니다. [注十] 지금 같은 종상에 서로 후계가 있고, 도안(宗籍)을 풀고 족보를 살펴 그 순서로써 황제를 세웠으니, 무슨 공훈이 있다 할 것입니까? 어찌 멋대로 하늘의 공을 탐하여 자기의 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注十一] 마땅히 대상(大賞)을 사양하고, 몸과 명성을 온전히 하십시오. 

 

또 대대로 이어질 제위를 견주어 힘이 없다면 [注十二] 인하여 외부에서 이어지도록 구해야 할 것이니 가히 위태롭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사방으로 안녕치 못하고, 도적이 기회를 엿보아 도적질 할 것이니, 항악(恒岳), 발갈(勃碣)에 [注十三] 특히 간적들이 많으니 장차 초인(楚人) 비(比)를 위협한 일과, 윤씨(尹氏)가 조(朝)를 세운 변(變)이 있을 것입니다. [注十四] 마땅히 옛 예법에 의거하여, 여러 자식들을 관직에 두고, 왕과 제후들을 불러 아들을 사랑하도록 하고, 종실의 어질고 재주 있음과, 밖으로는 훈도의 뜻(訓道之義)을 숭상하고, 안으로는 이(利)를 탐하는 마음을 쉬게 하여 그 양능함*을 간하게 하며, 따르도록 하고 작위를 주어,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하는(彊幹弱枝)* 도리입니다.」[注十五]

 

두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自注

* 기정(機政) :

* 논하고자 ~ 것입니다 : 좀더 매끄럽게 의역하면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스스로 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양능함 : 맹자에서 양지에 대해 설명할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는, 본연의 선함을 이야기 하는 단어이죠. 딱히 무엇이라 번역할까 하다가 그냥 원문의 말뭉치를 살려 번역했습니다.

* 줄기를 ~ 하는(彊幹弱枝) : “彊幹弱枝의 도리입니다.”라고 번역하는 게 가장 깔끔하다고 생각합니다.

 

[注二] 左傳曰,范獻子曰:「人亦有言,嫠不恤其緯而憂宗周之隕,為將及焉。」

杜預注曰:「嫠,寡婦也。織者常苦緯少,寡婦所冝憂也。」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이르길 “범헌자(范獻子)가 말하길 ‘사람들 또한 말하길 과부가 자기가 짜던 길쌈을 걱정 하지 않고서 주나라가 망하는 것을 근심하였다 하였으니 장차 이를 이름이라.”고 하였다.

두예주(杜預注)에 이르길 “리(嫠)란 과부이다. 짠다는 것은 씨줄이 적어 항상 근심하는 일이라, 과부가 마땅히 근심해야 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注三] 琴操曰:「魯漆室女倚柱悲吟而嘯,鄰人見其心之不樂也,進而問之曰:『有淫心欲嫁之念耶,何吟之悲?』漆室女曰:『嗟乎!嗟乎!子無志,不知人之甚也。昔者楚人得罪於其君,走逃吾東家,馬逸,蹈吾園葵,使吾終年不懨菜;吾西鄰人失羊不還,請吾兄追之,霧濁水出,使吾兄溺死,終身無兄。政之所致也。吾憂國傷人,心悲而嘯,豈欲嫁哉!』自傷懷結而為人所疑,於是褰裳入山林之中,見女貞之木,喟然歎息,援琴而弦歌以女貞之辭,自經而死。」

금조에 이르기를 「노나라에 칠실이라는 여자가 기둥에 기대어 구슬피 한탄하고 울부짖으니, 이웃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불편하였다. 나아가서 그를 물어 말하기를 “음심이 있어 시집을 가고 싶은 생각 때문인가? 어찌 우는 소리가 그리도 슬픈가?” 칠실녀가 말하길 “슬프다, 슬퍼! 그대는 뜻이 없어 남의 심각함을 모르는구나. 지난날, 초나라 사람이 그 임금에게 죄를 얻어 우리 동쪽 집으로 도망와, 말이 뛰쳐나가는 것을 막고자 우리 집 화원의 해바라기들을 밟아버렸기에, 나로 하여금 해가 끝나도록 편히 나물캐지 못하게 했다. 우리 서쪽 이웃 사람은 양을 잃어버렸는데 돌아오지 않으니, 우리 오빠에게 그것을 쫓아가 줄 것을 청하였는지라, 안개가 혼탁하게 물에서 나와 우리 오빠로 하여금 익사토록 하였으니, 종신토록 오빠가 없음이라. 정사의 소치라. 내가 나라를 근심하여 남을 해치니 마음이 슬퍼 울부짖는지라 어찌 혼인을 하고자 함이겠는가!”하였다. 스스로 상처입으나 굳게 품고서 남을 위하여 안정시키고자한 바, 이에 치마를 걷고 산림 속으로 들어가 당광나무를 보고 한숨을 쉬고 크게 탄식하며, 거문고를 안고서 현을 튕겨 여정(女貞)의 사연을 노래를 부르고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라고 하였다.

 

[注四] 詩序曰:「憂深思遠,儉而用禮,乃有堯之遺風焉。」夫士立爭友,義貴切磋。

孝經曰:「士有爭友,身不陷於不義。」詩云:「如切如磋。」

鄭玄注云:「骨曰切,象曰磋。言友之相規誡,如骨象之見切磋。」

『시경(詩經)』의 서문에 이르기를* “깊이 근심하고, 멀리 생각하여 수수하나 예로 쓰니 이는 요임금이 남긴 유풍이 있음이라.”하였다. 무릇 선비가 쟁우(爭友)*에 섬은 그 뜻을 귀히 절차(切磋)함이다.

『효경』에 이르기를 “선비에게 잘못함을 책망하여 주는 친우가 있다면, 그는 불의함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하였으니, 이는 『시』(詩經)에서 “칼로 자른바 같고, 잘 갈아 놓은 것과 같다.”이른 것이요, 정현주(鄭玄注)가 “뼈를 다루는 것을 절(切)이라 하고, 상아를 다루는 것을 차(磋)라 한다. 벗에게 서로 규계(規誡)를 말하여 줌은, 골상(骨象)의 절차(切磋)를 보여줌과 같다.”라고 이른 것이다.

 

自注

* 시경의 서문에 이르기를 : 제가 알기로는 『시경』 당풍으로 알고 있는데 시서라고 나와 있으니 시경의 서문인건지 아니면 시서라는 별도의 책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은 당풍의 서문일 수도 있겠네요.

* 쟁우(爭友) : 친구(親舊)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극력(極力) 충고(忠告)하는 벗 (출처 : 네이버 한자사전)

* 선비에게 ~ 않을 것이다 : 『효경』에서는 “士有爭友, 則身不離於令名”이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父有爭子, 則身不陷於不義”의 다음 구절을 따와 義를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임.

 

[注五] 尚書洪範曰「謀及卿士,謀及庶人」也。

일찍이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경과 사에게 미치어 물어보고, 백성들에게 미치어 물어보라.”라고 한 것이다.

 

[注六] 詩大雅曰:「先人有言,詢于芻蕘。」毛萇注云:「芻蕘,採薪者也。」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이르길 “선인들이 말하길 목동과 나무꾼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모장주(毛萇注)에 “추요(芻蕘)란 뗄나무를 캐오는 자이다.”고 이르렀다.

 

[注七] 無目䀕(눈동자 인)曰瞽。䀕音直忍反。

눈과 눈동자가 없을 것을 이르러 고(瞽)라 한다. 인(䀕)의 음은 직에서 인의 반이다.

 

[注八] 前書賈山曰「使天下戴目而視,傾耳而聽」也。

전서 가산(賈山)이 이르길 “천하의 모든 이목으로 하여금 보고, 귀기울여 들어본다.”고 한 것이다.

 

[注九] 景風,解見和紀。

경풍이란 그 풀이가 화기(和紀)에 보인다.

 

[注十] 左傳王子朝曰:「先王之命,王后無嫡,則擇立長。年鈞以德,德鈞以卜,古之制也。」

춘추좌전(春秋左傳) 왕자조(王子朝)에 이르길 “선왕께서 명하시길, 왕후에게 자식이 없다면 나이 많은 이를 택립하라 하셨다. 나이가 같다면 덕으로써, 덕이 같다면 점을 치라 하셨으니, 이는 고대의 제도이다.”라고 하였다.

 

[注十一] 叨,貪也。左傳曰「貪天之功,以為己力」也。

도(叨)란 탐(貪)이다. 춘추좌전에서 이르기를 “하늘의 공을 탐하여 자신의 힘이라고 여긴다.”라고 함이다.

 

[注十二] 競,彊也。

경(競)은 강(彊)이다.

 

[注十三] 勃,勃海也。碣,碣石山也。

발(勃)은 발해(勃海)이다. 갈(碣)은 갈석산(碣石山)이다.

 

[注十四] 左傳曰,楚公子比,恭王之子也。靈王立,子比奔晉。靈王卒,子比自晉歸楚,立為君。比弟公子棄疾欲篡其位,夜乃使人周走呼曰:「王至矣。」國人大驚,子比乃自殺。王子朝,周景王之庶子。景王卒,子猛立。尹氏,周卿士,立子朝,奪猛位也。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 이르길 “초나라 공자 비(比)는 공왕(恭王)의 아들이라. 영왕(靈王)이 즉위하였을 때, 아들 비가 진(晉)에서 도망하여 달아났다. 영왕이 죽자, 아들(공왕의 아들 *自注) 비가 진(晉)으로부터 초로 돌아와 왕위에 올라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 비의 아우, 공자 기질(棄疾, 초 공왕의 다섯 번째 아들. 초 평왕임 *自注)이 그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였다. 밤에 다른 이들로 하여금 두루 돌며 외치게 하였는데 “왕이 이미 즉위하였다.”라고 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아들(공왕의 아들 *自注) 비는 이에 자살하였다. 왕자 조(朝)는 주 경왕의 서자이다. 경왕이 죽자 아들 맹(猛)이 왕위에 올랐다. 윤씨는 주나라 경사(卿士)로 (경왕의 *自注)아들 조를 왕위에 세우고자 맹(猛)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注十五] 以樹為喻也。謂京師為幹,四方為枝。

前書曰:「漢興,立都長安,徙齊諸田、楚昭、屈、景及諸功臣家於長陵。蓋以彊幹弱枝,非獨為奉山園也。」

나무로 비유한 것이다. 경사를 이르러 간이라 하고, 사방을 지라 한 것이다.

전서에서 이르길 “한나라가 일어나고, 도읍을 장안에 세우고, 제제전(齊諸田)과 초(楚)의 소(昭), 굴(屈), 경(景)에서 옮겨, 장릉(長陵)으로 여러 공신가들을 이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강간약지(彊幹弱枝)로써*, 홀로 있는 것이 아닌 산원(山園)에 봉공한 것이다*.

 

自注

* 그리하여 강간약지로써 : 蓋以彊幹弱枝 부분은 한서에서는 蓋亦以彊幹弱枝 라고 나와있습니다. 해석상에는 상호간 큰 차이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 산원(山園)에 봉공한~ : 소위 말하는 강본약말 정책으로 보입니다. 부호들을 이주시키고, 능원을 봉공하는 것인데, 이러한 이유로 위 부분은 위봉산원(為奉山園)은 능읍 혹은 능원을 형성하여 강본약말을 도모한 것을 말합니다.

 

 

 

州郡數命,植皆不就。建寧中,徵為博士,乃始起焉。熹平四年,九江蠻反,四府選植才兼文武,拜九江太守,蠻寇賔服。以疾去官。

作尚書章句、三禮解詁。[注十六] 時始立太學石經,以正五經文字,植乃上書曰:「臣少從通儒故南郡太守馬融受古學,頗知今之禮記特多回宂。[注十七] 臣前以周禮諸經,發起粃謬,[注十八] 敢率愚淺,為之解詁,而家乏,無力供繕寫上。[注十九] 願得將能書生二人,共詣東觀,就官財糧,專心研精,合尚書章句,考禮記失得,庶裁定聖典,刊正碑文。古文科斗,近於為實,而厭抑流俗,降在小學。[注二十] 中興以來,通儒達士班固、賈逵、鄭興父子,並敦恱之。[注二十一] 今毛詩、左氏、周禮各有傳記,其興春秋共相表裏,[注二十二] 冝置博士,為立學官,以助後來,以廣聖意。」

 

주군(州郡)으로부터 수차례 명을 받았으나 노식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건녕(建寧, 168~172) 중에 징벽되어 박사가 되었는데, 이로써 비로소 출사하였다. 희평 4년(175), 구강(九江)의 만족(蠻)이 반란을 일으켰다. 4부(四府, 삼공과 대장군부)가 노식이 재질과 문무를 겸하고 있다고 천거하여 구강태수(九江太守)로 배명되게 하니, 만적을 물리치고 항복시켰다.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상서장구(尚書章句)』와 『삼례해고(三禮解詁)』를 저술하였다. [注十六] 그 무렵, 비로소 태학(太學)에 석경(石經)이 세워지게 되었으므로 오경(五經)의 문자를 교정함에, 노식이 이에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

 

「신은 젊을 때에 박식한 학자(通儒)를 따르고자한 까닭에 남군태수(南郡太守) 마융(馬融)에게 고학(古學)을 수학하였기에, 자못 지금의 『예기』가 특히 많이 얽히고 굴곡진 것(回宂=훼손)으로 알고 있습니다. [注十七] 신이 일전에 『주례』의 여러 경들로 잘못되어 나쁜 것을 발기(發起)하여 [注十八] 감히 어리석고 천박한 재주나마 다듬어 그것을 해고(解詁)로 만들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사필한 것을 상주하기에는 무력하였습니다. [注十九] 원컨대 장차 가능하다면 서생 두 사람과 함께 동관(東觀), 취관(就官)과 재량(財糧)을 전심(專心)으로 정밀하게 연구하여 『상서장구(尚書章句)』와 합하고, 『예기(禮記)』가 잃고 보충된 것을 헤아려, 여러 가지로 분별해 성전(聖典)을 정하여 비문을 바르게 새기고 싶습니다.


고문(古文)은 과두(科斗)라서 사실에 가까우니, 세속을 따라가는 것을 억제하여 소학(小學)이 내려와 있는 것입니다. [注二十] 중흥한 이래 유교에 통달한 선비 반고(班固), 가규(賈逵), 정흥부자(鄭興父子) 모두가 그를 좋게 여겨 가까이 하였습니다. [注二十一] 당금에 이르러 『모시(毛詩)』, 『좌씨(左氏)』, 『주례(周禮)』의 각 전기가 있음에, 그 흥함이 『춘추(春秋)』와 함께 안팎을 서로 이루게 하였으니, [注二十二] 마땅히 박사(博士)를 두고, 학관을 세우게 하여, 뒤이어 올 후학들을 도와 성의(聖意)를 광포(廣布)해야 할 것입니다.」

 

[注十六] 詁,事也。言解其事意。

고(詁)는 사(事)이다. 그 사(事)의 의미를 풀어 말한 것이다.

 

[注十七] 回宂猶紆曲也。

회용(回宂)은 우곡(紆曲)과 같다.

 

[注十八] 粃,粟不成。諭義之乖僻也。

비(粃)는 조(粟)가 여물지 않은 것이다. 괴벽(乖僻)을 유시한 것이다.

 

[注十九] 繕,善也。言家貧不能善寫而上也。

선(繕)은 선(善)이다. 집이 가난하여 올바르게 옮기고 진헌(進獻)함이 가능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注二十] 古文謂孔子壁中書也。形似科斗,因以為名。前書謂文字為「小學」也。

고문(古文)은 공자의 집 벽 속에서 나온 책을 이르는 것이다. 그 모양이 올챙이를 닮아서 과두라고 이름한 것이다. 전서(前書)는 문자를 소학(小學)이라 한 것을 이른다.

 

[注二十一] 興子衆也,自有傳。左傳曰「郄縠恱禮樂而敦詩書」也。

정흥(鄭興)의 아들은 정중(鄭衆)으로, 스스로의 전을 가지고 있다.* 좌전에서 “극곡(郄縠)*이 예악(禮樂)을 좋아하고 기쁘게 여겼으며, 시서(詩書)에 힘썼다.”라 이른 것이다.

 

[注二十二] 表裏言義相須而成也。前書云:「河圖、洛書相為經緯,八卦、九章相為表裏。」

표리는 의(義)가 서로 보완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전서(前書)에서 “하도(河圖), 낙서(洛書)는 서로 경위(經緯)를 이루고, 팔괘(八卦), 구장(九章)은 서로 안팎이 된다.”라고 이르렀다.

 

*自注

* 스스로의 ~ 있다 : 따로 전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정흥전 이외에도 정중전 있음을 말합니다.

* 극곡(郄縠) : 여기서는 글자가 郄縠입니다만, 郤縠으로 더 자주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것은 보다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會南夷反叛,以植甞在九江有恩信,拜為廬江太守。植深達政冝,務存清靜,弘大體而已。

 

이때 마침 남쪽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노식이 일찍이 구강(九江)에 있으면서 은사와 신뢰가 있었으므로 여강태수(廬江太守)로 배명되었다. 노식은 정사(政冝)에 통달함이 깊었고, 직무함에는 청정이 존재하였으므로, 대체(큰 기강, 큰 줄기)를 넓힐 뿐이었다.

 

 

歲餘,復徵拜議郎,與諫議大夫馬日磾、議郎蔡邕、楊彪、韓說等並在東觀,校中書五經記傳,補續漢記。[注二十三] 帝以非急務,轉為侍中,遷尚書。光和元年,有日食之異,植上封事諫曰:「臣聞五行傳『日晦而月見謂之朓,王侯其舒』。[注二十四] 此謂君政舒緩,故日食晦也。春秋傳曰『天子避位移時』,[注二十五] 言其相掩不過移時。而閒者日食自巳過午,旣食之後,雲霧晻曖。比年地震,彗孛互見。臣聞漢以火德,化當寬明。近色信讒,忌之甚者,如火畏水故也。案今年之變,皆陽失陰侵,消禦災凶,冝有其道。謹略陳八事:一曰用良,二曰原禁,[注二十六] 三曰禦癘,[注二十七] 四曰備寇,五曰修禮,六曰遵堯,七曰御下,八曰散利。用良者,冝使州郡覈舉賢良,[注二十八] 隨方委用,責求選舉。原禁者,凡諸黨錮,多非其罪,可加赦恕,申宥回枉。[注二十九] 禦癘者,宋后家屬,並以無辜委骸橫尸,不得收葬,疫癘之來,皆由於此。冝勑收拾,以安遊魂。[注三十] 備寇者,侯王之家,賦稅減削,愁窮思亂,必致非常,冝使給足,以防未然。脩禮者,應徵有道之人,若鄭玄之徒,陳明洪範,攘服災咎。遵堯者,今郡守刺史一月數遷,冝依黜陟,以章能否,縱不九載,可滿三歲。[注三十一] 御下者,謂謁希爵,[注三十二] 一冝禁塞,遷舉之事,責成主者。散利者,天子之體,理無私積,冝弘大務,蠲略細微。」[注三十三] 帝不省。

 

1년 남짓 만에, 다시 징벽되어 의랑(議郎)으로 배명되어 간의대부(諫議大夫) 마일제(馬日磾), 의랑(議郎) 채옹(蔡邕), 양표(楊彪), 한설(韓說) 등과 함께 동관에 있으면서, 비장중인 오경(五經)과 기전(記傳)을 교정하고, 『한기(漢記)』의 속편을 보완하였다. [注二十三] 황제가 급한 직무가 아니라고 여겨 전임하여 시중(侍中)으로 삼고, 상서(尚書)로 승진시켰다.

 

광화 원년(光和 元年, 178) 일식이 있어 노식이 봉사(封事)를 올려 간하여 말하였다.

 

“신이 『오행전(五行傳)』에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나타나는 것을 조(朓)라 이르는데, 왕후(王侯)가 게으른 것이다.」라고 들었습니다. [注二十四] 이는 임금의 정치가 서원(舒緩)한 까닭에 일식회(日食晦, 일식으로 인해 어두워짐)라 이른 것입니다.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길 「천자의 자리를 잠시 피하였다.」라고 하였으니, [注二十五] 그 서로 가린 것이 잠시 동안에 불과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일식(日食)은 사(巳)에서 오(午)로 넘어가는 것으로 이미 일식한 이후이니, 운무(雲霧)에 희미하고 어두워진 것입니다. 최근 지진(地震), 혜패(彗孛, 혜성)이 함께 보이고 있습니다. 신이 듣기로, 한나라는 화덕으로 너그럽고 밝음을 담당하는 것을 화한 것 했습니다. 여색을 가까이하고, 참언을 믿는 것을 꺼려야 하니, 심히 불이 물을 두려워하는 까닭과 같은 것입니다. 올해의 변사를 살피건대, 모두 양기가 사라지게 되니 음기가 침범하여 재흉(災凶)을 막는 것이 사라진 것으로, 이는 마땅히 그 도가 있음입니다.

 

삼가 여덟 가지의 일을 간략히 진정코자 합니다. 첫째는 용량(用良)이요, 둘째는 원금(原禁)이요, [注二十六] 셋째는 어려(禦癘)요, [注二十七] 넷째는 비구(備寇)요, 다섯째는 수례(修禮)요, 여섯째는 준요(遵堯)요, 일곱째는 어하(御下)요, 여덟째는 산리(散利)입니다.

 

용량(用良)이란 마땅히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조사해 현량(賢良)한 이를 천거하게 하고, [注二十八] 고을마다 채용하여, 천거를 자를 찾는 책임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원금(原禁)이란 무릇 모든 당고(黨錮)에서 그 죄가 아닌 것이 많으니 사면하시고 용서하시어, 삼가 간사하고 부정직했던 것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이십시오.[注二十九] 어려(禦癘)이란 송후의 가속(宋后)들이 모두 허물이 없으나 뼈와 뜻밖의 주검으로 맞게 되었으나 거두어 장례 치룰 수 없었던 것은, 역려(疫癘)가 온 것으로 모두 이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마땅히 조칙을 내려 수습케 하고, 그 영혼을 안유(安遊)케 하십시오. [注三十] 비구(備寇)란 제후와 왕의 일가에 부세(賦稅)가 삭감되어 모두 궁핍하게 되니 난을 생각하게 되고, 필히 심상치 않게 될 것이니, 마땅히 생계가 넉넉할 수 있도록 하게하여 미연에 방제(防除)하십시오. 수례(修禮)란 응당 도가 있는 사람을 불러들여 정현(鄭玄)의 문도들과 같이 『홍범(洪範)』을 진명(陳明)케 하여 재앙과 허물을 다스려 없애게 하십시오. 준요(遵堯)란, 지금 군수와 자사는 한 달에도 수차례 옮겨지는데, 이는 마땅히 그 공적에 따라 등용과 축출을 의거해야 하니, 법률로써 가부를 한다면, 9년이 걸려도 채 못할 것이라도, 3년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注三十一] 어하(御下)란 작위를 희망하여 알현하는 것을 [注三十二] 단번에 응당 막아, 천거하는 일을 책임지고 주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산리(散利)란 천자의 몸으로 그 다스림(理)이 사적(私積)인 것이 없도록 하여 마땅히 대무를 넓혀 세미(細微)한 것들을 없도록 해야 합니다.” [注三十三]

 

황제가 살펴보지 않았다.

 

 

[注二十三] 言中書以別於外也。

중서(中書)란 밖과 분별하여 말한 것이다.

 

[注二十四] 五行傳,劉向所著。朓者,月行速在日前,故早見。劉向以為君舒緩則臣嬌慢,故日行遲而月行速也。

『오행전(五行傳)』은 유향(劉向)이 저술한 것이다. 조(朓)란, 달의 운행이 빨라져 해의 앞에 있게 된 까닭으로 쉽게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유향이 임금이 서원(舒緩)하면 신하가 교만하게 되는 까닭에 태양의 운행이 누려지고 달의 운행이 빨라진다고 한 것이다.

 

[注二十五] 左氏傳曰:「日過分未至三辰有災,於是乎君不舉,避移時。」

杜預注曰:「避正寑,過日食時也。」

『좌씨전(左氏傳)』에서 말하길 “태양이 과분(過分)하여 미처 삼신(三辰)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재앙이 있으니, 이에 임금을 받들지 아니하고 피하여 옮기는 때이다.”라고 하였다.

『두예주(杜預注)』에서 말하기를 “피(避)의 바른 뜻은 침(寑)으로, 일식의 시기를 넘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注二十六] 原其所禁而宥之也。

원(原)은 그 금(禁)한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注二十七] 防禦疫癘之氣。

역병의 기운을 막고 예방하는 것이다.

 

[注二十八] 覈,實也。

핵(覈)은 실(實)이다.

 

[注二十九] 回,邪也。

회(回)는 사(邪)이다.

 

[注三十] 后以王甫、程阿所搆,憂死,父及兄弟並被誅。靈帝後夢見桓帝怒曰「宋皇后何罪而絕其命? 已訴於天,上帝震怒,罪在難救」也。

황후(송 황후, 170년 황후로 책봉됨)를 왕보(王甫, 이릉전투 때 유비를 종군했던 왕보가 아닌 환관 왕보(중상시), 영제 때 인물임.)와 정아(程阿, 당시 태정대부)가 죄로 얽히게 만들어, 그러한 까닭에 근심하다 죽으니, 아비(송풍)와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주살 당하였다. 영제(靈帝)는 후에 꿈에서 환제(桓帝)가 노여워하며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송황후(宋皇后)는 무슨 죄를 지어서 그 목숨을 끊었느냐? 그녀가 하늘에서 참소하니 상제께서 진노하였으므로 그 죄를 구제받기가 어렵다.”하였다는 것이다.

 

[注三十一] 書曰:「三載考績,黜陟幽明。」

孔安國注曰:「三年考功,三考九年,能否幽明有別,升進其明者,黜退其幽者。」此皆唐堯之法也。

『서경(書經)』에 이르길 “삼년마다 그 공적을 헤아려, 출척(黜陟)을 분명히 한다.”고 하였다.

『공안국주(孔安國注)』에 이르길 “「삼년마다 그 공적을 헤아리니, 세 번 헤아리면 9년이니 가부를 분명히 하는 것에 분별이 있게 되니, 승진하게 됨은 그가 공적이 분명한 자요, 출퇴(黜退)하게 됨은 그가 공적이 없는 자이다.」 이는 모두 당요(唐堯)의 법이다.” 라고 하였다.

 

[注三十二] 希,求也。

희(希)란 구(求)이다.

 

[注三十三] 蠲,除也。

견(蠲)이란 제(除)이다.

 

 

 

中平元年,黃巾賊起,四府舉植,拜北中郎將,持節,以護烏桓中郎將宗員副,將北軍五校士,發天下諸郡兵征之。連戰破賊帥張角,斬獲萬餘人。角等走保廣宗,植築圍鑿壍,造作雲梯,垂當拔之。帝遣小黃門左豐詣軍觀賊形埶,或勸植以賂送豐,植不肯。豐還言於帝曰:「廣宗賊易破耳。盧中郎固壘息軍,以待天誅。」帝怒,遂檻車徵植,減死罪一等。及車騎將車皇甫嵩討平黃巾,盛稱植行師方略,嵩皆資用規謀,濟成其功。以其年復為尚書。

 

중평(中平) 원년(184), 황건적이 일어나, 4부가 노식을 천거하여 북중랑장(北中郎將), 지절(持節)*로 배명하고, 호오환중랑장(護烏桓中郎將) 종원(宗員)을 부관으로 삼게 하며, 북군오교사(北軍五校士)의 장으로 삼아 천하 제군(天下諸郡)의 병사들을 일으켜 정벌토록 하였다. 잇따라 교전하여 황건적 수장 장각(張角)을 파하고, 참획(斬獲)한 것이 만여 명에 달했다. 장각 등이 달아나 광종(廣宗)을 지키자 노식은 진영을 쌓고, 참호를 파며, 운제(雲梯)를 만들어 적을 뿌리 뽑고자 하였다. 황제가 소황문(小黃門) 좌풍(左豊)을 보내 군으로 나아가 적의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는데, 혹자가 노식에게 노식에게 뇌물을 좌풍에게 보낼 것을 권하였으나 노식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좌풍이 돌아와 황제에게 말하여 이르길 “광종의 적은 쉽게 격파할 수 있을 따름인데, 노중랑은 진영을 지키며 군사를 휴식하게만 하며, 하늘이 벌을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끝내 함거(檻車)를 보내 노식을 불러들이고, 사죄(死罪)에서 일등을 감하였다(減一等). 거기장군(車騎將軍* 원문이 오자로 보임) 황보숭(皇甫嵩)이 황건적을 토벌하여 평정하기에 이르자, 노식이 장수로써 수행한 것들과 계략들을 몹시 칭송하며, 황보숭이 자신의 모든 재물을 밑천으로 사용하여 계략을 꾸며 그의 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그 해에 다시 상서(尚書)가 되었다.

 

* 自注

* 지절(持節) : 부절을 가지게 하다가 적합할지 지절을 직위명 같은 고유명사로 볼 것인지 의문이긴 합니다. 일단 초벌로는 「삼국지도원결의」의 dragonrz님의 선례대로 고유명사로 해 놓았습니다.

 

 

帝崩,大將軍何進謀誅中官,乃召并州牧董卓,以懼太后。植知卓凶悍難制,必生後患,固止之。進不從。及卓至,果陵虐朝廷,乃大會百官於朝堂,議欲廢立。羣僚無敢言,植獨抗議不同。卓怒罷會,將誅植,語在卓傳。植素善蔡邕,邕前徙朔方,植獨上書請之。邕時見親於卓,故往請植事。又議郎彭伯諫卓曰:「盧尚書海內大儒,人之望也。今先害之,天下震怖。」卓乃止,但免植官而已。

 

황제가 붕어(崩御)하자,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이 중관(中官, 환관)을 주살할 것을 꾀하여, 이에 병주목(并州牧) 동탁(董卓)을 불러들였는데, 태후(太后)를 위협하였다. 노식은 탁이 한(凶悍)하여 제어하기 어려워, 반드시 살려두면 후에 근심이 될 것을 알았기에 강력히 만류하고자 하였다. 하진이 따르지 않았다.

 

동탁이 도착하여 과연 조정(朝廷)에서 능학(陵虐)하게 행동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조당(朝堂)에서 백관을 크게 모아놓고 폐립(廢立)하고자 의논하였다. 신료들 중 감히 발언하는 자가 없었으나, 노식만이 홀로 의논에 반대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동탁이 노하여 모임을 파하고, 노식을 주살하고자하니, 이 이야기는 동탁전에 있다. 노식은 평소 채옹과 친하였는데, 채옹(蔡邕)이 이에 앞서 삭방(朔方, 북방)으로 옮기자, 노식이 홀로 상서하여 청하였다. 채옹이 당시에 동탁에게 친하게 보인 까닭에, 노식의 일을 가서 청하였다. 의랑(議郎) 팽백(彭伯) 또한 동탁에게 간하여 말하기를 “노상서는 천하의 대유라 다른 이들이 우러러봅니다. 지금 우선 그를 해한다면, 천하가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탁이 이에 그만두고, 다만 노식의 벼슬을 면직만 시켰다.

 

 

植以老病求歸,懼不免禍,乃詭道從轘轅出。[注三十四] 卓果使人追之,到懷,不及。遂隱於上谷,不交人事。兾州牧袁紹請為軍師。初平三年卒。臨困,勑其子儉葬於土穴,不用棺椁,附體單帛而已。所著碑、誄、表、記凡六篇。

 

[注三十四] 詭,詐也。轘轅道在今洛州緱氏縣東南也。

궤(詭)는 사(詐)이다. 환원(轘轅)*의 길은 지금 낙주(洛州) 구씨현(緱氏縣) 동남쪽에 있다.

 

노식이 노쇠하고 병들어 귀향을 하고 싶었으나 화를 면한 것이 아니었기에 두려워하여, 길을 속이고 환원(轘轅)을 따라 나갔다. [注三十四] 동탁이 과연 사람을 보내어 그를 쫓게 하였는데, 회(懷)*에 이르렀으나 (노식을) 따를 수 없었다. 마침내는 상곡(上谷)에서 숨어 지내며 인사(人事)와 교류하지 않았다. 기주목(兾州牧) 원소(袁紹)가 청하였기에 군사(軍師)가 되었다. 초평 3년(192)에 죽었다. 임종에 닥쳐 그 아들에게 땅구덩이에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관은 쓰지 말며, 부장품은 비단 한 채만 할 것을 유언할 뿐이었다. 저술한 비(碑), 뇌(誄) 표(表), 기(記) 등이 무릇 6편이었다.

 

* 自注

* 환원(轘轅) : 지금의 하남 언사현(偃師縣) 동남쪽에 있는 산

* 회(懷) : 사례 하내군 치소

 

 

建安中,曹操北討柳城,過涿郡,[注三十五] 告守令曰:「故北中郎將盧植,名著海內,學為儒宗,士之楷模,國之楨幹也。昔武王入殷,封商容之閭;鄭喪子產,仲尼隕涕。[注三十六] 孤到此州,嘉其餘風。春秋之義,賢者之後,冝有殊禮。[注三十七] 亟遣丞掾除其墳墓,[注三十八 ] 存其子孫,并致薄醊,[注三十九]以彰厥德。」子毓,知名。[注四十]

 

건안(建安) 연간 중에 조조(曹操)가 북쪽 유성(柳城)을 토벌할 때 탁군(涿郡)을 지나며, [注三十五] 수령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옛 북중랑장(北中郎將) 노식(盧植)은 이름이 천하에 저명하니, 그 학식으로는 유종(儒宗)이 되었고, 선비들의 모범이요, 나라의 정간(楨幹)이다. 지난날 무왕(武王)이 은(殷)에 들어갔을 때 상용(商容)*의 마을을 봉하였고, 정나라가 자산을 상처하게 되었을 때, 공자께서 눈물을 흘렸다. [注三十六] 고(孤)가 이 주에 이르렀으니, 그 남아있는 풍습을 기리고자 한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와 어진 이의 후손에게는 마땅히 수례(殊禮)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注三十七] 삼가 승연(丞掾)을 보내어 그의 분묘(墳墓)를 돌보게 하고, [注三十八 ] 그 자손이 있으니, 함께 약소하게나마 술을 올려 [注三十九] 그 덕을 기리고자 한다.” 아들 노육은 그 명성이 유명하였다. [注四十]

 

[注三十五] 魏志曰,建安十二年,操北征烏桓,涉鮮卑,討柳城,登白狼山也。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건안(建安) 12년(207) 조조가 북쪽 오환(烏桓)을 정벌하고, 선비(鮮卑)와 교섭하며, 유성(柳城)을 토벌하고 백랑산(白狼山)에 올라갔다.”라고 하였다.

 

[注三十六] 左傳曰:「仲尼聞子產死,出涕曰:『古之遺愛也。』」

『좌전(左傳)』에서 이르길 「공자가 자산(子產)의 죽음을 듣고 나아가 울며 말하길, “옛날의 인애(仁愛)한 유풍(遺風)이로다!”라고 하였다.」라 하였다.

 

[注三十七] 公羊傳曰:「君子之善善也長,惡惡也短。惡惡止其身,善善及子孫。賢者子孫,故君子為之諱也。」

『공양전(公羊傳)』에 이르기를 “군자는 선을 훌륭히 여기는 것은 길게 하고, 악을 미워함에 있어서는 짧게 한다. 악을 미워함에 있어서는 그 사람 하나에 그치며, 선을 훌륭히 여기는 것에 있어서는 그 자손에게까지 미친다. 어진 이의 후손인 까닭에 군자가 그를 생각하여 휘(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注三十八] 亟,急也。

극(亟)은 급(急)이다.

 

[注三十九] 醊,祭酹也。音張芮反。

철(醊)은 제사에서 술을 붓는 것이다. 음은 장절(張芮)의 반이다.

 

[注四十] 魏志曰:「毓字子家,十歲而孤,以學行稱,仕魏至侍中、吏部尚書。時舉中書郎,詔曰:『得其人與不,在盧生耳。選舉莫取有名,如畫地為餅,不可啖也。』毓對曰:『名不足以致異人,而可以得常士。常士畏敎慕善,然後有名也。』」

『위지(魏志)』에서 이르길 「육(毓)의 자는 자가(子家)이고, 10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학식과 품행(學行)을 칭송 받았고, 위(魏)에서 벼슬하여 시중(侍中), 이부상서(吏部尚書)에 이르렀다. 이때 중서랑으로 천거되었는데,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사람을 얻는 여부는 노생에게 달렸을 따름이라. 천거할 때, 그 명성에 취하지 말라. (명성이란) 땅에 그린 떡과 같아 먹을 수 없다.” 노육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명성은 특별한 사람을 부르기에는 부족하나, 평범한 선비는 얻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선비는 가르침을 경외하고, 선을 흠모하며, 연후에 명성을 얻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 自注

* 상용(商容) : 상용은 은 주왕 때 대부로, 주왕에게 간언하다 쫓겨남. 후에 주 무왕이 은을 취하게 되었을 때, 상용의 집 앞을 지나며 예를 표했다고 함.

 

論曰:風霜以別草木之性,[注四十一] 危亂而見貞良之節,[注四十二] 則盧公之心可知矣。夫螽蠆起懷,雷霆駭耳,雖賁、育、荊、諸之倫,[注四十三] 未有不冘豫奪常者也。[注四十四] 當植抽白刃嚴閤之下,追帝河津之閒,排戈刃,赴戕折,[注四十五] 豈先計哉?君子之於忠義,造次必於是,顛沛必於是也。[注四十六]

 

논하여 말한다.

바람과 서리가 초목지성(草木之性)을 분별케 하고, [注四十一] 위태롭고 어지럽지만 충정과 선량의 절개가 보인 즉, [注四十二] 노공의 마음을 알 수 있음이라. 무릇 봉채(蜂蠆)*무리가 회(懷)에서 일어나 뇌정벽력이 귀를 놀라게 하니, 비록 분(賁), 육(育), 형(荊), 제(諸)의 무리라 하더라도 [注四十三] 그 분수를 벗어나 분수에서 벗어나 머뭇거리지 않음이 없었을 것이다. [注四十四] 응당 노식이 엄합(嚴閤)* 아래에서 번뜩이는 칼을 빼어들고, 하진(河津)에서 보위하며 황제를 따르다가, 창칼을 물리치고 나아가 죽일 것을 결단하니, [注四十五] 어찌 앞서 계획된 것이겠는가? 군자는 충의에 관해서는 황급하더라도 반드시 이를 지키고, 엎어지거나 자빠졌을 때에도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注四十六]

 

[注四十一] 論語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논어(論語)』에서 이르길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야 송백(松柏)이 늦게 시들게 됨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注四十二] 老子曰:「國家昏亂有忠臣。」

노자에서 이르길 “국가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다.”고 하였다.

 

[注四十三] 孟賁,多力者也;夏育,勇者也:並衞人。荊,荊軻也。諸,專諸也。

맹분(孟賁)은 많은 힘을 가진 자이다. 하육(夏育)은 용력을 가진 자이다. 모두 위(衞)나라 사람이다. 형(荊)은 형가(荊軻)이다. 제(諸)는 전제(專諸)이다.

 

[注四十四] 冘,人行貌也,音淫。言冘豫不能自定也。奪謂易其常分者也。

유(冘)는 사람의 행동하는 모습이다. 음은 음(淫)이다. 유예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탈(奪)이란 그 정해진 분수를 바꾼 것을 말한다.

 

[注四十五] 事見何進傳。杜預注左傳曰:「戕者,卒暴之名也。」

이 일은 『하진전(何進傳)』에서 보인다. 『두예주(杜預注) 좌전(左傳)』에서 이르길 “장(戕)이란 졸폭(卒暴)한다는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注四十六] 孔子曰:「君子無終食之閒違仁,造次必於是,顛沛必於是。」

馬融注云:「造次,急遽也。顛沛,僵仆也。雖急遽僵仆,不違仁也。」

공자(孔子)가 말하길 “군자는 식사를 하는 사이(終食之閒)에도 인(仁)을 어기는 일이 없는 것이니, 황급할 때에도 반드시 이를 지키고, 엎어지거나 자빠질 때(위급할 때)에도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마융주(馬融注)에 이르길 “조차(造次)란 갑작스럽고 급한 것(急遽)이다. 전패(顛沛)란 엎어져 넘어지는 것(僵仆)이다. 비록 갑작스럽고 급하며, 엎어져 넘어지더라도 인(仁)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自注

* 蜂蠆(蜂蠆) : 원문에서는 종채(螽蠆, 메뚜기와 전갈)로 나와 있으나, 다른 곳에서 봉채로 나와 있고, 봉채가 문맥이 더 깔금하여 번역에서만 치환함. 봉채란,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는 벌과 전갈을 말하는데, 전하여 하잘 것 없는 무리들을 비유하여 쓰이기도 함.

* 엄합(嚴閤) : 高阁。指皇宫或中央官署。(출처 : http://zi.artx.cn/ci/Artx98173Dict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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