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구라뱅뱅님께서 제공해 주신 <難以否定,堪為信史-論諸葛亮軍被“俘斬萬計”辨析> 의 번역입니다.


俘斬萬計

 

二十四史之《晉書》中的《宣帝紀》,記載了司馬懿擊破諸葛亮第四次北伐的戰鬥中,有過“追擊,破之,俘斬萬計”的戰果。長期以來不為重視。今人史作,雖不能否認這一記載,但多不提此戰果。寫這個帖子來初步辨析一下此段記載的真實性。

 

24사의 《진서(晉書)》 중의 <선제기(宣帝紀)>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제 4차 북벌의 전투중에 격파한 사실을 기재하고 있는데, “추격하여 그를 파하였는데, 부참(俘斬, 적을 사로잡거나 베어죽인 것)이 만萬을 헤아렸다.(追擊,破之,俘斬萬計)”라는 전과가 있는데, 오랜 기간 동안 중시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역사를 쓸 때, 비록 이 한 줄의 기재된 것을 부정할 수 없건만, 많이들 이 전과를 드러내놓지 않는다. 이 한 마디 기재된 것의 진실성에 대해 이 글에서 초보적인 분석을 시도해 본 것을 써보고자 한다.

 

 

  結論是:難以否定,堪為信史。

 

결론은 이렇다 : 부정하기 어려우며, 신뢰할 수 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第一、此段記載不會是史家的故意誇大。

  《晉書》由唐朝房玄齡主持所編纂,唐太宗對該書極為重視,《晉書》中的《宣帝紀》等篇章是享有很高聲譽的史學名著。且該書記載的是前朝史實,一般而言,沒有必要刻意吹捧誰或故意隱瞞誰的不良事跡,其記載內容可以肯定都有相當可靠的依據。所以,諸葛亮第四北伐戰鬥中被“俘斬萬計”的原始史料是肯定存在的,估計來自晉朝的記載,今天已經失傳。

 

   제 1, 이 기재된 부분은 사가(史家)의 고의적인 과대(誇大)가 아니다.


《진서(晉書)》는 당조唐朝의 방현령房玄齡이 주관하여 편찬한 것으로, 당태종이 이 책을 극히 중시하였고, 《진서(晉書)》중의 <선제기(宣帝紀)> 등의 문장은 매우 높은 명성의 사학史學 명저名著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책이 기재하고 있는 이전 왕조의 사실史實은, 일반적으로, 누군가 혹 고의로 감추어 속이거나, 누군가의 좋지 못한 사적事跡을 일부러 치켜세울 필요가 없고, 그 기재된 내용은 모두 상당히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수긍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제갈량의 제 4차 북벌 전투 중에 “부참만계俘斬萬計”를 당한 것이 원래의 사료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고, 진왕조로부터 기재되어 왔다고 짐작하지만, 지금에는 이미 실전되었다.

 

 

  注意到,“俘斬萬計”這一記載並不見於陳壽的《三國誌》。我們知道《宣帝紀》是132卷《晉書》的中的最重要篇章之一,盡管整本的《晉書》還有些缺陷,但其中《宣帝紀》是重點中的重點,太宗李世民還親自為之寫了史論。《晉書》作者在寫作《宣帝紀》時,不可能不參考前人的三國史料,因此不可能不注意到《三國誌》中沒有“俘斬萬計”的相關記載。由此可以斷定,“俘斬萬計”是經過史家的充分考證,認為其真實可信之後才采用的。如果不是經過充分考證並得出肯定的結論,則《晉書》作者保險的寫法應該是舍去這一條史料。

 

알아차린 “부담만계” 이 한 마디의 기재는 진수陳壽의 《三國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선제기(宣帝紀)>는 《진서(晉書)》의 132권 중 가장 중요한 편장 중 하나이고, 비록 완전본의 《진서(晉書)》가 아니고 몇 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선제기(宣帝紀)>는 중점중의 중점이며, 태종 이세민 또한 친히 쓰도록 만든 사론史論이다. 《진서(晉書)》의 저자는 <선제기(宣帝紀)>를 쓸 때, 전 시대 사람의 삼국사료三國史料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三國誌》중 없는 “부참만계”의 관련 기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 없다. 이로부터 단정할 수 있는데, “부참만계”는 사가史家의 충분한 고증을 거친 것이며, 그 진실을 믿을 수 있게 된 이후에 겨우 채용되었다고 여겨진다. 만약 충분히 고증을 거치고 아울러 확실한 결론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면, 《진서(晉書)》의 저자는 안전장치로써 해당한 이 한 항목의 사료를 제거해야만 했을 것이다.

 

자주自注 :

제 1번 주요 요지

1) 당 태종 이세민이 친히 쓰도록 만든 사론인 <<진서>>

2) <<진서>>는 사학 명저.

3) 고의로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았을 사료. (<<진서>> 이전의 진왕조 기록이.)

4) 사가가 충분히 고려한 이후에 채택하였을 것. (만약 고증이나 확실한 결론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면 안전장치로써 해당 부분을 삭제했을 것)

*휘按 : 여기서 모든 논리적 근거는 “사가가 고증을 통한 확실한 결론을 얻어냈다.”를 가정했기 때문에 그것이 성립해야만 설득력을 획득합니다.(증빙 불가영역) 솔직히 여기까지는 논리적으로 상당히 빈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第二、何以“俘斬萬計”之記載不見於《三國誌》?

  有些人因為在《三國誌》及裴注中找不到類似的記載,傾向於認為《宣帝紀》的記載不可靠。但是,我們要問一下,假如陳壽要記載諸葛亮被“俘斬萬計”,則根據《三國誌》的寫作慣例,應該把這一史料記載於何人的傳記中呢?顯然,應該寫在司馬懿的傳記中。同時,在與事件有關人物的傳記中,也可能會以更少的字數提到,如《張郃傳》《明帝紀》,但《諸葛亮傳》則往往會回避此事,這大概就是傳說中的“為傳主諱”吧。

  有否定這一記載傾向的人,恰恰忘了,《三國誌》並沒有司馬懿的傳記。因此,依據《三國誌》中沒有“俘斬萬計”的記載來否認“俘斬萬計”的理由顯然是站不住腳的。

  裴注是注釋《三國誌》的,既然《三國誌》沒有司馬懿傳,則裴注也難以、且也並無必要將當時已知的司馬懿的事跡全部補充到注記中。

  此外,有人提出相對低質量的個別史書中,也找不到相關的記載。其實,這些史書中,大部分現今都已失傳,僅靠裴注等加以引用才得以保存其片斷。因此,一來,很難斷定這些史料中沒有相關的記載;二來,這些史書中有一些本來就不是信史,有的甚至是偏向蜀漢的,那麼,書中不記載諸葛亮的失敗,也是常理了。

  再看《張郃傳》和《明帝紀》。

 

제 2, 어째서 “부참만계”의 기재가 《三國誌》에서 보이지 않는가?


몇몇 사람들은 《三國誌》 및 배주 중에서 비슷한 류의 기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선제기(宣帝紀)>의 기재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는데, 만일 진수陳壽가 제갈량이 당한 “부참만계”를 기재하였다면, 곧 《三國誌》의 작법의 관례에 근거하여, 이 사료를 누구의 전기 중에 기재했어야 했는가? 현연하게 사마의의 전기 중에 기록되었어야 했던 것이다. 동시에, 사건과 관계되는 인물의 전기 중에서 또한 더 몇 글자 기재할 수 있을 것이며, <장합전>, <명제기> 와 같은, 그러나 <제갈량전>이라면 종종 이 일에서 비켜갈 수 있었을 것이니, 이는 아마도 전설傳說속의 “전傳의 주인主人을 위하여 피한 것(為傳主諱)”이었을 뿐이다.


이 한 가지 기재를 부정하는 경향의 사람들이 있는데, 꼭 잊어버리는 것이, 아울러 《三國誌》에는 사마의의 전기에서도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三國誌》 중에 “부참만계”의 기재가 없다는 것에 의거하여 “부참만계”의 근거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다고 부인해 온다.


배송지 주는 《三國誌》의 주석인데, 《三國誌》 <사마의전>에 없는 만큼, 배송지 주도 어려웠고, 또한 당시 이미 알고 있는 사마의의 행적을 전부 보충하여 주석 속에 기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 밖에, 상대적으로 질 낮은 개별 사서史書를 만드는 사람들 중, 또한 서로 관련되는 기재를 찾아볼 수 없다. 기실, 이 몇몇 사서 중에 대부분은 지금은 모두 이미 실전된 것이고, 겨우 배송지 주 등에 기대어 그 단편적인 것들을 겨우 유지할 수 있도록 인용할 뿐이다. 이로 인하여, 첫째, 이런 사료들 중에는 서로 관계되는 기재가 없어서 단정하기 어렵다. 둘째, 이런 사서들 중 일부는 마땅히 신뢰할 역사가 아닌 것들도 있고, 심지어 촉한에 편향적인 것들도 있어, 그래서, 서書들 중에 제갈량의 실패를 기재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이치이다.


다시 <장합전>과 <명제기>를 보자.

 

제 2번 주요 요지

1) 삼국지의 작법 관례를 볼 때 전의 주인을 위해 기록을 안 한 것일 뿐.

2) 당시 이미 알고 있었던 사마의의 행적을 배송지가 전부 보충하여 주석에 기록할 필요도 없었을 것.

3) 서로 관계되는 기록이 실린 사료가 없어서 단정하기 어렵다.

4) 촉한 편향적인 사서들도 인용되고 있는데, 그런 사서들이 제갈량의 실패를 기재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휘按 : 삼국지의 작법 관례에서 전의 주인을 위해 기록을 안 했다는 조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진수는 이 양반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기록했었거든요. 패배했다고 그것을 감추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유독 이 부분만 감춘다는 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또한 배송지가 <한진춘추>로 제갈량 부분은 달아놓고, 사마의 부분은 안 달아놨다는 건 논리상 이상합니다.


 

  第四次北伐的當事人除了司馬懿,還有名將張郃;但是,在“俘斬萬計”事件發生時,張郃已經陣亡,因此,《張郃傳》中不可能有相關記載。

  至於《明帝紀》,連第一次北伐時諸葛亮的折兵數萬都沒有詳述。第四次北伐的總篇幅更為簡略,找不到《宣帝紀》的“俘斬萬計”的記載自是意料之中。

  反之,如果要了解司馬懿的詳盡傳記,就必須讀司馬懿本人的傳記,即《晉書》之《宣帝紀》。

  有必要提一下,即使陳壽在《三國誌》中為司馬懿作了傳記,那麼該傳記中是否能詳細記載司馬懿擊退諸葛亮的細節(如在某某地俘斬萬計),也是值得否定的。根據《三國誌》的特點,估計陳壽隻會簡單地說一下“破之”,而不會有俘斬數目的記載。我們可以參考一下《張郃傳》,在諸葛亮第一次北伐中,張郃覆滅了馬謖數萬人的部隊,戰果重大,但陳壽也並沒有記載魏軍俘斬蜀軍的具體數目。

  現在,《三國誌》中根本就沒有司馬懿的傳記,那麼,自然是絕無可能有“俘斬萬計”的記載了。

 

제 4차 북벌의 당사자인 사마의를 제외하고, 또 유명한 장수는 장합이다. 하지만, “부참만계”의 사건 발생 당시에 장합은 이미 전사하였고, 이로 인해 <장합전> 속에 서로 관계되는 기재가 불가능했다.


<명제기>를 보면, 제 1차 북벌 당시조차도 제갈량이 군사 수만을 잃은 것에 대해 모두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다. 제 4차 북벌의 전체적인 지면 또한 간략하여 <선제기>에서 “부참만계”의 기재를 찾을 수 없는데, 이는 당연히 예상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사마의의 상세한 전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사마의 본인의 전기인, 곧 《晉書》의 <선제기>를 읽어야 한다.


조금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설령 진수가 《三國誌》 중에서 사마의의 전기를 썼다고 하더라도, 사마의가 제갈량을 격퇴시킨 자세한 정황을 전기 중에 그렇게 상세하게 기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모모 지역에서 부참만계처럼), 또한 부정할만한 의의(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三國誌》의 특징에 근거해 추측컨대 진수가 간단하게 말할 뿐인 “그를 파하다.”에 대해 조금 언급해보자면, 부참俘斬한 수의 기재를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장합전>에서, 제갈량의 제 1차 북벌 중에 있었던, 장합이 마속의 수 만인의 부대를 괴멸시킨 것은 전과가 중대하지만, 진수는 또 아울러 위군이 촉군을 부참한 구체적인 수를 기재한 것이 없다.


현재 《三國誌》 중 근본적으로는 사마의의 전기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부참만계”의 기재가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자주(自注)

제 2번 주요 요지 추가

1) <장합전>에서 “부참만계”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부참만계”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장합이 전사했기 때문.

2) “부참만계”가 《三國誌》<선제기>에서 등장하지 않는 것은 진수의 작성 스타일이 원체 그랬기 때문이고, 또한 부정할만한 의의(진수가 촉을 유리하게 쓰고 싶었다 정도의)가 있었기 때문.

3) 《三國誌》에 근본적으로 <사마의전>이라고 부를만한 열전이 없기 때문.

 

*휘按 : 1번은 교차검증 해보지 않아서 이 글에서는 언급하기 힘들지만, 2번 부분이나 3번 부분은 쉽게 납득이 가진 않습니다. 진수의 <삼국지>에 사마선왕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주구장창 말하는 “부참만계”가 응당 첨부되어야 할 내용이었다면 배송지가 “부참만계” 기록을 주석 달지 않은 것과 <제갈량전>에서 <한진춘추>의 내용을 주석으로 단 것에 대해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지요. 앞서 이 사람이 논리적 근거로 잡은 황명을 받고 배송지가 주석 작업에 들어갔다는 점과 배송지 또한 “사가가 고증을 통한 확실한 결론을 얻어냈다.”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즉, “기록물에 대한 이중 잣대” 부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쓴이가 더 설명해야 할 영역으로 보입니다.

 

 

 

  第三、《三國誌》的記載可以為《宣帝紀》中“俘斬萬計”的記載提供旁證。


  也有人覺得《晉書》關於諸葛亮第四次北伐時被“俘斬萬計”的記載與《三國誌》裏的相關記載相互矛盾,這些人是沒有仔細閱讀這兩本書的記載。

  我們知道,《三國誌》之《諸葛亮傳》,勿寧看作是陳壽以作史的名義寫的一篇“諸葛亮頌”,在這部傳記中,不記載第四次北伐被“俘斬萬計”,反而記載了有利於塑造諸葛亮光輝形象的一些局部的“勝利”,是情理之中的。

  《諸葛亮傳》關於第四次北伐隻有25字:九年,亮複出祁山,以木牛運,糧盡退軍,與魏將張郃交戰,射殺郃。正傳中對於諸葛亮的失敗,可以說是諱莫如深。反倒記載了張郃中流箭這類意外事件,讓人讀來會有諸葛亮不是失敗,而是主動撤退,甚至還在交戰中斬殺了對方大將的印象;陳壽的寫法真是高明啊,如果不讀《張郃傳》,是很難避免這類感覺的。

  《宣帝紀》彌補了《三國誌》中的一項空白,為司馬懿作了一部詳盡的傳記。關於第四北伐,《宣帝紀》的記載極為詳細:

 


제 3, 《三國誌》의 기재가 <선제기> 중 “부참만계”의 기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방증.

 

또한 《晉書》가 제갈량이 제 4차 북벌 당시 겪었던 “부참만계”의 기재와 《三國誌》 속의 서로 관련되는 기재가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이 두 본서本書의 기재를 자세하게 열독한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알다시피 《三國誌》의 <제갈량전>은 오히려 진수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작성한 것 보다는 “제갈량 찬송”의 1편을 쓴 것으로 보는데, 이 부분은 전기 중에서 제 4차 북벌에서 당한 “부참만계”를 기재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몇 가지 국부적인 승리에서 제갈량을 대단한 이미지로 만들어 유리하게 기재하고 있는 것에서 그러한 까닭이 담겨있는 것이다.


<제갈량전>은 제 4차 북벌에 관해 25자 밖에 없다.

 

“9년,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나가 목우木牛로 (군량을) 운반하였는데,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물리게 되자,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과 교전하여 활로 장합을 죽였다.”

 

정전正傳 속에서 제갈량의 실패에 대해 깊이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장합이 유시에 맞은 이런 류類의 의외의 사건들은 기재하고 있어, 사람들이 제갈량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철수로 읽게 만들어, 심지어 교전 중에 상대방 대장을 참살했다는 인상까지 준다. 진수의 서법이 정말 고명하지 않은가! 만약 <장합전>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느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제기>로 《三國誌》중의 일부분 공백을 보완하여, 사마의의 일부 상세한 전기를 써보고자 한다. 제 4차 북벌에 관하여 <선제기>의 기재된 것은 극히 상세하다.

 

  明年,諸葛亮寇天水,……天子……乃使帝西屯長安,都督雍、梁二州諸軍事,統車騎將軍張郃……等討亮。……遂進軍隃麋。亮聞大軍且至,乃自帥眾將芟上邽之麥。……帝……卷甲晨夜赴之。亮望塵而遁。……進次漢陽,與亮相遇,帝列陣以待之。……亮退,追至祁山。亮屯鹵城,據南北二山,斷水為重圍。帝攻拔其圍,亮宵遁。追擊,破之,俘斬萬計。天子使使者勞軍,增封邑。

 

다음해(231년), 제갈량이 천수를 침범하여 … 천자가 … 이에 황제가 서쪽으로 가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옹雍․양梁 2주의 모든 군사軍事를 도독都督하게 하고* 거기장군 장합 …… 등을 통솔하여 제갈량을 토벌토록 하였다. …… 마침내 유미隃麋로 진군하였다. 제갈량이 대군이 또다시 이른다는 것을 듣고, 이에 군사들을 이끌고 상규上邽의 보리를 베었다. …… 사마의가 …… 갑옷을 싸들고 밤낮으로 나아갔다. 제갈량이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서 달아났다. 나아가 한양漢陽에 거치하게 되었을 때, 제갈량과 더불어 서로 조우하자, 사마의가 진을 치며 그를 기다렸다. …… 제갈량이 퇴각하니 이를 추격하여 기산祁山에 이르렀다. 제갈량이 노성鹵城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거점으로 하여 물을 끊고 포위를 두텁게 하였다. 사마의가 공격하여 그 포위를 흩어버리니 제갈량이 밤을 타 도망하였다. 추격하여 격파를 하였는데, 사로잡거나 참한 것이 만萬을 헤아렸다. 천자가 사자로 하여금 군을 위무토록 하고, 봉읍封邑을 증가시켰다.

 

* 이 부분은 직위가 “도독옹양이주제군사”인 것인지, 아니면 “도독으로 삼아 옹양이주의 모든 군사를 담당케 했다.”라고 봐야 할 것인지 제 식견이 짧아 구분이 되지 않아 직역하였습니다.

 

  有人誤將諸葛亮退兵時張郃中流箭而亡的時間與諸葛亮退兵時被“俘斬萬計”的時間混為一談,原因是這兩個事件都發生在諸葛亮退軍的過程中。其實,從《張郃傳》與《後主傳》的記載可知,張郃中箭的地點在木門,靠近祁山。也就是說,張郃是在諸葛亮剛剛退軍時中的流箭;但是,魏軍不可能會因張郃意外陣亡就停止追擊,正是在隨後的追擊中,取得了俘斬萬計的戰果。

 

사람들이 제갈량이 병사를 물릴 때 장합이 유시에 적중되어서 죽었던 시간과 제갈량이 병사를 풀릴 때 당한 “부참만계”의 시간을 뒤섞어서 하나의 시간으로 잘못 생각하는데, 원인은 이 두 개의 사건이 모두 제갈량이 퇴군하는 과정 중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실, <장합전>과 <후주전>의 기재된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장합이 화살을 맞은 지점은 목문木門이고, 기산祁山에 근접해 있다. 이 설도, 장합이 제갈량의 단단한 퇴군 당시 유시에 맞았다는 것인데, 그렇지만 위군魏軍은 장합張郃의 의외의 전사로 인하여 추격을 정지하였을 것이니, 바로 뒤의 추격 중에 부참만계의 전과를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可見,《三國誌》與《宣帝紀》是互相補充的,並無矛盾。

  不僅兩本著作的記載不發生矛盾,進一步,《三國誌》的記載可以為《宣帝紀》中“俘斬萬計”提供有力之旁證。

  《明帝紀》:以亮退走,封爵增位各有差

  《宣帝紀》:天子使使者勞軍,增封邑

  查《明帝紀》,僅在抗擊第一次北伐和抗擊第四次北伐之後,有過封賞有功人員的記載。這就表明,抗第一次北伐和抗第四次北伐,魏國均取得了較為重大的結果。顯然,這與《宣帝紀》中“俘斬萬計”的記載是相應證的,《明帝紀》可以作為《宣帝記》真實性的旁證。

  此外,《宣帝紀》中關於因擊破諸葛亮而“增封邑”的記載,與《明帝紀》中“封爵增位各有差”的記載是一致的,也可以作為《宣帝紀》中“俘斬萬計”真實性的旁證。

 

《三國誌》와 <선제기>가 상호보충적이라 아울러 모순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책의 저작의 기재가 모순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三國誌》의 기재가 <선제기> 중의 “부참만계”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는 유력한 방증이다.

 

<명제기> : 제갈량이 물러나 달아났으므로 작위에 봉하고, 직위를 더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선제기> : 천자가 사자로 하여금 군을 위무하게 하고 봉읍을 더하였다.

 

<명제기>를 살펴보면, 다만 제 1차 북벌에 대한 반격과 제 4차 북벌에 대한 반격 후, 공이 있는 인원들에게 과한 봉상을 했음을 기재하고 있다. 이는 곧 제 1차 북벌에 대한 반격과 제 4차 북벌에 대한 반격이 위나라의 모두 비교적 일정 이상의 큰 성과를 얻었기 때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명백하게 이것은 <선제기> 중 “부참만계”의 기재가 서로 상응하여 증명하여 주고, <명제기>가 <선제기>의 사실성의 방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 외에 <선제기> 중 제갈량을 격파한 것으로 인하여 “봉읍을 더하였다.”라는 기재와 <명제기> 중 “직위를 더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의 기재가 일치하는 것에 관하여, 또한 <선제기> 속 “부참만계”의 사실적 방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자주(自注)

제 3번 주요 요지

1) 진수는 의도적으로 <제갈량전>에서 "부참만계"의 사실을 누락시켰다.

 

2) <장합전>을 살펴보면 "부참만계"의 허실을 살필 수 있다.

 

3) 진수는 <장합전>과 <제갈량전> 등을 통해 부참만계를 누락시키고, 사건의 시간을 뒤섞어 놓아서 둘 모두 함께 발생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즉, 의도적으로 사건을 꼬아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4) 만약 두 과정이 모두 퇴군 중에 있었다고 한다면, 장합의 전사와 함께 추격을 중지하였을 것이니 상호 모순적인 기록.

 

5) <명제기>의 기록과 진서 <선제기>를 비교해 보면 서로 상호 보완적인 면이 있어 "부참만계"가 사실임을 알 수 있다.

 

 

* 휘按 : 1, 2번이야 흔히 <선제기>의 기록을 옹호하시는 분들의 주요 논지이기도 하니 제가 가타부타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하지만 3, 4번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지요. 3번과 4번, 5번은 다시 한 번 더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언급해 보겠습니다.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 山)으로 출병하자(231년의 일)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제장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게 해 약양(略陽-천수군 약양현)에 도착했다. 제갈량이 물러나 기산을 지키자 장합이 추격해 목문(木門-천수군 서현 근처)에 이르렀는데, 제갈량군과 교전하다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무릎을 맞고 죽었다. (주4)

(주 4) [위략]에서 이르길 –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선왕이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군법(軍法-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선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弓弩)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 위서 장합전

 

건흥 9년(231년) 봄 2월, 제갈량이 다시 출군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木牛)로 운량했다. 위(魏)의 사마의, 장합이 기산을 구원했다. 여름 6월, 제갈량이 군량이 다해 군을 물렸는데, 장합이 추격해 청봉(靑封)에 이르러 제갈량과 교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촉서 후주전

 

*건흥 9년(231년)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 참고. 간추리면 "사마의가 노성에 도착하자 장합이 퇴각하는 제갈량을 공격하자고 건의함. 그리고 왕평 등에게 묶여 오히려 격파당함."

 

건흥 9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촉서 왕평전

 

이것들을 보면 오히려 시간적 구성은 제갈량이 퇴각시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의도적으로 기록들을 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는데요. 배송지는 한진춘추와 곽충오사를 주석으로 달면서 한진춘추에 대한 내용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곽충오사의 내용을 비판합니다. 또한 여기서는 "장합이 제갈량 퇴각시에 죽은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실상 사서의 내용은 제갈량 퇴각시에 죽었다고 나오지요.

 

이 작성자의 논리 중 하나는 바로 "만약 제갈량 퇴각 시, 무리한 추격으로 장합이 죽었다면 오히려 부참만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즉, 부참만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장합은 제갈량 퇴각 보다 이른 시점 혹은 부참만계가 일어나기 전 시점이어야 합니다. 만약 제갈량 퇴각 중에 장합이 죽어버렸다면, 중진을 이루었던 장수의 사망으로 인하여 부참만계가 일어날 수 있을만한 여지가 보다 적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에 대하여 보충하지는 못합니다.

 

이 작성자의 주요 논지는 이렇습니다. "삼국지 <명제기>와 진서 <선제기>에서 나타나는 포상이 과할 정도다. 이것은 군공이 있었다는 반증이고, 그런 고로 <선제기>에서 나타나는 부참만계는 진실이다." 이것인데,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많은 사료들을 언급하고, "사가가 고증을 통한 확실한 결론을 얻어내고 기록한 것"이라는 입장을 가진 작성자인 만큼 자기당착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진수는 까고 있으니 패스한다 쳐도, 배송지나 다른 사람들은 어찌 해볼 수 없거든요.

 

결과론적으로 "포상이 있었으니 부참만계는 진실"이라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이 아니라 딱히 뭐라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조언 부탁드립니다.

 

 

* 살펴보며 보충격으로 인용한 모든 사료의 출처는 "정사삼국지방 with 파성넷(http://rexhistoria.ne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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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4.01.16
17:49:15 (*.234.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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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4.01.16
18:09:50
(*.166.245.152)
결과적으로 내용은 모두가 다 아는 촉서에는 패배를 따로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니 없고, 이건 장합의 공이 아니니 선제기에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대부분이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일단 기록된 것은 동일 사건에 대해 반대 성향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끼워 맞춰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라 원작자의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정황근거로 포상밖에 없다는 좀 그렇긴 하군요.

코렐솔라

2014.01.16
18:12:52
(*.166.245.152)
역시나 여기서 문제는 진수는 집필방법 때문에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배송지의 경우는 본인이 패배한 기록이라도 본전에 써넣는다. 그런데 그 기록이 없고, 배송지가 죽고 한참 후인 당나라 때에 와서야 저 내용이 등장하느냐가 서로 안 맞는 것이라고 봐도 될까요?

사마휘

2014.01.16
19:20:06
(*.234.26.150)
번역하면서, 저 글을 작성한 이는 "포상이라는 정황근거상 <선제기> 부참만계의 기록은 사실이다."가 논리의 주요 골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그러면서 "부참만계는 <선제기>포장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으로 이것저것 잡다하게 끌어쓴 것으로 보입니다.
(진수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고, 배송지는 언급 조차 없고, 진서는 당태종이 너무나 좋아했던 책. 뭐 이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니까요.)

솔직히 글을 읽는 내내 느꼈던 것이지만, 썩 좋은 논리전개 방법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이것만큼은 "진수도, 배송지도 안 다루었다."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만, 정황근거로 고작 "포상" 하나 뿐이라는 것이 문제겠지요.
그래서 "휘 안"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제 생각이 그렇다 이거죠. 진수의 집필 방법상 <제갈량전>에서 피했으면 <사마선왕전>에 기록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기록 누락하였고, 배송지는 제갈량의 기록에만 주석을 달았을 뿐, 사마의의 기록에는 주석도 안 달았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뜬금포로 진서 <선제기>에 부참만계 등장.

확실히 이상하죠.

여담입니다만, 중국의 신화시대 인물로 유명한 삼황오제의 경우 "사마천"은 삼황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다루지 않았는데, 후대에 가서 다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걸 역사학자들은 "후대에 설화들이 모여들고 체계화 되면서 사가들도 새롭게 정리하여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죠. 저도 이 비슷합니다. "부참만계가 사실은 설화였는데 이후에 기록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랄까요? 물론 근거가 없어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지만요..ㅎ

코렐솔라

2014.01.16
19:51:24
(*.166.245.152)
물리적으로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는 완전히 반대되는 기록이나 지리상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끼워맞출 수 있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진수가 감녕전처럼 순서를 완전히 이상하게 기록한(혹은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장합 남정처럼 완전히 다른 지명이 또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정황근건데 반대쪽은 장합이 죽을 정도였다는 것, 그 전에 어떤 기록도 관련된 내용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찬성하는 쪽 중에 원작자는 포상이 있었다는 것이겠죠.

확실히 장합이 죽었더라도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포상 받았다는 것만으로 공이 있다고 가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단 말이죠. 대표적인 예로 석양에서 역대급으로 쳐발리고도 포상받아서 쪽팔려 죽은 조휴도 있고요(…)

진서의 경우 세설신어나 수신기의 기록도 그대로 차용해서 욕을 먹기도 하니까 설화가 진서에서 기록 되었다도 일리있다고 봅니다.(제갈량이 사마의한테 여자옷 보낸 것을 기록했다면 이것과 비슷한 케이스겠죠?) 다만 사마천의 경우는 여와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있고 백이, 숙제 같은 경우도 있어서 약간 애매하지 않을까 싶군요.

사마휘

2014.01.17
11:21:21
(*.234.26.150)
애매하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잊을만 하면 부참만계가 다시 떠오르는 것이겠죠..ㅎㅎ

승룡

2014.01.16
19:43:51
(*.229.34.94)
ㅎㅎ 쫄깃한 내용이긴 한데 또 제갈량이란 이름을 써야 된다고 생각하니 손가락이 모반을.. ^^;

제갈량 탓이 아니겠죠, 나관중이 문제지.. ㅎㅎ

사마휘

2014.01.17
11:24:23
(*.234.26.150)
그래도 나관중이 아니었다면 삼국지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이 있게 생각할만한 계기가 하나 즈음은 더 줄었을거예요..ㅎㅎ
이렇다, 저렇다 해도 삼국지의 세계로 이끈 건 나관중이니까요..ㅎㅎ

나관중 曰 "가자! 삼국지 세계로!"
디지몬 曰 "가자! 디지몬 세계로!"

venne

2014.02.04
23:22:37
(*.111.13.65)
처음 도입부분에선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쭉 읽어보니 기존의 선제기 신빙성 부족의 근거를 뒤집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군요.

저도 선제기는 교차검증하고 필터링하고서 인용하는편입니다만 과장이 좀 심할뿐 선제기 자체가 다 뻥이다라고 말할 순 없지요.

부참만계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사마휘님 주석이 구간구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됬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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