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植字子幹,涿郡涿人也。

노식(盧植)의 자는 자간(子幹)이고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이다.

 

(集解) 沈欽韓曰 名勝志 盧植故宅 在涿州東十五里 地名盧家濼 土壤肥饒 子孫世居焉。

(집해) 심흠한沈欽韓이 말하기를, "『명승지名勝志』에 노식盧植의 고향집이 탁주涿州의 동쪽 15리에 있고, 지명이 노가락이다. 토양이 부드럽고 기름져 자손이 세세도록 살았다고 한다."고 하였다.

 

身長八尺二寸,音聲如鍾。少與鄭玄俱事馬融,

신장은 8척 2촌(후한 도량형 척 기준 약 23.4cm, 따라서 약 192cm) 음성은 종소리와 같았다. 어릴 적에 정현(鄭玄)과 함께 마융(馬融)을 섬겼는데,

 

(集解) 惠棟曰 續後漢書云 與鄭元同門相友。

(집해) 혜동惠棟이 말하기를, "『속후한서續後漢書』에서 정현鄭玄*과 동문으로 서로 친우였다고 하였다."라 하였다.

 

能通古今學,好研精而不守章句。融外戚豪家,[注一] 多列女倡歌舞於前。植侍講積年,未甞轉眄,融以是敬之。學終辭歸,闔門敎授。性剛毅有大節,常懷濟世志,不好辭賦,能飲酒一石。

고금학에 능통하였고, 자세히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나 장구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융은 외척으로 호가(豪家)에 살면서 [注一] 많은 여창(女倡)을 세워 그 앞에서 가무(歌舞)토록 했다. 노식이 시강의 책임을 맡은 해에 일찍이 잠시 눈을 돌림도 없었으니 마융이 이로써 그를 예우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사례하며 돌아가게 되니, 합문(闔門)하고* 교수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굴함이 없었으며 큰 절개가 있었고 항상 제세(濟世)의 뜻을 품고 있어 사(辭)와 부(賦)를 좋아하지 않았고, 능히 술 한 석을 마셨다.

 

(集解) 沈欽韓曰 鄭盧二大儒俱能飮酒一石 然古量三而當今之一不足。 [(集解) 注一]

唐六典三斗爲一 大斗則古三斗 當唐一斗也。

左定八年傳疏斃齊斗稱於古二爲一。

周隋斗稱於古三而爲一。

日知錄宋沈括筆談云 予受詔考鍾律鑄渾儀 求秦漢以來度量 計六斗 當今之一斗七升九合 秤三斤當今十三兩 是宋之權量又大於唐也。元史言,至元二十年,復行宋文思院小口斛。又言世祖取江南,命輸米者止用宋斗斛,以宋一石當今七斗故也。是則元之斗斛又大於宋也。

 

(집해) 심흠한沈欽韓이 말하길 정현과 노식 두 대유는 함께 술 1석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하지만, 옛 도량으로는 3이어도 지금의 도량으로 따지면 1도 되지 않는다.

 

『당육전唐六典』에 3두斗를 1로 한다 하였으니, 대두大斗는 곧 옛 3두斗가 당唐에서는 1두斗에 해당하는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정공定公 8년의 전소傳疏*에 "제齊를 쓰러뜨리고 두斗를 옛 2두를 헤아려 1로 삼았다."*고 하였다.

 

주수두周隋斗*는 옛 3두를 헤아려서 1로 삼았다.

 

『일지록日知錄』의 송나라 심괄의 필담宋沈括筆談에 이른다.

"내가 천자께 조서를 받아 종률鍾律을 고찰하고, 혼의渾儀를 주조하였으며, 진한秦漢 이래의 도량度量을 구하였다. (진한 이래의) 6두斗를 계산하면 지금의 지금의 1두斗 7승升 9합合에 해당하고, 3근斤을 저울질하면 지금의 13냥兩에 해당하니, 이는 송宋의 저울과 되*가 또한 당唐보다 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일지록日知錄』의) 『원사元史』에서는 "지원至元 20년(1283년), 송나라 문사원의 소구곡宋文思院小口斛*을 다시 시행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세조世祖가 강남江南을 취하고, 쌀을 보낼 때 송宋의 두곡斗斛을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명하였는데, 송宋의 1석石은 지금의 7두斗에 해당하는 까닭이었다. 이는 곧 원元의 두곡斗斛 또한 송보다 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集解) 注一] 李時珍本草 古之一升 卽今之二合半 是因而當一也。

[(집해) 주 1]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옛 1승은 지금의 두 합 반이니, 이로 인하여 1에 해당하는 것이다.

 

 

 

* 自注

* 정원鄭元 : 정현鄭玄. 흔히 알고 있는 후한말 대표적 유학자. 자字는 강성康成이고 후한시대 북해군北海郡 고밀현高密縣 사람. 청淸 강희제康熙帝 당시 피휘하여 현玄을 원元으로 바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대 판본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원鄭元이라고 씀.

* 전소傳疏 : 경사자집經史子集 등의 저서에 달려있는 소疏, 즉 주석을 말한다.

* 斃齊斗稱於古二爲一 : 의역된 것인데, 어떻게 읽어야 할 지 기준점이 모호. 다르게 읽는다면 "제두齊斗를 폐하고, 옛 2두를 헤아려 1로 삼았다."라고 할 수도 있을 듯. 하지만 여기서는 춘추좌전 의거 정공 8년에 제나라와 전쟁을 한 기록을 기준으로 하여 일단 "제를 쓰러뜨리다"로 번역함.

* 주수周隋斗 : 익명_3151c6 님께서 ( 원글출처 : http://rexhistoria.net/116285 )

주수두에서 주수는 북주~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알려주셨네요. 


관련 자료로 唐代经学家孔颖达又在《左传正义》中说:“周隋斗秤,以古三而为一。”由此可知,隋初开皇年间统一度量衡时,尺度采用北周市尺。斗秤也以北周时实际达到的量值厘定,即以古斗三升为隋之一升,以古秤三斤为隋之一斤,以此三者定为官府和民间的度量衡标准。隋炀帝继位后,因好古而下令复依古制,但却未有创新,又无定制,复古之举实际上没有在民间推行。


이것과 


公元581年,隋朝王朝建立,隋文帝杨坚继秦始皇后再次统一中国。度量衡也随之再一次统一起来。“周隋斗称,以古三而为一”隋朝度量衡主要以北朝的大制取代了古制。度量衡的再次统一被隋以后的唐朝所沿袭,直至宋、元、明、清各朝代而无大的变化。


이것을 달아둡니다.


* 權量 : 권량權量은 저울과 되를 가리킨다.

* 宋文思院小口斛 : 문사원文思院의 경우 흔히 작화기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공방의 역할을 한 관청이라고 알고 있음. 소구곡小口斛은 이 문사원에서 도량형 제도를 보다 완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곡斛으로 파악하는 것이 알맞다고 여겨짐. 첨언하면 청대 강희제 때의 풍경하馮景夏가 소구곡小口斛을 고쳐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크기는 구경이 5촌 5푼, 밑넓이 1척 6촌 8푼, 높이 1척 2촌 5푼으로 옛 도량형과 용량이 같았다고 하는데 그 옛 도량형이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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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금슬금 시간나는 대로 후한서 집해 노식전을 번역해 보려고 합니다. 허허.


원소전도 얼른 끝내야 하는데 역시 딴짓이 재밌네요. 어쩔 수 없는 딴짓 본능이라니.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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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21:47:14 (*.234.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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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튀김

2014.02.24
22:16:53
(*.147.123.78)
惠楝 : 惠棟의 오기가 아닐까요?

사마휘

2014.02.25
16:56:08
(*.234.26.150)
아, 그러네요. 개선본이 아니라 희미한 글자들이 많아 오독을 하였네요. 楝과 棟이 비슷해 보이다보니..ㄷㄷㄷ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장기튀김

2014.02.24
22:25:36
(*.147.123.78)
斃齊斗稱於古二爲一 : '魏齊斗秤於古二而為一' 란 용례가 보입니다. 斃는 魏의 오자가 아닐지... 즉, '위나라와 제나라의 되'겠군요.

周隋斗 : 周, 隋斗로 끊은 예가 보입니다.

사마휘

2014.02.25
17:02:45
(*.234.26.150)
누가 개선본이 있다면 좀 보여줬으면 싶은 마음입니다. 斃齊斗稱於古二爲一 이 부분은 제가 가진 후한서 집해를 들여다 보아도 魏로 읽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고(솔직히 희미해서 판독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정공 연간에 위를 침략한 기록이 있던가요? 춘추좌전을 봤을 때 본 기억이 없어서 魏가 아닌 斃로 읽었었는데요.
이 부분은 솔직히 지금도 확신이 없습니다만.... 속이 더부룩한 것마냥 어렵네요. 이 부분.

周隋斗 이것은 주나라와 수나라일까요? 주, 수두로 끊었다면 국명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참고로 본 중국쪽 사이트에서는 주수를 인명으로 파악하더라구요.
그래서 주석에도 어렵다라고 써 놨는데, 확실히 국명으로 파악해도 무리는 없겠네요. 도움 감사합니다.

출사표

2014.02.25
00:28:47
(*.177.100.154)
노식이 요즘 가장 궁금했는데..
감사합니다

사마휘

2014.02.25
17:05:06
(*.234.26.150)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열전 자체의 번역은 이미 되어 있는 상태이고, 이 글은 그 번역본에 집해 내용을 껴넣고 있는 글입니다.
집해를 작성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열전 자체만이라면 그걸 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망탁조의

2014.02.25
04:18:17
(*.155.148.94)
세상에 후한서도 집해가 있었군요.

사마휘

2014.02.25
17:05:36
(*.234.26.150)
제가 처음 후한서 집해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네요. 허허. "세상에! 후한서도 집해가 있었구나!"

구라뱅뱅

2014.02.25
10:26:46
(*.49.168.253)
수고하십니다. ^^

사마휘

2014.02.25
17:03:44
(*.234.26.150)
수고랄게 있나요..ㅎㅎ 다 구라뱅뱅님 덕분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venne

2014.02.27
12:59:28
(*.111.13.103)
집해는 노식의 주량까지 파주네요 ㅎㅎ

사마휘

2014.03.22
01:10:35
(*.234.26.150)
* 주수周隋斗 : 익명_3151c6 님께서 ( 원글출처 : http://rexhistoria.net/116285 )
주수두에서 주수는 북주~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알려주셨네요.

관련 자료로 唐代经学家孔颖达又在《左传正义》中说:“周隋斗秤,以古三而为一。”由此可知,隋初开皇年间统一度量衡时,尺度采用北周市尺。斗秤也以北周时实际达到的量值厘定,即以古斗三升为隋之一升,以古秤三斤为隋之一斤,以此三者定为官府和民间的度量衡标准。隋炀帝继位后,因好古而下令复依古制,但却未有创新,又无定制,复古之举实际上没有在民间推行。

이것과

公元581年,隋朝王朝建立,隋文帝杨坚继秦始皇后再次统一中国。度量衡也随之再一次统一起来。“周隋斗称,以古三而为一”隋朝度量衡主要以北朝的大制取代了古制。度量衡的再次统一被隋以后的唐朝所沿袭,直至宋、元、明、清各朝代而无大的变化。

이것을 달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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