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안建安 27년 여름 4월. 유비劉備가 촉蜀에서 황제를 칭하니 곧 위魏의 황초黃初 2년이라 일컬었다. 이때 손권孫權은 공안현公安縣에 있었는데 이를 듣고 내려와 악현鄂縣을 도읍으로 삼고 이름을 무창武昌으로 고쳤으며 별을 보는 자를 불러와 장차 삼분의 계책이 정해질지를 물었다. 5월. 건업현建業縣에 단 이슬이 내렸다. 가을 8월. 무창에 성을 쌓고 명을 내려 여러 장수에게 병사를 이끌고 출입하며 방비하게 했다. 가을 11월. 위는 형정邢貞을 사자로 보내 손권에게 구석九錫을 책명하고 오왕吳王으로 삼았다. 형정이 국문國門에 들어와서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군사軍師 장소張昭는 그 무례함에 노하여 그를 꾸짖어 말했다.

 "군은 강동에 몇 촌의 칼도 없다고 여기고 그런 모양새를 하는 것인가? 남을 업신여김이 어찌 그리도 심한 것인가!"

형정은 급히 수레에서 내려와 여러 신하에게 사죄했다. 책명을 받을 때에 논하기를 의당 한漢의 상장군上將軍과 구주백九州伯을 칭해야지 위에게 책봉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손권은 말했다.

 "구주백이란 이름은 예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다. 옛 패공沛公 또한 항우項羽에게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는데 이는 대개 때를 따라행한 것이었다. 어찌하여 이가 다시 손해가 되겠는가."

끝내 중대부中大夫 조자趙咨를 위에 사신으로 보냈다. 위 문제文帝는 그에게 물어 말했다.

 "오왕은 어떤 군주인가?"

대답하여 말했다.

 "총명하고 명철하고 인의와 지혜가 있으며 또한 웅대하고 방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물으니 조자는 말했다.

 "범상한 자 가운데서 노숙魯肅을 받아들였으니 이는 그의 총명함입니다. 군의 대열 가운데서 여몽呂蒙을 발탁했으니 이는 그의 명철함입니다. 우금于禁을 얻고도 해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의 인의입니다.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형주荊州를 얻었으니 이는 그의 지혜입니다. 세 주를 근거하여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이는 그의 웅대함입니다. 이제 폐하께 몸을 굽혔으니 이는 그의 방략입니다."

또 물었다.

 "오왕은 자못 학문을 아는가?"

대답하여 말했다.

 "오왕은 만 척의 배를 장강長江에 띄우고 갑주 두른 병사 백만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또한 현인과 능력 있는 임용하여 함상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그의 뜻을 둡니다. 여가가 나면 사서를 두루 보아 기이한 뜻을 찾지만, 서생처럼 옛사람의 글귀를 배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또 말했다.

 "오吳는 정벌할 수 있겠는가?"

​조자는 말했다.

 "큰 나라에게는 정벌하는 병사가 있지만 작은 나라는 방비의 견고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말했다.

 "그렇다면 오는 위를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인가?"

조자는 말했다.

 "갑주 두른 백만의 병사를 거느리며 장강과 한수漢水를 해자로 삼았는데 어찌하여 어렵게 여김이 있겠습니까?"​

또 말했다.

 "오에는 대부大夫 같은 이가 얼마나 있는가?"

조자는 말했다.

​ "총명하기가 특히 뛰어난 자라면 팔구십 명이오나, 신과 같은 무리를 찾는다면 너무나 많아 차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대답을 좋게 여기고 그를 두터이 대우했다. 조자는 돌아와서 손권을 설득해 말했다.

 "신이 북방을 관망하니 종국에는 동맹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조정에게 한의 4백여 년을 잇게 하여 동남의 운수에 응하고, 연호를 고치고 복색을 바로 하여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뜻에 순응하소서." [61]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도위騎都尉를 배수했다.

 이해, 유비는 관우關羽가 살해당한 것을 원망하여 병사를 크게 일으켜 내침했다. 무산巫山에 이르러 무릉군武陵郡의 오계만五溪蠻을 꾀어 반란하게 하니 손권은 대장군大將軍 육손陸遜에게 이를 막게 했다. 남군태수南郡太守 제갈근諸葛瑾은 이때 공안현公安縣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사자를 통해 글을 보내어 유비에게 화해하는 것의 옮고 그름을 논했다. 어떤 이는 그가 따로 측근을 보내 유비와 내통한다고 참소했다. 육손은 이를 알았지만 제갈근에게는 알리지 않고 의심을 흩어 버렸다. 손권은 회보하여 육손에게 말했다.

"자유​子瑜가 나와 더불어 사업에 참여한 것은 수 년째의 일이니 그 은혜가 마치 골육과 같소. 나는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아오. 그는 길이 아닌 곳으로는 다니지 않는 사람이오. 현덕玄德이 일전 공명孔明을 이르게 하자 나는 자유에게 말했소. '경은 제갈량諸葛亮의 동복형제이며 아우가 형을 따르는 것은 의에 순응하는 것이오. 어찌하여 그를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자 자유는 대답하여 말했소. '공명이 사람에게 자신을 맡긴 데에 두 마음이 있지 않습니다. 아우가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것은 신이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신명을 꿰뚫기에 충분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그러한 일이 있겠소? 나는 일전 망령된 글을 받자 곧장 그것을 봉하여 자유에게 건네고 또한 손수 글을 써 그에게 보였소. 그리고 대답을 받았는데 그것은 천하 군신의 큰 절개가 한 번 정해지고 나뉜 것에 대하여 논한 것이었소. 나는 자유와 더불어 신령스러운 사귐을 하고 있다고 할 만하니 바깥의 말은 그 사이에 낄 수 없소. 경의 뜻이 지극함을 알았으니 그 표를 곧장 봉해 자유에게 보여 나의 뜻을 알게 하겠소."

 건안建安 28년 봄 정월. 촉蜀의 군대는 앞뒤로 50여 채의 영채를 세우고 험지를 나누어 근거해 진군하여 마안산馬鞍山에 올랐다. 육손陸遜은 여러 장수를 감독해 일의 경중에 따라 대응하게 하여 적의 네 면을 에워싸 공격했다. 윤달 정월. 오둔五屯에서 촉의 군대를 크게 깨뜨려 그 장수를 베고 기를 뽑아 달아나는 적을 북쪽으로 내쫓았다. 여러 영채가 모두 함몰되니 만여 명이 투항하고 그 병량과 기물을 모두 얻었다. 유비劉備가 달아나자 육손은 부장 손환孫桓에게 투구를 쌓아 길을 막게 했으며 [62] 그 지름길을 끊어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했다. 유비는 산과 험지를 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백제성白帝城에 들어갔다.

​ 2월. 손권孫權은 촉蜀을 깨뜨린 일을 위魏에 알렸다. 위는 시중侍中 신비辛毗와 상서尙書 환계桓階를 보내 맹약하게 하고 [63] 또한 그와 더불어 임자任子를 보내도록 했으나 손권은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위魏는 조휴曹休와 장료張遼 등에게 명을 내려 군을 크게 일으키고 수 개의 길로 핍박하여 들어가게 했다. 손권孫權은 여범呂範과 제갈근諸葛瑾 등에게 장강의 가장자리를 지키게 했으며, 육손陸遜에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과 영주목郢州牧을 배수하고 [64] 강릉후江陵侯와 가황월假黃鉞钺을 봉하여 장강長江을 건너 위를 막게 했다. 또한 장군 주환朱桓을 유수독濡須督으로 삼고 신성정후新城亭侯에 봉했다. 위는 은밀히 대사마大司馬 조인曹仁에게 보병과 기병 수만을 이끌고 유수濡須로 향하게 하여 주환을 취하고자 했다. 조인이 동쪽으로 이계羨溪를 공격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니 주환은 병사를 나누어 이계로 보냈다. 병사가 출발하자 조인은 나아가 유수 근방 70리를 모두 막았다. 주환은 이계로 간 병사를 불러 다시 돌아오게 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 조인은 느닷없이 성 밑에 이르렀다. 주환에게는 이때 병사와 관리 5천 명이 있었는데, 엄명을 내려 기를 눕히고 북을 쉬어 밖에 허약함을 보이고 유인했다. 조인은 그의 아들 조태泰로 하여금 이를 공격해 들어가게 하고 스스로는 만여 명을 이끌어 뒤를 막았다. 주환은 보병을 나누어 조인을 대적하게 하고 몸소 조태를 막아 깨뜨렸다. 조태가 영채를 불사르고 달아나니 이를 추격하여 수천 급의 머리를 베었다. 조인이 물러나자 여러 군세는 승세를 타고 조휴와 장료 등을 깨뜨렸다. 위는 군을 인솔하여 물러났다. 진서장군鎭西將軍 육손 등은 여러 장수를 이끌고 표를 지어 손권이 왕위에 오르기를 청했다.

​ 겨울 11월. 손권孫權은 무창武昌에서 오왕吳王에 즉위해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황무黃武 원년으로 고쳤다. 처음으로 승상丞相을 두고 양이후陽羨侯 손소孫劭에게 이를 관장하게 했다. [65] 아들 손등孫登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11월. 촉蜀은 사자를 통해 손권에게 글을 전했으며 [66] 스스로를 책망하고 우호를 영원히 가꾸기로 했다.

 

 12월. 대중대부大中大夫 정천鄭泉을 보내 백제白帝에서 유비劉備를 방문하게 하여 비로소 우호를 다시 통하게 했다. 정천이 촉蜀에 이르자 촉의 군주는 그에게 물었다.

 "오왕吳王은 어찌하여 짐의 글에 답하지 않는 것인가. 혹여 짐이 명분을 바로잡은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여 그런 것인가?"

​정천은 말했다.

​ "조조曹操 부자가 한실漢室을 능멸하여 종국에는 그 지위를 빼앗았습니다. 폐하께서는 종실로 의지 받아 황실 적손의 중함이 있었지만 무기를 들고 해내海內를 선도하기는커녕 스스로의 이름만 높이고 계십니다. 이는 천하의 의로움에 합치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의 과군寡君은 답신을 보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유비는 크게 부끄러워했다.

정천의 자는 문연​文淵이며 진군陳郡 사람이다. 널리 배워 고아한 자태가 있었다. 성품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매양 한가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맛 좋은 술 5백 곡을 얻고 사철의 맛난 음식을 두어 한 쌍의 상을 차리고 싶다. 그리고 돌이켜 술독에 빠져 취할 때까지 마시다가 지치면 잠시 쉬며 안주를 맛보고 싶다. 술이 떨어지면 다시 채우면 되니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그는 죽을 때가 되자 동료에게 일러 말했다.

 "나를 꼭 도자기 집 옆에다 장사지내 주게나. 수백 년이 지나 흙이 되면 눈에 띄어 술독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일세."

​ 이해. 이릉​夷陵을 고쳐 서릉西陵으로 삼았다. 조서로 양주揚州에 목牧을 두고 단양태수丹楊太守 여범呂範을 양주목揚州牧으로 삼았다. 동정장군東征將軍 고서高瑞에게 단양태수를 관장하게 하고 치소를 건업현建業縣에서 무호현蕪湖縣으로 옮겼다.

 이때 양주는 14개 군과 148개 현을 통솔했으며 단양군丹楊郡은 ​19개의 현을 관장했다.

 황무黃武 2년 봄 정월. 강하군江夏郡에 무창궁武昌宮을 지었다. 《사분력四分曆》을 고쳐 《건상력乾象曆》을 사용했다. 토행土行으로 한漢을 대신한다 하여 인寅을 세우고 한 해의 첫머리로 삼았다.

 3월, ​위魏의 군대가 모두 물러가니 나라의 경계가 평안해졌다.

 여름 4월. 승상丞相 손소孫劭와 대장군大將軍 육손陸遜이 여러 신하를 이끌고 표를 올려 천명과 상서로운 조짐을 칭하고 황제의 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오왕吳王이 재차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자 여러 신하는 말했다.

 "한가漢家는 쇠퇴하여 존립을 구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이를 다투려 하십니까?"

 상고하건대, 《강표기江表記》에서 이르기를.

 『손권孫權은 장수와 재상들에게 일러 말했다.

 "지난날 과인은 현덕玄德이 서쪽 변경으로 향해 오자 육손에게 무리를 뽑아 이를 대비하라고 했소. 듣기로는 북부에서 병사를 나누어 과인을 돕고자 한다고 했지만 과인은 내심 그 형상을 꺼렸소. 하지만 만일 이를 받지 않는다면 서로 서로를 욕보이고 뜻을 취하게 하여 양쪽에서 적을 상대해 나라의 고통이 될 것이기에 이로써 뜻을 억누르고 그들의 왕작을 받은 것이오. 당시 몸을 낮춰 뜻을 굽힌 의미를 제군이 아직 모르는 듯하기에 이제야 이를 설명할 뿐이오."』

 촉​蜀의 군주 유비劉備가 백제白帝에서 죽으니 오왕은 입신도위立信都尉 풍희馮熙로 하여금 촉에 가 조문하게 했다.

​ 5월, 곡아현曲阿縣에 단 이슬이 내렸다.

 겨울 11월, 촉은 ​등지鄧芝를 보내 말 2백 필과 비단 천 단을 가지고 오를 방문하게 했다. 이 뒤로 사자가 왕래하며 방문할 때에는 항상 각각의 방물로 그 후의를 권면했다.

​ 황무黃武 3년 가을 9월. 위魏의 대군이 들어와 약탈했다. 조비曹丕는 광릉군廣陵郡에서 나와 대강현大江縣에 임했는데 병사는 십여 만이었으며 기치는 수백 리에 이르렀다. 오왕吳王은 여러 장수로 하여금 이를 막아 지키기를 꾀하게 했다. 안동장군安東將軍 서성徐盛은 성곽을 쌓자는 계책을 내어 얇은 울타리를 짓고 그 위에 가짜 누각을 올렸으며 장강長江 가운데에 많은 배를 띄워 기치를 늘여세웠다. 또한 산의 험지에 풀로 사람 형상을 엮어 갑주와 투구를 입히니 무창武昌에서 경구京口까지 봉화의 연기가 서로 보였다. 여러 장수는 이가 이로움이 없다고 여겼으며 오왕 또한 그렇게 여겼다. 위 문제文帝는 장강에 임했으나 감히 도강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한탄하여 말했다.

 "하늘은 굳게 오吳와 위를 나누었다. 저들에게는 인물이 있구나."

그리고 물러났다. 오의 장수 손소​孫韶는 앞서 장강의 북쪽에 주둔했는데 위의 군사가 물러남을 듣고 장군 고수高壽에게 감사병敢死兵 5백 명을 이끌고 밤에 지름길의 요지로 파견했다. 위의 황제는 놀라 패하여 수춘현壽春縣까지 달아났다. 고수는 위의 치중과 우개羽蓋를 노획하고 돌아왔다. [67]

 겨울 10월 그믐. 식이 있었다.

​ 황무 4년 여름 5월. 승상丞相 손소孫劭가 죽어 시호를 숙肅이라 했다.

 손소의 자는 장서長緒이며 북해국北海國 사람이다. 신장은 8척이었다. 처음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의 공조功曹가 되었다. 공융은 그에게 조정 공경의 재주가 있다고 평했다. 한漢 말에 유요劉繇를 따라 장강長江을 건너 나라로 돌아갔다. 누차 거기장사車騎長史를 배수받았으며 오吳의 수상首相이 되어 양이후陽羨侯에 봉해졌다.

 본래 손소가 죽자 여러 신하는 승상에 누후婁侯 장소張昭를 천거했다. 오왕吳王은 말했다.

​ "과인이 어찌 자포子布를 두려워하겠소. 다만 승상의 자리는 일이 번잡한데 이 공의 성품은 강직하니 말을 들어도 따르지 않아 장차 원망과 허물이 일어날 것이기에 이를 더하지 아니한 것이오."

 6월. 태상​太常 고옹顧雍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예릉후醴陵侯에 봉했다.상서尙書 진화陳化를 태상太常으로 삼았다.

 ​진화의 자는 원요元耀이며 여남군汝南郡 사람이다. 어려서 여러 책을 널리 읽었으며 강직하고 굳센 기운이 있었다. 신작은 8척 9촌이었고 고고했으며 위용이 있었다. 처음 낭중郎中을 배수받고 위魏에 사자로 갔는데 [68] 위 문제文帝는 술에 거나하게 취하여 그를 희롱해 말했다.

 "오吳와 위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장차 어느 쪽이 해내海內를 하나로 평정할 것 같소?"

진화는 말했다.

 "《역易》에서는 황제가 진震에서 난다고 합니다. 앞서 천명을 들어 깨달았고 옛 설에서는 황기자개黃旗紫蓋라 했으니 운수는 동남쪽에 있습니다."

황제는 말했다.

​ "옛 문왕文王은 서백西伯으로 천하의 왕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이가 동쪽에 있겠소?"

진화는​ 말했다.

 ​"주周의 처음 기반인 태백泰伯은 동쪽에 있었으니 이가 문왕이 서쪽에서 일어난 까닭입니다."

황제는 웃고 그를 힐난하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그의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두터운 예로 송환했다. 오왕吳王은 그가 명을 받들어 나라를 빛냈으므로 건위태수犍爲太守로 삼았다. 재차 들어감을 쫓아 상서로 옮기고 얼마 뒤 태상을 배수하여 상서와 겸직하게 했다. [69] 조정에 서서는 안색이 곧았으며, 아들과 형제들을 꾸짖어 밭과 뽕나무밭을 폐해 산업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봉록에 의지하여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았다. 처가 일찍 죽었으나 옛일을 거울삼아 후실을 들이지 않았다. 오왕은 이를 듣고 그를 귀하게 여겼으며 그가 아직 젊고 장성하니 칙서를 내려 종정宗正으로 하여금 그에게 종실의 딸을 짝지어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70세에 자신의 늙음을 상소하고 이에 장안현章安縣에 거하다가 집에서 죽었다. 아들 진치陳熾가 후사를 이었다.

 고옹의 자는 원탄元凱 [70] 이며 오군吳郡 사람이다. 어려서 채백계蔡伯喈를 좇아 금琴을 배웠으며 그의 사람됨을 사모해 이에 이름을 옹雍으로 고쳤다. 처음 주와 군이 표를 올려 그를 천거했으며 누차 옮겨 상서에 이르고 [71] 양수향후陽遂鄉侯에 봉해졌다. 후작侯爵을 배수받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의 집안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 했다.

 고옹의 사람됨은 술을 하지 않고 말수가 적었기에 조정은 이를 꺼렸다. 승상이 되고 각기 적소에 뽑아 임용하니 그 마음에 적막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정사의 마땅함을 물어 은밀히 그 대답을 받고 납득할 만한 것은 주군에게 돌려보냈으나 그렇지 않은 것은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이로써 중히 여김을 받았다

 가을 7월. 환구皖口에서 두 나무가 맞닿았다는 말이 있었다. 또한 땅에 연이어 지진이 있었다.

분류 :
오(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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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4.11.27
23:46:27 (*.28.229.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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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스

2014.11.30
23:31:25
(*.144.59.105)
'건안建安 27년 여름 4월. 유비劉備가 촉蜀에서 황제를 칭하고 황초黃初 2년이라 일컬었다.'

원문부터 황초인가요? 촉의 첫 연호는 장무였는데...

희단

2014.12.01
18:25:13
(*.28.227.38)
아, 이건 제가 번역하다 실수한 부분이네요. 원문은 '劉備稱帝號于蜀,即黃初二年也'로 직역하면 '유비가 촉에서 황제를 칭하니 곧 (조위의) 황초 2년이다'인데 생략된 부분을 지나치고 촉의 연호로 헷갈린 모양입니다 ^^;

아리에스

2014.12.01
19:29:39
(*.144.59.105)
제가 수정했습니다.ㅎㅎ

코렐솔라

2016.04.25
09:42:46
(*.166.94.193)
투구를 쌓아라는 부분에는 해당 한자가 오자라는 의견도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http://rexhistoria.net/15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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