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黃武 5년. 대장군大將軍 육손陸遜이 적의 약탈이 없음을 상주하여 여러 장수로 하여금 넓은 농경지를 경작하게 하기를 청했다. 오왕吳王은 이를 허락하고 좋게 칭찬하여 말했다.


 "나 또한 나의 자제를 이끌고 손수 밭을 받았소. 수레에 여덟 마리의 소를 매어 네 쌍씩 나란히 끌게 하고 무리와 더불어 수고를 균등히 나누었소."


 여름 5월. ​위魏 문제文帝가 죽었다.

 가을 7월. ​창오군蒼梧郡에서 봉황鳳凰이 보였다. 이달 동안군東安郡을 두고 치소를 부춘현富春縣으로 했다.

​ 겨울 11월. 육손陸遜이 편의로 아뢰어 덕을 베풀어 형벌을 완화하고 조세와 부세를 너그러이 하기를 청했다. [72] 오왕은 답하여 이가 좋다고 했다. 이에 맡은 관리에게 명하여 법률의 좋고 나쁨을 조목으로 만들어 본뜨게 하고 중랑中郞 저봉褚逢으로 하여금 육손을 수행하게 하여 제갈근諸葛瑾과 함께 이를 가감하게 했다. [73] 위장군衛將軍·교지태수交趾太守·용편후龍編侯 사섭士燮이 죽었다.

 사섭의 자는 위언威彦이며 창오군蒼梧郡 광신현廣信縣 가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했다. 한漢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임시로 상서랑尙書郞이 되었으나 공적인 일로 면직되었다. 재차 무재茂才로 천거받아 무령巫令을 제수받았다. [74] 누차 옮겨 교지태수交趾太守가 되었다. 한 말에 교주자사交州刺史 주부朱符가 만이의 도적에게 살해당하니 주와 군이 소란했다. 사섭은 이에 표를 올려 동생인 사도연司徒掾 사일士壹에게 합포태수合浦太守를 관장하게 하고 둘째 동생인 서문령徐聞令 사유士鮪에게는 구진태수領九眞太守를 관장하게 했으며 [75] 사유의 동생인 사무士武에게는 남해태수南海太守를 관장하게 했다. 그들 형제는 나란히 여러 군에 있으며 한 주를 웅거하니 치우침이 만 리에 있어 그보다 위엄 있는 자가 없었다. 출입할 때는 종과 경쇠를 울리고 고취鼓吹를 갖추었으며 수레와 말은 길을 가득 채웠다. 또한 만이로 양옆에서 분향하는 이는 항상 수십 명이 있었다. 처와 첩은 치차輜車와 병거輧車를를 탔으며 자제에게는 보병과 기병이 따랐다. 당시의 귀중함이 이와 같아 백 종족의 만이는 떨며 복종했다.

 사섭의 기질은 관용이 있고 온화했으며 아래로 선비들을 겸허하게 대했기에 중국中國의 인물들은 어려움을 피해 그에게로 많이 와 의탁했다. 매양 공적인 일이 끝나면 글을 익히고 후세에 전하기를 즐겨 《좌씨춘추左氏春秋》와 《상서尙書》 고문의 대의를 주해했다. 이때 천하가 어지러워 사방이 단절되었지만 사섭은 공물과 부세 바치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오왕이 보즐步骘로 하여금 남쪽 땅을 평정하게 하자 사섭은 형제를 이끌고 왕의 절도를 받들었다. 매양 여러 가지 향로·촘촘한 갈포·명주·큰 조개·유리·바다 거북·비취·무소·코끼리·진기한 과일을 바쳐 해마다 이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섭은 4군에 40여 연간 있었고 90세에 죽었다.

​ 오왕은 교지군交趾郡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이에 합포군合浦郡 북쪽을 나누어 광주廣州로 삼고 여대呂岱에게 자사를 배수했으며 교지군 남쪽은 교주交州로 두고 대량戴良에게 자사를 배수했다. 사섭을 대신하여 진시陳時를 교지태수로 삼았다. 대량과 진시가 합포군에 이르기 전 사섭의 아들 사휘士徽는 자신을 교지태수에 임명하고 종족의 병사를 일으켜 대량을 막아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왕은 여대에게 칙명을 내려 대량과 더불어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게 해 사휘를 주살하고 그 머리를 무창에 전했다.

 황무黃武​ 6년 봄 정월. 한당韓當의 아들 한종韓綜이 무리를 이끌고 배반해 위魏에 귀부했다. [76]

 황무黃武 7년. 동안군東安郡을 폐했다.


 여름 5월. 파양태수鄱陽太守 주방周鲂은 위魏의 장수 조휴曹休를 속여 유인하고 그에게 준 일의 일곱 조목을 은밀히 오왕吳王에게 표로 올렸다.

 8월. ​오왕은 환구皖口에서 행차하여 대장군大將軍 육손陸遜으로 하여금 중군을 감독하게 하고 전종全琮과 주환朱桓을 좌우로 삼아 위의 군사를 협석정夾石亭에서 크게 깨뜨렸다. [77] 사로잡은 수가 수만을 헤아렸으며 그 노새와 말과 치중을 모두 거두었다. 조휴는 가까스로 달아나 이를 면했다.


 겨울 10월. 장군 적단翟丹이 과실을 범하여 위로 도망하자 오왕은 명을 내려 군 가운데의 여러 장수에게 세 번의 죄를 저지른 뒤에야 그 처벌을 논하겠다고 했다.


 이해. 합포군合浦郡을 주관군珠官郡으로 고쳤다. 대사마大司馬·남창후南昌侯 여범呂範이 죽었다.

 ​여범의 자는 자형子衡이며 여남군汝南郡 세양현細陽縣 사람이다. 어려서 현의 벼슬아치가 되었다. 용모와 자태가 있었으나 집은 가난했다. 그가 사는 현에는 부자 유씨劉氏가 있었는데 그의 딸에게는 미색이 있었다. 여범은 그녀와 혼인하기를 구했으나 그녀의 모친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에 말했다.

 "어찌 여자형呂子衡 같은 이가 오랫동안 가난하겠습니까?"

마침내 그와 혼인했다.

​ 뒤에 어려움을 피하여 수춘현壽春縣으로 가 장차 빈객 백여 명과 장강長江을 동쪽으로 건너려 했다. 손책孫策은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강도현江都縣으로 보내 태비太妃 맞이하여 돌아오게 했다. 손책은 그를 친척과 같이 대우했으며 함께 당에 오라 태비의 앞에서 먹고 마셨다. 그는 물러나길 구하여 도독都督에 임명되었으며 그 무리가 정연해지자 손책에게 나아가 말했다.

 "고양을 버리고 장군께 의탁한 자는 처자를 돌보지 않고 다만 장군과 더불어 세상을 구하는 데에만 힘쓰고자 합니다. 이미 같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으니 일을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모두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에 편장군偏將軍을 제수받고 내외의 일을 맡았다.

​ 오왕이 사업을 통솔하자 여범은 더욱 중히 여김을 받았는데 그가 일찍이 엄준嚴畯과 논하길 여범은 오한吳漢과 견줄 만하다고 했다. 승진해 팽성태수彭城太守를 관장하고 주유周瑜와 함께 조조曹操를 적벽에赤壁에서 깨뜨렸다. 그 공으로 평남장군平南將軍으로 승진해 대상大桑에 주둔했다. 재차 건업현建業縣으로 들어왔다. 황무 원년 양주목揚州牧으로 옮겨졌다. 황무 7년 대사마大司馬를 배수받고 남창후南昌侯로 고쳐 봉해졌다. 인수印綬가 비로소 내려왔을 때에 죽었다. [78] 오왕은 소복을 입고 애도했다. 황룡黃龍 원년 장차 아래로 건업현建業縣을 도읍하려 할 때 오왕의 행차가 여범의 묘를 지났다. 오왕은 태뢰太牢로 그를 제사했으며 손수 술잔을 잡고 울부짖었다.

 "자형은 나를 따랐도다!"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눈물을 드리웠다. 여범의 성품은 바르고 꼿꼿했으며 위용이 있었으나 사치를 좋아했다. 하지만 공적인 일에 힘쓰고 법을 받들었기에 오왕은 그를 깊이 의지했다.

 상고하건대,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기를.

 『손권孫權은 일찍이 엄준에게 말했다.

 "여자형은 충성심이 두터웠으며 마음이 밝고 올곧았소. 성품은 비록 사치를 좋아하였으나 그보다는 공적인 일을 앞서 염려했으니 그것이 그의 흠이 되기는 부족하오. 원술袁術을 피해 형께로 돌아와 큰 장수가 되어 따로 부곡을 이끌었고, 형의 일로 근심하여 내려와 도독이 되기를 청해 우리의 군을 힘써 정돈했소. 거기에 근면함과 삼가는 성품까지 갖추었으니 그것이 내가 그를 오한의 무리라 평하는 이유이오. 이는 모두 뜻이 있는 것이지 나의 사사로운 마음이 아니오."』

 오吳 상편 각주

​ [1] 오 상편 본래 「오 상편吳上」 두 자는 빠져 있었으며 〈고본庫本〉에서 「오吳」 자가 확인될 뿐이다. 하지만 본디 책에는 차례가 있어야 함에 근거하여  「오 상편」이란 말을 추가하여 고쳤다.

​ [2] 건업은 초의 옛 금릉 땅이다 그 앞 행에는 본래 「오吳 태조太祖」라는 표제 세 자가 있었지만 이제 〈고본〉에 근거하여 이를 삭제했다.

 [3] 매리의 평허에 거했는데 이는 오늘날 상주​ 무석현 동쪽의 30리이다 《사기史記〈오태백세가정의吳太伯世家正義〉에서 이르길 매리는 『오늘날 상주 무석현 동쪽의 60리이다』.

 [4] 〈진본기〉에 보이는 위남군~촉군이 이상의 36개 군이다 위남군渭南郡·하상군河上郡·중산군中山郡·평원군平原郡」은 《사기》 〈진시황본기집해秦始皇本紀集解〉에 따르면 「검중군黔中郡·장사군長沙郡·내사군內史郡·구원군九原郡」이다. 이는 《건강실록建康實錄》의 잘못이다.
 [5] 초가 망한 뒤 13년이 지난 시황 36년 시황은 동쪽을 순행하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와 《자치통감資治通鑑》 7권에서 모두 이르길 시황始皇이 동쪽으로 순행한 것은 재위 37년의 일이라 한다. 진秦이 초를 멸한 것은 시황 재위 24년의 일이며 이에 「초가 망한 뒤 13년이 지난」이라는 말로 추산하면 역시 시황 37년의 일이다. 따라서 「36년」은 「37년」이 되어야 한다.

​ [6] 한 무제 원봉 2년~12주에 자사刺史를 두어 천하의 군을 다스리게 하니 《한서》 〈무제기〉에 안사고顔師古가 주석으로 인용한 《후한의漢舊儀》 및 《자치통감》 21권에서 모두 이르길 한 무제武帝 원봉元封 5년에 「비로소 13주에 자사부刺史部」를 두었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면 「2년」은 「5년」으로 되어야 하고 「12주」 또한 「13주」가 되어야 한다.
 [7] 양주자사 유요는 원술袁術에게 핍박받아 「원술袁術」은 〈저본底本〉에서 「원술袁述」로 되어 있었는데 「감초본甘鈔本」과 「서초본徐鈔本」에서 이를 개정했다. 유요劉繇가 원술에게 핍박받은 일은 《삼국지三國志《오지吳志유요전劉繇傳〉에 보인다.
 [8] 말성현 《한서》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선성현宣城縣」이다.

 [9] 오 태조 대황제 상편 「태조太祖 상편上」위에는 본래 「오」 자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도 「태조太祖 하편下 폐제廢帝 경제景帝 후주後主」라는 아홉 자가 있었지만 〈고본〉에 근거하여 모두 삭제했다.
 [10] 한漢에 임관하여 ​파로장군·장사태수가 되었다 도차陶劄가 이르ㅍ 『《오지》 〈손견전孫堅傳〉에 근거하면 손견孫堅은 장사태수長沙太守로 병사를 일으켜 동탁董卓을 토벌했다. 노양현魯陽縣에 이르자 원술은 표를 올려 손견에게 파로장군破虜將軍을 행하게 했다. 손권이 병사를 일으키기 전 파로장군으로 병사를 일으켰다는 서술은 잘못이다」.
 [11] 동탁을 토벌해 그의 군을 양하현에서 깨뜨렸다 「양하현陽夏縣」은 《삼국지》 《오지》 〈손견전〉에 따르면 「양인현陽人縣」이다. 도차가 이르길 『《건강실록》에 「양하현」이라 되어 있는 것은 잘못이다』. 도씨陶氏의 설은 옮으며 《자치통감》 60권 또한 「양인현」이라고 하고 있다.
 [12]​ 호옥은 남쪽 사람의 물품을 강탈하여 도차가 이르길 『《건강실록》의 「남南」 자는 「상商」자의 오기이다. 도씨의 설은 옮으며 《오지》 〈손견전〉에 「장사치賈人」라 되어 있는 것 또한 이를 증명한다.

 [13] ​상고하건대, 《지림》에서 이르기를 『손견에게서는 5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손책·손권·손익·손광은 오씨 소생이며 손인은 서자이다』 「지림志林」은 본래 「지」로 되어 있었고 「서자庶子」 또한 「희자戲子」로 되어 있었다. 도차가 이르길 『《오지》 〈손견전〉에 주석된 《지림》에서 말하길 「손견에게서는 5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손책孫·손권孫權·손익孫·손광孫은 오씨吳氏 소생이며 작은아들 손량孫朗은 첩의 소생인데 손인孫仁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건강실록》을 상고하건대 「지」 아래에는 「림林」 자가 빠져 있었다. 《건강길록》 〈사초본〉은 「희」 자를 「서」자로 고쳤다. 도씨의 설은 옮다. 〈고본〉에서는 이가 곧 「지림」이라 했으니 이에 근거하여 고친다.
 ​[14] 표를 올려 손책을 한의 절충교위로 삼고 여강태수 육강을 깨뜨리게 했다 도차가 이르길 『《오지》 〈손책전孫策傳〉에 따르면 원술이 표를 올려 손책을 절충교위로 삼은 것은 육강을 깨뜨린 뒤이니 이것이 옮다』.
 [15] 동지가 스스로 여릉태수가 되었으니 「여릉廬陵」은 본래 「여강廬江」으로 되어 있었다. 도차가 이르길 『《오지》 〈태사자전太史慈傳〉에 주석된 《강표전江表傳》에서는 「또한 단양군丹陽郡 사람 동지僮芝는 여릉군廬陵郡을 제멋대로 하여 스스로 조서를 받았다고 거짓말해 태수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상고하건대 《건상실록》의 「여강」은「여릉」의 오기이다』. 도씨의 설은 옮다. 〈주초본周鈔本〉은 이를 「여릉」으로 개정했다. 동지가 여릉군을 근거한 일은 또한 《자치통감》62권에 보이니 이를 근거하여 고친다.
 [16] 상고하건대, ​《강표전》에서 이르기를 「상고하다案」는 본래 「꾀하다策」라는 말로 되어 있었다. 역교酈校가 이르길 「꾀하다」는 마땅히 「상고하다」가 되어야 한다』. 역씨氏의 설은 옮으니 이제 이에 근거하여 고친다.
 [17] 재차 그의 아들 조장에게 손책의 종형 손분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게 했다 「장章」 자는 마땅히 「창彰」으로 해야 하니 이는 조조曹操의 아들인 임성국任城國 위왕威王 조창曹彰을 말하는 것이다.

 [18] 단도현 본래는「단양군丹陽郡」으로 되어 있었다. 〈주초본〉 및 《오지》 〈손견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는 나란히 「단도현丹徒縣」으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옮다. 이제 이를 근거하여 고친다.
 [19] 유업을 창성하게 해 「창성하게構」라는 말은 본래 없었다. 〈송본宋本〉은 고종高宗의 이름을 피휘하여 그 자를 모두 빈 공간으로 두었다. 어떤 이가 주석하길 「지금 주상의 이름이다」 라고 했으며 뒤의 본 역시 이것을 따랐다. 〈고본〉과 〈사초본〉 《오지》 〈장소전張昭傳〉에 모두 그 자가 있으니 이제 이를 따라 고친다. 아래의 것은 일일히 언급하지 않는다.
 

 [20] 강표기 《오지》 〈손권전孫權傳〉에는 《강표전》으로 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 〈경적지經籍志〉 상편과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나란히 이르길 「《강표전》다섯 권은 우부虞溥가 찬술했다」.
 [21] 2만 명에게 《자치통감》 63권은 「2만여 명」이라 하고 주초본《오지》 〈손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강표전》에서는 「3만여 명」이라 한다.
 [22] 이해 단양도위​ 규람~모의하여 태수 손익을 살해했다 도차가 이르길 『《오지》에 따르면 손익孫翊이 해를 당한 것은 건안 9년의 일인데 《건강실록》에는 건안 10년 조에 실려 있으니 이는 잘못이다』. 도씨의 설은 옮다. 《자치통감》 64권 또한 건안 9년의 일로 기재하고 있다.

 [23] ​노모에게 안부를 물었다 「묻다問」는 본래 「이간하다間」로 되어 있었다. 도차가 이르길 『《건강실록》의 「이간하다」는 「묻다」의 오기이다』. 도씨의 설은 옮다. 송본《오지》 〈태사자전〉에서는 모두 「묻다」라 하고 있으니 이제 이에 근거하여 고친다.

 [24]​ 문하도독 〈주초본〉의 주석에서 이르길 『「도都」 자는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지》 〈태사자전〉에서는 「문하독門下督」이라 했다.

​ [25] 이에 공로가 저로 하여금 여강을 공격하게 하였으니 도차가 이르길 『《오지》 〈태사자전〉에 주석으로 인용된《강표전》은 손책이 한 말을 「그로 인하여 공로가 저로 하여금 여강을 공격하게 하였으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상고하건대 《건강실록》의 「이에」는 「그로 인하여」의 오기이다. 〈서초본〉에는 「여강廬江」 아래에 「태수太守 육강陸康」이라는 네 자가 주석되어 있었다.

​ [26] 다만 그 뒤 공로가 신하의 절개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버려 간사하고 참람된 일을 꾸몄기에 「참람된」이라는 말은 본래 「참소하다讒」로 되어 있었다. 도차가 이르길 『《오지》 〈태사자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은 「참소하다」란 말을 「참람된」으로 하고 있다. 상고하건대 《강표전》에 「참람된」이라 되어 있는 것이 옮다. 〈서초본〉은 이를 「참람된」으로 교정했다』. 도씨의 설은 옮다. 〈주초본〉 및 〈유초본劉鈔本〉에서도 「참람된」이라 했으니 이제 이를 근거하여 고친다.
 [27] 유공이 이미 망해 죽어 오지》 〈태사자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은 「유요가 이미 죽어劉繇喪亡」라고 하고 있다. 〈주초본〉의 주석에서 이르길 『처음에 유요劉繇를牧이라 칭했으니 뒤에 그를 공公으로 부름은 옮지 않다. 손책은 유요로부터 심한 경시를 당했으니 본래와 같이 유요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28] 여강 도차가 이르길『「‘강江」 자는 잘못이다. 《오지》 〈태사자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은 「여릉」이라 한다』.

 [29]​ 그 절개가 다하는 건 이르길 『《오지》 〈태사자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는 「그其」 자가 「바라건대期」로 되어 있으니 이것이 옮다.』

 [30] ​원숭이 같은 팔로 활을 쏘는 데 능숙해 「원숭이猨」는 본래 「긴팔원숭이蝯」였으나 이제 〈고본〉·〈서초본〉·〈주초본〉·〈유초본〉 및 《오지》 〈태사자전〉을 근거하여 이를 고친다. 흑선풍黑旋風이 단 주에서 이르길 『「원숭이猨」와 「긴팔원숭이蝯」의 간체자는 모두 「원숭이猿」이다.』

 [31] 이​때의 나이 42세였다 「42세」는 〈서초본〉과  《오지》 〈태사자전〉에서 모두 「41세」로 되어 있다.

 [32]​ 시신현과 본래는 「시소현始所縣」으로 되어 있었으나 〈서초본〉과  〈주초본〉과 《오지》 〈손권전〉을 근거하여 이를 개정한다.

 [33] ​손권은 이를 허락하고 은밀히 그를 올려보내 조조의 빈틈을 관찰하게 했다 도차가 이르길 『상고하건대 《건강실록》에 손권이 노숙을魯肅 올려보내 틈을 엿보게 하여 조조를 뒤에서 막을 계책을 결정했다는 서술은 잘못이다』.
 [34] 유장 각 판본에서는 모두 「유장劉章」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제 〈고본〉 및 《촉지蜀志》의 본전을 근거하여 이를 교정한다.
 [35] 이에 주유는 수도에 이르러~촉을 취해 노숙으로 하여금 그 땅을 굳게 지키게 하고 도차가 이르길 『《오지》 〈주유전周瑜傳〉에서 이르길 「바라건대 분위奮威와 함께 나아가 촉蜀을 취하길 원합니다. 촉을 얻고 그와 나란히 장로張魯를 취한 뒤 분위를 그 땅에 머무르게 하여 굳게 지키게 하십시오」라 했다. 상고하건대 분위는 손유孫瑜를 이르는 것이다. 《오지》 〈손유전孫瑜傳〉에서는 그가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촉지》 〈선주전〉에 주석된 《헌제춘추獻帝春秋》에 따르면 「손권은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夏口로 가게 했으나 유비는 군사가 지나게 해 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것으로 족히 증명할 수 있으니 《건강실록》에서 노숙이 일찍이 분무교위奮武校尉를 배수받았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36] 주유는 강릉현으로 돌아가 병을 다스렸으나 ​파구에서 죽었다 《오지》 〈주유전〉에서 이르길 『주유周瑜는 강릉현江陵縣으로 돌아와 행장을 꾸렸으나 파구巴丘로 가던 중 병으로 길에서 죽었다』. 도차가 이르길 『《건강실록》에는 「행장裝」이 빠져 있다』.
 [37] 아들 주수는 공주를 맞이하여 「수修」 자는 《오지》 〈주유전〉《자치통감》 66권에는 모두 「순循」 자로 되어 있다.
 [38] 부마도위가 되었다 《오지》 〈주유전〉과 《자치통감》 66권에는 모두 「기도위騎都尉」로 되어 있다.
 [39] 이에 은밀히 양주로 사람을 내려보내 「은밀히密」란 자는 본래 없었으나 이제 〈고본〉 및  《오지》 〈주유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 근거하여 덧붙인다. 〈주초본周鈔本〉에서는 「은밀히」가 「에서부터自」로 되어 있다.

​ [40] 주유의 고아한 도량과 높은 지혜를 칭찬했으며 도차가 이르길 『「지혜智」란 자는 《오지》 〈주유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서는 「경지」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옮다』.

 [41]​ 주유의 계책과 지략은 만 명의 사람보다~남의 신하로 오래 있지 않을 것이 두렵다 도차가 이르길 『 《오지》 〈주유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서 이르길 유비는 말하며 주유를 찬탄했으니 이 몇 구는 유비의 것이다』.

 [42]​ 경의 담력을 다시 보았을 뿐이다 〈송본〉·〈고본〉·〈장본張本·〈서초본〉·〈주초본〉·〈유초본〉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43] 사람들 사이에 두려움이 확산되어 「사람人」은 《오지》 〈손권전〉에는 「백성民」으로 되어 있었다. 대개 허숭許嵩이 당唐의 휘를 피해 고친 것이다.

 [44] 이에 형주의 장사군·강하군·계양군 네 군을 오에 속하게 했다 《오지》 〈손권전〉《자치통감》 67권에서 나란히 이르길 『마침내 형주荊州의 장사군長沙郡·강하군江夏郡·계양군桂陽郡 동쪽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남군南郡·영릉군零陵郡·무릉군武陵郡 서쪽을 유비劉備에게 속하게 했다』.

 [45]​ 건안 21년~ 나루의 북쪽에 영채를 벌였다 《오지》 〈손권전〉과 《자치통감》 67권에서는 이가 건안建安 20년의 일로 되어 있으나 《건강실록》에는 21년의 일로 되어 있으니 오기가 의심된다.

 [46] 서상 《오지》 〈손권전〉과 〈호종전胡綜傳〉 및 《자치통감》 68권에는 모두 「서상徐詳」으로 되어 있다.

 [47] ​능통에게는 능렬과 능봉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렬烈」은 본래 「렬列」로 되어 있었으나 이제 〈고본〉과 〈서초본〉 및 《오지》 〈능통전凌統傳〉에 근거하여 개정한다.

​ [48] 갈선 《오지》 〈능통전〉에는 「갈광葛光」으로 되어 있다. 「선先」과 「광光」은 모양이 비슷하므로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49]​ 건안 23년~가을. 횡강장군·익양후 노숙이 죽었다 《오지》 〈노숙전魯肅傳〉과 《자치통감》 68권에서 이르길 모두 노숙이 죽은 것은 건안 22년의 일이라 한다.

 [50]​ 그는 손책이 영걸임을 보고 마침내 그와 한가지로 사업을 의논하여 정했다 《오지》 〈노숙전〉에 근거하면 노숙이 손씨孫氏의 사업을 계획하고 결정한 것은 손책이 죽은 뒤의 일이다.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에 인용된 양장거梁章巨의 말에 의하면 『노숙은 곡아현曲阿縣으로 돌아와 북쪽으로 올라가려 했다. 때마침 주유가 그의 모친을 오군吳郡으로 옮기자 노숙은 그의 형상과 말을 보았다. 이에 따르면 노숙은 먼저 장강長江을 건너지 않았고 일찍이 손책을 본 적도 없었다』.

​ [51] 당양현의 맥릉성을 맥릉성麥陵城」은 《오지》 〈여몽전呂蒙傳〉과 《자치통감》 68권에서 모두 「맥성麥城」으로 되어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주석하여 이르길 『《형주기荊州記》에서 말하길 남군 당양현當陽縣 동남쪽에 맥성이 있다』.
 [52] 등당 본래는 유당劉當으로 되어 있었다.〈고본〉과 〈서초본〉 및 《오지》 〈여몽전〉에는  모두 「등당鄧當」으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옮다. 이제 이에 근거하여 고친다.

​ [53] 방숙 《오지》 〈여몽전〉과 《자치통감》 65권에는 모두 「습숙襲肅」으로 되어 있었다. 호삼성이 주석하여 이르길 『습襲이 성이고 숙肅이 이름이다』.

​ [54] 상둔의 수비장 서석과 송지 등 두 사람이 모두 죽었는데 자제가 유약하여 《오지》 〈여몽전〉에는 『이때 여몽과 성당成當·송정宋定·서석徐顧은 서로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세 장수는 죽고 자제는 유약하여』로 되어 있다.

 [55]​ 40세에 궁 가운데서 죽었다 《오지》 〈여몽전〉과 《자치통감》 68권에서는 모두 여몽呂蒙은 42세에 죽었다고 한다.

 [56]​ 이는 첫 번째 유쾌한 일이오 「유쾌한」은 본래 「결단한決」으로 되어 있었다. 이제 〈서초본〉 및 《오지》 〈여몽전〉과 《자치통감》 68권을 근거하여 고친다. 아래의 「이것이 두 번째 유쾌한 일이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57]​ 장이와 진여를 뛰어넘는 것이었소 「장이와 진여張陳」는 〈고본〉과 《오지》 〈여몽전〉에서는 모두 「장의와 소진張蘇」으로 되어 있다.

 [58] 자명은 어렸을 적 힘든 일이건 쉬운 일이건 사양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과감하며 담력이 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소 《오지》 〈여몽전〉 및 《자치통감》 68권에서는 「어렸을 적少時」 아래에 「내가 이르기를孤謂」 두 자가 더 있다.

​ [59] 그의 계책과 모략과 임시로 변통하는 것은 《오지》 〈여몽전〉 및 《자치통감》 68권에는 모두 「계책과 모략이 기이함에 이르러籌略奇至」로 되어 있다.

 [60] 이는 안으로는 변론할 수 없으면서 「변론辯」은 송본〉·〈고본〉·〈서초본〉·〈주초본〉·〈유초본〉에서 모두 「변명」으로 되어 있었고 《오지》 〈여몽전〉 및 《자치통감》 68권에서는 「행동으로 옮길」로 되어 있었다. 그 세 글자는 모두 옛 문자로는 뜻이 통하는 말이다.

​ [61] 사람의 뜻에 순응하소서 「사람人」은 《오지》 〈여몽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오서吳書》에서는 「백성民」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대개 허숭이 당의 휘를 피하여 고친 것이다.

 [62] 손환 본래는 「손식孫植」으로 되어 있었다. 〈고본〉 및 《오지》 〈육손전陸遜傳〉과 본전 및 《자치통감》 69권에는 모두 「손환孫桓」으로 되어 있었기에 이제 이를 근거하여 고친다.

 [63] 환계 본래는 「환치桓峙」로 되어 있었다. 〈고본〉과 〈서초본〉 및 《오지》 〈손권전〉·《자치통감》 69권에는 모두 「환계桓階」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옮다. 환계는 《위지魏志》에 전이 있으니 이제 이를 근거하여 고친다.

 [64] ​ 육손에게 보국대장군과 영주목을 배수하고 「영주목郢州牧」은 《오지》 〈육손전〉과 《자치통감》 69권에는 모두 「형주목荊州牧」으로 되어 있다. 

 [65] 손소 《자치통감》 70권과 같다. 《오지》 〈손권전〉·〈장소전張昭傳〉·〈고옹전顧雍傳〉에는 모두 「손소孫邵」로 되어 있다.

 [66]​ 11월. 촉은 사자를 통해 손권에게 글을 전했으며 이 앞 문장중복되어 있는 「11월十一月」이란 글귀는 분명 군더더기 문장일 것이다.

 [67] ​오의 장수 손소​는~위의 치중과 우개를 노획하고 돌아왔다 《오지》 〈손권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오록吳錄》의 서술에 따르면 황무黃武 4년의 일이라 하니 오기가 의심된다. 또한 《오록》에는 「치중辎車」이 황제의 수레副車」로 되어 있다.

 [68]​ 낭중을 배수받고 위에 사자로 갔는데 《오지》 〈손권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오서》에는 『낭중령郎中令이 되어 위魏로 갔다』고 되어 있다.

 [69] ​태상을 배수하여 상서와 겸직하게 했다 「상서尙書」는 《오지》 〈손권전〉의 주석으로 인용된 《오서》에서는 「상서령尙書令」으로 되어 있다.

 [70] 고옹의 자는 원탄 ​《오지》 〈고옹전〉 및 《오록》·《세설인명보世說人名譜》 〈오국오군고씨보吳國吳郡顧氏譜〉에서 모두 이르기를 고옹의 자는 원탄元歎이라 한다. 탄凱은 탄歎이 오기가 아닐까 의심된다.

​ [71] 누차 옮겨 상서에 이르고 《오지》 〈고옹전〉에는 『누차 옮겨 대리大理와 봉상奉常이 되고 상서령을 관장했다』고 되어 있다.

 [72]​ 겨울 11월. 육손이 편의로 아뢰어 덕을 베풀어 형벌을 완화하고 조세와 부세를 너그러이 하기를 청했다 《오지》 〈육손전〉에 서술에 따르면 이것은 겨울 10월의 일이라 한다.

 [73] ​중랑 저봉 「중랑中郞」은 《오지》 〈손권전〉에서는 「낭중郎中」으로 되어 있다.

 [74] 무령을 제수받았다 「무巫」는 본래 「승承」으로 되어 있었다. 〈송본〉 및 《오지》 〈사섭전士燮傳〉에 근거하여 이를 개정한다.

 [75] 서문령 사유 「유鮪」는 《오지》 〈사섭전士燮傳〉에서는 「유」로 되어 있다.

 [76]​  한당의 아들 한종이 「종綜」은 본래 「종琮」으로 되어 있었으나 〈송본〉 및 《오지》 〈손권전〉·〈손량전孫亮傳·〈한당전韓當傳〉에 근거하여 이를 개정한다.

 [77]​ 협석정  《오지》 〈손권전〉과 《자치통감》 71권에는 모두 「석정石亭」으로 되어 있다. 호삼성이 주석하여 이르길 『그 땅은 분명 오늘날의 서주舒州 회녕현懷寧縣과 동성현桐城縣 사이이다』.

 [78] 인수가 비로소 내려왔을 때에 죽었다 《오지》 〈여범전〉에는 『인수印綬가 내려오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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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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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6.01.23
01:57:52
(*.55.70.71)
참고로 건상실록에서 손권의 평은 이렇습니다.

帝屈身忍辱,任才尚計,有勾踐之奇英。故克跨江表,成鼎峙之業。然多嫌忌,果於殺戮。末年滋甚。信用讒說,竟廢嫡嗣。初,桓王定江東,遣修貢於漢,漢使劉琬加錫命。琬至江東,見桓王諸兄弟,顧諸人曰:「孫氏諸子,皆俊傑,然壽並不長,惟中子孝廉權,當有大貴之相,骨體非人臣也,壽又最長,君試記之。」後果成帝業,何見知之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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