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보충 자료 - [기타]삼국잡사
1.서문
 
위로는 사마천의 사기로부터 아래로는 오대사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이 수천백년에 이르러 정통,패자와 참절난신,심히 미약한 나라,밖으로는 오랑캐들의 나라들에 이르기까지 역사가가 그 나라의 국호를 써주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삼국지 만이 홀로 그렇지 않았는데 유비 부자가 서로 전해온 것이 사십여년으로 시종일관 국호를 한(漢)이라고 하고 일찍이 한번도 촉(蜀)이라고 부른적이 없었는데 촉(蜀)이라는 이름은 세상에 흘러다니던 것이었다.

진수는 올바른 이름을 버리고 세속의 이름을 따랐으니 위진의 사사로운 뜻을 따라 역사가의 공의로운 법을 폐한 것이 이와 같은데 그 쓴바의 선악,포폄,여탈을 오히려 믿을수 있겠는가?  위진의 시대에 유비를 촉이라고 한 것은 오대에 이경을 오라고하고 유숭을 진이라고 한것과 같다. 

지금 오대사를 쓰면서 남당,동한의 세가에 일찍이 오,진같은 칭호를 쓴적이 없는데 유독 진수만이 이와 같으니 처음부터 정의와 법도는 없었고 막바로 호오(好惡)로 들어간 것이다. 전날에 구양문충공(구양수)이 오대사를 지을 때 왕형공(왕안석)이 말하길“오대의 일은 취할게 없으니 이것으로 어찌 공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삼국시대에는 좋은일이 아주 많으나 모두 진수 때문에 파괴됐으니 응당 다시 지어야할것이다."하였는데 문충공이 그 말을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끝내 지을 겨를이 없었으니 아~ 아쉽구나!

당경이 서문을 쓰다.

【~】안에 있는것은 원문이고 바로 아래에 있는글은 원문에 대한 당경의 사론입니다.

2. 제갈량이 유선을 위해 법가와 명가의 서적을 각 한부씩 베끼다
 
【제갈승상이 후주를 위해 신자,한비자,관자,육도 각 한부를 베끼다】

학자들은 제갈공명이 경술로써 소주를 보필하지 않고 끝내 육도,관자,신자,한비자의 책을 썼다고 책망한다.내가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군주는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체제를 지키는 것을 불론하고 지략으로써 먼저를 삼는다.후주는 관후하고 인의로웠는데 포부가 여유있었다.그러나 지략이 그 단점이었으니 당시의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로써 걱정을 삼았다.

육도는 병가의 기묘한 계책을 기술해 놓은것이고 관자는 계책의 경중을 귀하게 여기며 신자는 허명과 실질의 핵심이고 한비자는 먹줄을 끌어와서 사정을 재단해 서술한 것이니 후주의 병통에 적중한 것이다.약에는 좋고 나쁜게 없고 중요한 것은 병에 대해서 효험이 있느냐 하는 것이니 만금이나 하는 약이라 하더라도 병에 알맞지 않는다면 또한 다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위의 당경의 견해에 대한 비판으로 <분서>에 수록된 이지의 이러한 견해가 있습니다.
 
당경은 말하길 

“군주는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체제를 지키는 것을 불론하고 지략으로써 먼저를 삼는다.육도는 병가의 기묘한 계책을 기술해 놓은것이고 관자는 권력을 신중히 하고 경중을 귀중하게 여기며 신자와 한비자는 이름과 실질의 핵심으로 사정을 공략한것이니 이를 사용하는것은 후주의 병통에 적중한 것이다.약에는 좋고 나쁜게 없고 중요한 것은 병에 대해서 효험이 있느냐 하는 것이니 만금이나 하는 약이라 하더라도 병에 알맞지 않는다면 또한 다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또 《고문원》을 보면 선주가 임종시 후주에게 한 유언이 실려있는데 이르길

“신자와 한비자등의 책은 사람의 의지와 지모를 증강시키니 읽고 외울만하다”고 했고

《삼국지》에는 맹효유가 극정에게 태자에 관해 물으니 공손하고 어질다는 대답을 듣자 말하길

“그대가 말한 것은 모두 집안에서 갖출만한것입니다.지금 내가 물은 것은 권력을 사용하는것과 지략이 어떠한가 알고 싶은것입니다”

한 것이 실려있다
 
이로 보건대 제갈공명은 신자와 한비자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을 병에 대응한 약이라고 한다면 어려울 것 같다. 무릇 병에 약을 쓸수 있다면 약을 써서 병에 대항하는 것이 효력이있다.진실로 약을 쓸수 없는 상황이라면 또한 어떤 병에 대항하겠는가?

유선의 병은 아관긴폐(입안구석의 윗잇몸과 아랫잇몸이 맞닿은 오그라들어 닫힌 증상)로 입을 꼭 닫아서 벌릴수가 없었으니 약을 쓸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병에 대항할 수 있는 약인가 묻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또한 신자와 한비자가 어떤 사람인가? 저들은 원래 유가에서부터 갈라져나와 여섯 개의 학파를 이루었다.이미 여섯 개로 나뉘어져 각자가 일가를 이루었고 각자가 일가를 이룬후 각각 일정한 학술을 마련했고 각각이 반드시 공적을 이룬바가 있었다. 일을 들어 조처한 것이 마치 인장을 찍은 것처럼 튀어나가 찍히는 하나의 점조차 없었다.
 
유독 유가의 무리만 지나치게 흘러넘쳐 따를만한 바가 없었는데 이는 곧 하고자 하는바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급장유는 말하길

“안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밖으로는 인의를 베풀고자한다”한 것이다.

육가의 요지를 논하는 사람은 또한 

“넓지만 요점이 드물고 노력하지만 공이 적다” 

여덟 글자로 총괄했으니 지극히 타당하고 바뀔 수 없는 견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제갈공명이 후주에게 말하길

“진실로 적을 치지 않는다면 공업이 같이 망할것입니다. 앉아서 망하는 것을 기다리느니 공격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걸 보면 제갈공명은 이미 후주가 반드시 망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한 빨리 전쟁을 일으켜 다행히 망하지 않기를 구하고자 한 것은 어째서인가? 어찌 병이 이미 진행되고 약을 쓸수 없지만 약을 권하지 않을수도 없었기에 요행을 바라고 한번의 도박을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내가(이지) 보건대 사마의,조진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존재하고 있는데 요행을 얻을수 없었을 것이다. 

여섯번이나 기산으로 출정해 해를 연이어서 백성들을 움직이고 무고한 양민들을 수천리의 밖으로 내몰았다. 이미 백성들을 사랑하고 싶었으면서도 군주에게 보답하고 싶었고 스스로 말하길 적을 헤아리는 것이 매우 상세하다고 했으면서도 우연한 승리를 탐하는 것을 면치 못했으니 끝내 운좋게 승리하지 못했고 장군의 별은 이곳에서 떨어졌다. 대체로 욕심이 많았기에 겸하여 인의도 베풀고자 하였고 널리 가지려고 했기에 공로도 없는 헛된노력을 한 것이다.이 여덟글자(博而寡要,勞而少功)는 비록 제갈공명같은 대성인도 면하지 못했다.

나는(이지) 일찍이 이를 논하길 커다란 공을 이루는 사람은 반드시 후환을 돌아보지 않는데 그렇기에 이루지 못할 공이없다. 상군(상앙)이 진나라에서,오기가 초나라에서 한 것이 이것이다.

유학자는 모두를 얻고자 하는데 천하의 커다란 공은 후환을 돌아본다면 반드시 이룰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모르는것인가? 나는 알수가 없다. 후환을 돌아보는 사람은 반드시 천하의 커다란 공을 세울수 없는데 장주의 무리가 이와같다. 이로써 비록 진흙탕에 꼬리를 내리고 돌아다니는 거북이가 될지언정 천금의 폐물은 받지 않으며 차라리 호수위의 즐거움을 누릴지언정 초나라의 걱정은 맡으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유학자는 이들 모두를 얻으려고 드니 조정에 거처하고 있을 때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에 거처하면 군주를 걱정하는 말을 한다.이들은 세상에는 머리가 두 개인 말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것인가? 이것 역시 나는 알수가 없다.

묵자의 학술은 검소함을 귀중하게 여겨 비록 온 세상이 나를 털 하나 뽑지 않을 구두쇠라하여도 걱정하지 않는다. 

상자의 학술은 법을 귀중하게 여기고,신자의 학술은 기교를 귀중하게 여기고,한비자의 학술은 법과 기교를 귀중하게 여겨 비록 온 세상이 나를 잔인하고 각박하다고 하여도 걱정하지 않는다. 

곡역(진평)의 학술은 속이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장의와 소진의 학술은 종횡을 귀중하게 여겨 비록 온 세상이 나를 배반을 잘하고 믿을수 없다고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다섯 번이나 나아가는 수고를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하나라와 은나라를 이을수 있다면 비록 온 세상의 후세인들에게 두명의 주인을 섬기고 이득을 겸했으며 자기살을 베어내 요리를 하고 공을 이루고자 했으며 태갑을 세웠다가 다시 쫓아냈다는 말을 들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이것은 이윤의 학술이 임(任:자기일을 맡아 책임있게 꿋꿋이 해나가 성공시키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것이기 때문에 바로 모욕을 잘 참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초주와 풍도에 이르러 여러 노신들이 차라리 제기를 들고 진나라로 돌아갔다는 비방을 듣고 다섯 왕조를 섬겼다는 치욕을 받을지언정 무고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차마 보지 못했으니 요컨대 모두가 정해진 학술이 있어 구구한 허명이 아니었다. 각자가 널리 쓰임을 구해 모두 족히 사리를 판변할만 하였는데 저 구구한 자들(유학자)은 명분과 실리를 겸하여 얻고자 하니 얻을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다른게 없고 명교(유가의 대의명분)가 그들을 얽매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을보면서 뒤를 걱정하고 왼쪽을 보면서도 오른쪽을 흘기니 자기자신이 이미 정해놓은 학술이 없으면서 어찌 다른날에 반드시 공적을 이룰수 있겠는가? 

또한 “시중(時中)”이라는 말로써 자신을 꾸미기 좋아하니 이미 늘어놓은 말을 본뜨는데 힘쓰거나 이미 지나간일을 답습하며 거기서 반 발자국도 떼지못하는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므로 신자와 한비자를 논한김에 추론하여 말한 것이니 독자는 혹시나 나의 말이 모두 경사(經史)에 없는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3.제갈량이 법정의 전횡을 방치한것에 관해 손성이 비판하다
 
【법정이 촉군 태수,양무장군이 되고나서 밥 한그릇의 은혜,한번 흘겨본 원망까지 갚지 않음이 없었다.누군가가 법정이 너무 마음대로 한다고 말했더니 제갈량이 말하길 

“주공이 공안에 있을 때 진퇴가 마치 늙은 이리가 앞으로 가려하면 턱살이 밟히고 뒤로 가려하면 꼬리가 밟히는듯한 형국에 있었으나 효직의 도움에 의지 하였다. 지금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시 명령을 내리지 않을수 없으니 어찌 금지하여 그 뜻을 행할수 없게 하겠는가?”

손성의 평론에 이르길

“위엄과 복택이 아래에서부터 말미암는 것은 나라가 망할 이치다.어찌 공신이라고 해서 방자함에 이르게 할수 있겠는가? 제갈씨의 말이 여기에 이르러서 정치하는 도리를 잃었다” 】

진나라 소왕은 범수의 원한 때문에 평원군을 인질로 잡고 조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내 위제의 머리를 요구했다. 이엄이 패릉위를 주살하고 글을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니 한무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은혜에 보답하고 원수를 갚는 것은 짐이 나의 장군들에게 바라는 바이다.다시 어찌 의심하겠는가?” 

국초에 곽진이 서산순검이 되었는데 (안:서산은 원본에 산서로 되있는데 지금 송사 곽진전에 의거하여 개정한다) 백성이 고소하여 말하길 자기 딸을 겁탈했다고 하니 송태조가 분노하여 말하길

“너는 작은 백성이다.딸의 짝도 마땅히 소민으로 얻어야 된다. 지금 나의 귀중한 신하를 얻으려고하니 살피건대 불가하다”

하고 쫓아 냈다.(안: 송사 이한초전에 [이한초가 관남에서 벼슬했는데 어떤 사람이 고소하기를 이한초가 억지로 자기 딸을 첩으로 취한데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다고 하였다. 송태조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한초는 짐의 귀중한 신하이다. 그 첩이되는 것이 농부의 아낙네가 되는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고 꾸짖어 보냈다.

그리고 이한초에게 몰래 타일러 말하길

“빨리 그 여자와 빌린돈을 돌려주라. 짐이 우선 그대를 용서하였으니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

하니 이한초가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이 여자를 빼앗은 일에 근거하건데 이것은 이한초가 한 일이고 여기에는 곽진이라고 말했으니 의심하건대 같은일이 다르게 전해진 것 같다)

이 세 사람은 끝내 모두 나라에 보답하였다.옛날의 영웅은 호걸을 부리는 바탕에 저절로 올바른 뜻이 있었으니 손성의 식견은 아주 작구나!



4.조조가 국공의 지위에 오르려하자 순욱이 이를 비판하다
 
【동소가 건의하길 조공은 마땅히 국공의 작위에 나아가 구석을 갖추고 혁혁한 공로를 만방에 펼쳐야된다고 하였다. 순욱은 조공을 칭하길 군사를 일으킨 것은 본래 조정의 군자이기 때문이며 덕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하니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하였다. 조공은 이로 말미암아 좋게 여기지 않았고 순욱은 이로써 근심속에 죽었다.】

논자(論者)들은 이르길 

“순욱은 조씨를 위해 계략을 맞춰서 한조를 기울였으니 만년에 절개를 세워 달리한다하여 전해지는 바를 바꿀 수 없다” 하였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의 재상이 되어 산융족을 토벌하고 진나라와 채나라를 토벌하고 초나라를 토벌하고 진나라를 토벌했는데 그 뜻은 주왕실을 높이고자 한것이었으나 환공은 끝내 봉선을 올리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순문약은 조공을 보필하여 청주와 서주를 평정하고 허창과 낙양을 평정하고 하삭(河朔),한남(漢南)을 평정하니 그 뜻이 한실을 높이는데 있었으나 조공은 끝내 구석의 뜻을 가졌다.

관중은 봉선을 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논변으로써 이를 막아 냈고 순문약은 구석의 옳지 않음을 알았기에 겸손한 말로써 이를 물리쳤다.

관중은 행운이 있었기에 환공이 그 말을 듣고 근왕(勤王)의 공로를 온전하게 했지만 문약은 행운이 없었기에 조공이 그 말을 듣지 않고 나라를 훔치는 재앙을 이루었다. 그 처음과 끝을 궁구해보건대 행운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을뿐 마음을 쓴곳이 어찌 같지 않았겠는가? 논자(論者)들은 어찌하여 이를 비방하는가?


5.한 마리의 용으로서 화흠이 머리,병원이 배,관녕이 꼬리였다
 
【화흠,병원,관녕은 서로 잘 지냈는데 당시 사람들이 한 마리 용이라고 불렀으니 화흠이 머리고 병원이 배고 관녕이 꼬리였다】

위략에 말하길 

“병원과 관녕은 모두 덕이 높은 선비인데 화흠이 머리라고 하였으니 화흠의 사람됨을 알수 있다”

하였다.그러나 한서에 복후를 폐한 것에 관해 말하길

“조조가 화흠을 시켜 병사들을 대동하고 궁궐에 들어가 황후를 잡게 하였는데 황후가 문을 닫고 벽속에 숨었다. 화흠은 문을 부수고 벽을 들어내고 들어갔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덕이 높은 선비란 말인가! 

조조가 비록 간사한 영웅이라고 하나 사람을 쓸 때 각기 마땅한 이치에 따랐다. 바야흐로 그 당시에 위씨의 여러 신하들 가운데 동소, 하후돈, 가후, 정욱, 곽가 등의 무리들이 존재해 적다고 할수 없었으므로 충분히 이런 일을 하게 할수 있었는데 하필 유독 화흠을 시켜 했다는 말인가? 화흠이 정말 현명했다면 조조가 결코 감히 이런일을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조조를 섬겼기 때문에 화흠은 현자가 아니다.

진수가 병원전을 지으면서 말하길 

“어릴 때 관녕과 더불어 고상하다고 칭송되었다”

고 하니 처음에는 화흠에까지 미치지 않았다. 관녕전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다시 칭하길 

“병원, 화흠과 더불어 벗이었다”

고 하니 어찌 세사람이 벗인데 화흠 홀로 고상하다는 말이 없었는가? 친구의 출처가 다르다 하더라도 도리가 마땅히 있을진데 숭상하는바가 같지 않다면 곧 친구가 될 까닭이 없다.이것이 바로 나의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다.



6.건흥5년 제갈량이 출병하여 한중에 주둔하다
 
【건흥 5년(227년),승상 제갈량이 출병하여 한중에 주둔하다】

이해는 정미년인데 위나라 태화 원년,오나라 황무 6년이었다.위나라 명제가 즉위하고 이미 해를 넘겨 군신사이에 틈이 없어 앞서 오나라가 하구를 공격해 석양을 포위하고도 이기지 못했다. 위나라는 이 해에 영역을 보전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 공명이 선주에게 말하길 

“형주와 익주를 보전함으로써 서쪽으로 융족들과 화합하고 남쪽으로 월족을 어루만져 바깥으로는 손권과 친교하고 안으로는 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즉시 상장군을 보내 완성과 낙양을 향하게 하고 장군의 몸을 진천(秦川)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한다면 패업을 가히 이룰수 있으며 한실을 가히 중흥 시킬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천하에 어찌 변고가 있었단 말인가?그런데도 급하게 이런 일을 벌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7.원소가 불렀을때 오지 않던 전주가 조조가 부르니 바로 가다
 
【조공이 오환을 정벌하며 사신을 보내 전주를 불렀는데 전주가 문하 사람들에게 타이르길 엄주로 가라고 재촉했다.사람들이 말하길

“일찍이 원공이 예를 갖춰 명령이 다섯 번이나 이르렀는데도 그대는 굽히지 않더니 지금은 조공의 사신이 한번 오니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구는것은 어째서 입니까?”

하니 전주가 웃으면서 말하길

“이것은 그대들이 알수 있는바가 아니요”

하고 즉시 사자를 따라 조조의 군중에 당도하였다.】

혹자가 말하길 

“전주는 원씨의 초대를 사절하고 조공의 부름을 따랐으니 문인들이 기괴하게 여긴 것인데 전주는 웃을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어째서 그런가? 말하자면 언급하길 꺼린 것이다.

일찍이 한나라 명제가 오랑에게 물어 말하길

“선제가 경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는데 도리어 표기를 따라 다닌것인가?”

하니 오랑이 대답하길

“선제는 예법으로 신하를 대했기 때문에 신 역시 예법으로 진퇴를 결정한것입니다. 표기는 법으로 저를 검속했기에 신은 법 때문에 굴복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전주의 뜻 역시 대체로 이와같다. 당시에 원씨는 관후한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에 전주가 가지 않을수 있었으나 조씨는 각박하고 급했기 때문에 전주 역시 감히 오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니 정의를 사모하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봉작을 받들지 않았다. 전주가 비록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 그 (침묵)속에 있는 것이다.


8.조조가 원소를 위해 통곡하자 손성이 이를 비판하다
 
【조공이 업 지방을 평정하고 원소의 무덤에서 제사지내고 눈물을 흘리며 곡했다. 손성이 이를 평해 말하길

“선왕의 상과 벌은 장차 이로써 선한일을 권하고 악한일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 역신의 가문을 위해 슬픔을 극진히 했으니 정치의 도리가 무너진 것이다. 

원한을 숨기고 사람을 친구로 사귀는것은 옛날의 현인들이 부끄러워 한바요 공자가 여관 사람에게 참마를 부의한 것은 정당한 일을 할뿐 헛되게 눈물흘리지 않는 것이다. 길이 어긋나고 호의가 끊어졌는데 어찌하여 곡을 한것인가! 

한나라 고조는 항씨에게서 이 도리를 잃었는데 조공이 잘못된 것을 따라 이를 받들어 행했으니 백번 생각하는데 한번의 실수를 범했다고 할만하다】

우임금이 저자에서 죄수를 보면 수레에서 내려 이를 통곡했는데 하물며 유방과 항우는 회왕에게 명령을 받고 더불어 의형제를 맺었고 원소와 조조는 어렸을 때부터 더불어 잘사귀었는데다 같이 일을 일으켰고 원소는 또한 맹주가 아니었는가?

비록 길이 어긋나고 호의가 끊어져 서로를 공격함에 이르렀을지라도 내가 공의(公義)로써 그를 토벌하고 사사로운 은혜로써 그를 곡한것이니 은혜로 정의를 가리지도 않았고 또한 정의로 은혜를 폐하지도 않았으니 이것이 옛날의 도(道)이다. 어찌하여 실수라고 하는것인가! 손씨(손성)의 의견은 비단 편벽된 학문일 뿐 아니라 대체로 또한 소인이라고 말할만 하다.


9.장무 3년 4월 유비가 죽자 5월에 유선이 즉위하고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다
 
【장무 3년 4월,선주가 영안궁에서 붕어하자 5월 후주가 성도에서 제위를 세습하고 건흥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군주가 자리를 계승하는데 해를 넘겨서야 원년을 바꾸는데 장무 3년 5월에 원년을 바꿔 건흥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진수가 제갈공명을 비판한 이유이다.

내 견해로 이를 보건대 잘못된 것은 없는 것 같다. 옛날의 군주는 자리를 이어도 오히려 즉위하지 않고 내년 정월에 즉위의 예법을 행한 연후에 역사서에 즉위를 기록하고 원년을 칭했으니 후세에 이를 따랐다. 처음부터 진실로 이미 즉위를 했는데 원년을 칭하는 것이 또한 불가능 하겠는가?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옛날의 군주는 자리를 세습하고 해를 넘기지 않으면 임금이라고 칭하지 않았으니 그렇기에 자맹은 왕이라 기록하지 않았고 자반,자적 역시 공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후세에 이를 따랐다. 처음에 진실로 이미 임금이라고 칭하고나서 원년을 칭하는 것이 또한 불가능 하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길 잘못된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춘추의 시대에 1년에 2가지 이름이 없었으니 은공 말년에 이미 이름 붙이길 11년이라고 했다면 다시 환공 원년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스스로 원년을 기록한 이래 1년에 한번 바꾸는것과 3~4번바꾸는 것이 있으니 어찌 다시 두가지 이름을 꺼려서 안된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길 잘못된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특별히 이런 경우만이 아니다. 지금의 소위 원년 이라는 것은 옛날과 다르다. 옛날의 소위 원년이라는 것은 어떤 임금의 1년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해를 넘긴 이후에야 이를 칭했는데 앞에서 말한것과 같다. 후세의 소위 원년이라는 것은 어떤 이름을 1년에 붙인 것이니 제위를 잇자마자 칭해도 되고 해를 넘긴 연후에 칭해도 또한 가능하다.


10.조조가 강릉으로부터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안 13년 조공이 강릉으로부터 유비를 정벌했는데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으나 불리하여 퇴각해 남군을 보전했다

세상의 장군이 된자는 병사를 많이 거느리려고만 하지 병사가 30만명정도 되면 사용하기 힘든줄은 모른다. 전대에 60만명으로 초를 이기고 40만명으로 진을 이긴 것은 오직 왕전과 항적 두사람 뿐이었고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판단을 잘내린 사람은 사람은 유독 한신이었는데 병졸이 30만명에 이르러서는 자기 뜻대로 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조괄은 45만명의 군사로 장평에서 패했으며 한나라 초기에 다섯 제후의 병사를 합쳐 56만명이었는데 팽성에서 패했고 30만명으로 백등에서 곤궁에 빠졌으며 왕회는 32만명을 이끌고 마읍에서 굴복해 공이 없었으며 왕읍은 100만명으로 곤양에서 패했고 황건적은 100만명으로 수장에서 패했고 부견은 80만명으로 합비에서 패했으며 수나라는 90만명으로 요동에서 패했으니 그 무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패배가 더욱 치명적이었는데 오히려 군대를 맡긴사람은 장군이 좋지 못하다고 할 뿐이다.

조공과 같은 사람은 훌륭한 장군이라고 할만하다. 다시 수군 60만으로써 80만이라 공언하고 오림에서 패했는데 이 때에 전선이 연닿아 있었기 때문에 적군에게 불살라 졌고 대군이 한곳에 모여 있었던지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이것이 바로 병사가 많이 누적됐을때의 현상이다. 한 고조의 재주로도 병사 10만명정도를 관장하는것에 불과했는데 수군 60만명을 관장하려면 마땅히 고조 같은 사람 6명을 얻어야 된다. 고조가 어찌 얻기 쉬운 사람이겠는가? 그 패배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11.신하들이 유비에게 가려는 관우를 추격하자고 하니 조조가 말리다
 
【조공이 하비를 정벌하고 관우를 잡아 돌아왔는데 아주 후하게 대접했지만 관우의 마음이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는걸 알게 되자 장료를 보내 물어보니 관우가 탄식하며 말하길

“조공께서 나를 후하게 대접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유장군에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끝까지 머무를수는 없다. 마땅히 공을 세워 조공에게 보답하고 떠날 것이다”

하였다.

관우가 안량을 격파하는데 이르러서 조공은 그가 반드시 떠날 것을 알아 상을 두텁게 내렸는데 관우가 모두 봉해서 돌려보내고 편지를 써서 이별을 고하고는 원소군에 있던 선주에게로 돌아갔다. 좌우의 신하가 추격할 것을 청하자 조공이 말하길

“이것은 각각 자기 주인을 위하는 것 뿐이니 추격하지 말라.”】

관우가 조공에게 후하게 대접받았는데 끝내 자기 군주를 잊지 않았으니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의 선비 또한 그렇게 할 수있었다. 조공이 관우를 얻어 죽이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며 그 힘을 썼으니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의 군주는 또한 그렇게 할수 있었다. 

관우가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에게 보답하고자 하는데 이르고 그 연후에 선물을 봉해서 되돌려보내고 편지를 써서 작별하고 떠난 것에서 진퇴거취의 모습을 볼수 있으니 전국의 선비들이 할수 있는바가 아니었다. 조공이 관우가 반드시 갈 것을 알고도 거듭 상을 내려 그 귀환을 전별하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경계하여 추격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르길 각자 그 군주를 섬기는것이라고 하였으니 안으로는 기운을 화평하게 하여 피아를 구별해 마음으로 삼지 않았으며 밖으로는 관우의 충성을 능히 이루어 사사로이 그 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선왕의 유풍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조공을 논하며 말하길

“이 사람은 능히 선한일을 할수 있고 악한일을 하지 않을수 없다. 선한일을 할수 있기에 국가를 향유할수 있었고 악한일을 하지 않을수 없기에 천하를 가질수 없었다”



12.위나라가 사신을 보내 손권을 오왕에 책봉하고 구석을 내리니 손권이 받아들이다
 
【황초 3년 8월,위나라가 부절을 지닌 태상 형정을 보내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하고 구석을 내리니 손권이 받아들였다.】

이 해에 오,촉이 서로 공격하여 이릉에서 크게 싸우고 오나라는 공손한 말로써 위나라를 섬겨 봉작을 받았는데 이는 위나라가 후방을 도모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위략은 이것으로 손권에게 참절의 의사가 있다고 여겼는데 스스로의 자리를 가볍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아래에 처하고 뒤에 교만하였다는 것이다.

먼저 아래에 처한 것은 봉작을 얻어 이로써 참절의 기초를 이룰 것을 꾀한것이고 뒤에 교만한 것은 그 무리를 격노하게하여 토벌 당하기를 바랬다는것이다. 그러나 오나라는 손권에 이르기까지 삼대의 세력이 족히 자립할만했는데 또한 무슨 봉작으로 도모하겠는가! 봉작을 받는 것은 곧 군신이라는 말인데 공물을 받들고 변방을 관리하다가 나라에 놀랍고 급한일이 있음을 듣더라도 함부로 병사를 일으켜 공격할수 없게된다.

소식이 도달하면 즉시 모든 병사들이 정벌에 나서게 될텐데(이에 앞서) 자신의 몸으로 조정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자식을 보내 숙위하게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번국으로서 진실로 당연한것이라 괴이하게 여길것이 없으나 한번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곧 왕사가 신하를 토벌하게되고 그 다음에 병사를 보내 싸워봤자 이것은 상전과 싸우는 것이 되는데 오히려 어찌 그 무리를 격노시킬수 있겠는가?

이미 위나라가 아들을 인질로 삼는 문제를 가지고 손권을 책망하니 손권은 감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배반을 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바야흐로 위급한 시기에 뭇 신하중에는 노중련의 지혜로 절묘한 계책을 내어 눈앞의 위급함을 해결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진수는 구천으로써 이와 비교했는데 구천이 오나라를 섬겼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오나라의 봉작을 받았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다.
 
ps.본문에 나오는 노중련은 비슷한 상황에서 조나라 평원군으로 하여금 다르게 처신하도록 했는데 참고를 위해 사기 노중련열전 中 관련부분을 덧붙입니다.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이다.기이하고 빼어난 계책을 좋아하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높은 절개를 지니는걸 즐겼다.조나라에 놀러 간적이 있었다.

조나라 효성왕 때에 진나라왕이 백기장군을 보내 장평에서 조나라군대 40여만명을 격파하고 잇따라 조나라 수도 한단을 동쪽으로 포위하였다. 조나라왕은 두려웠으나 제후의 구원병은 감히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지 못했다. 위나라 안희왕은 장군 진비를 보내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는데 진나라를 무서워해 탕음에서 멈춰 전진하지 못했다. 위나라 왕은 객장군 신원연을 그 사이 한단으로 보내 평원군을 통해 조나라왕에게 말하길

“진나라가 급하게 조나라를 포위한 것은 일전에 제나라 민왕과 더불어 제(帝)라는 칭호를 다투다가 그만두고 칭호를 돌이켰는데 지금은 제나라가 이미 더욱 쇠약해졌고 바야흐로 지금 진나라는 천하를 웅패하게 됐으니 이는 반드시 한단을 탐내는 것이 아니고 제(帝)라는 칭호를 복구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조나라가 진실로 사신을 보내 진나라 소왕을 제(帝)라고 떠받들면 진나라는 반드시 기뻐하여 병사를 물릴것입니다” 

하니 평원군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하지 못했다.

이때 노중련이 조나라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진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한 상황을 만나 위나라 장군이 조나라로 하여금 진나라를 제(帝)로 떠받들게 하고자 하는 것을 듣고 평원군을 만나 말하길

“일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실것입니까?”

하였는데 평원군이 말하길

“잘모르겠습니다. 내가 어찌 감히 일을 말하겠습니까!일전에 밖에서 40여만의 백성을 잃었고 지금은 또 안에서 한단이 포위되어 물러가게 할수 없습니다. 위나라왕이 객장군 신원연을 보내 진나라를 제(帝)로 받들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 사람은 여기 있습니다. 잘모르겠습니다. 어찌 감히 일을 말하겠습니까?”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나는 처음에 그대가 천하에서 현명한 공자인줄 알았는데 지금 이후부터 그대가 천하의 현명한 공자가 아니란 것을 알겠습니다. 양나라의 손님 신원연은 지금 어디있습니까? 내가 청컨대 그대를 위해 꾸짖고 돌려보내겠습니다.”

하니 평원군이 말하길

“청컨대 소개를 할터이니 선생께서 한번 보십시오”

하고 신원연에게 가서 말하길

“동쪽 나라에 노중련 선생이란 분이있습니다. 지금 그 분이 여기 계시는데 청컨대 소개해드려 장군과 사귀게 하고 싶습니다”

하니 신원연이 말하길

“나는 노중련선생이 제나라의 높은 선비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하가 사신으로 와서 수행해야할 직무가 있으니 저는 노중련선생을 보고싶지는 않습니다.”

하니 평원군이 말하길

“이미 장군이 있다는 것을 말해버렸습니다”

하니 신원연이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노중련이 신원연을 보고서도 아무 말이 없자 신원연이 말하길

“내가 이 포위된 성속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평원군에게 구하는게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선생의 단정한 용모를 보니 평원군에게 구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오래도록 이 포위된 성속에 머물러 떠나지 않는것입니까?”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세상은 포초를 칭찬할 것 없이 죽었다고 하는데 모두 틀렸습니다. 대중은 알지도 못하면서 (포초가)자기 한몸을 위했다고 합니다. 저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전쟁에서)공을 세우는 것을 으뜸으로 칩니다. 선비들을 권력으로 부리고 백성들을 포로로써 부립니다. 저들이 방자하게 제(帝)를 칭하여 주제넘게 천하를 다스리려고한다면 이 노중련은 동해로 뛰어들어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겁니다. 장군을 본 까닭은 조나라를 돕기 위해서입니다”하였다

신원연이 말하길

“선생은 장차 이를 어찌 도우실겁니까?”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나는 장차 위나라와 연나라를 시켜 돕게 만들것입니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진실로 이미 돕고 있습니다”

하니 신원연이 말하길

“연나라 건은 제가 말씀을 좇겠습니다. 허나 위나라 같은경우는 내가 위나라 사람인데 선생께서는 어찌 능히 위나라로 하여금 돕게만든다고 하시는 겁니까?”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위나라는 진나라가 제(帝)를 칭한 해악을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나라로 하여금 진나라가 제(帝)를 칭하는 해악을 목격하게 한다면 반드시 조나라를 도울것입니다“

하니 신원연이 말하길

“진나라가 제(帝)를 칭하는 해악이 어떤 것입니까?”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옛날에 제나라 위왕은 일찍이 인의로써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주나라 조정으로 들어갔을 때 주나라는 가난하고 미약해서 제후들중에 주나라 조정에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제나라만이 조회를 했습니다. 일년 남짓후에 주나라 위열왕이 붕어했는데 제나라가 늦게 도착하니 주나라왕이 분노하여 제나라왕에게 말하길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 천자가 아랫자리에서 지내는데도 동쪽번국의 신하들은 제나라 때문에 뒤늦게 도착했으니 즉시 목을 베야한다』

하니 제나라 위왕이 버럭 화를 내며 말하길

『닥쳐라! 이 천한 종자가!』

하였으니 끝내 천하의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때는 주나라에 조회했다가 죽어서는 욕하는 꼴이니 진실로 (주나라의)요구를 참을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 천자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것이니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지요”하였다

신원연이 말하길

“선생께서는 홀로 저 종복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한명을 따르는데 어찌 힘이 모자르고 지혜가 같지 않아서 이겠습니까?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아~!위나라를 진나라에 비교했을 때 하인과 비슷하다는 뜻입니까?”

하니 신원연이 말하길

“그렇습니다”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그렇다면 내가 장차 진나라왕을 시켜 위나라 왕을 삶아서 소금에 절여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신원연이 언짢아 하면서 말하길

“아~!선생의 말씀이 너무 지나칩니다. 선생이 또한 어찌 진나라왕을 시켜 위나라왕을 삶아서 소금에 절이도록 할수 있겠습니까?”

하니 노중련이 말하길

“당연히 할수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옛날에 구후,악후,문왕은 은나라 주왕의 삼공이었습니다. 구후에게 자식이 한명있는데 아주 아름다워 주왕에게 바쳤더니 주왕이 안좋게 여기고 구후를 소금에 절여 죽였습니다. 악후는 강하게 다투며 잘못을 비판했기 때문에 포로 떠졌습니다. 문왕이 이를 듣고 한숨을 크게 내쉬고 탄식했기 때문에 (주왕은) 문왕을 유리의 창고에 100일동안 구류하여 죽일려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다른 사람과 같이 왕이라고 칭하면서 끝내 포로 떠지고 소금에 절여 죽임을 당하는곳에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제나라 민왕이 노나라에 갔을 때 이유자가 채찍을 잡고 따랐는데 노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길

『그대들은 장차 어떻게 우리 군주를 대접하겠는가?』

하니 노나라 사람들이 말하길

『우리들은 장차 소,돼지,양 10마리를 잡아 그대의 군주를 대접하겠습니다』

하니 이유자가 말하길

『그대들은 어찌 그대들의 예법을 가지고 나의 군주를 대접하는가? 나의 군주는 천자이시다. 천자가 제후를 순찰하면 제후들은 자기 방을 비우고 창고의 열쇠를 내어 놓으며 옷깃을 여며 상을 들고 들어와 당 아래에서 먹는 모습을 보다가 천자가 식사를 마치거든 이내 물러나 조정의 일을 듣는것이다』

라고 하니 노나라 사람들이 (성문의)열쇠를 던져버리고 나라 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노나라 안에 들어가지 못하자 장차 설(薛)지방으로 가려하는데 추나라에 길을 빌리게 됐습니다. 당시에 추나라 군주가 죽었는데 민왕이 들어가 조문하려하자 이유자가 추나라의 새로운 군주에게 말하길

『천자가 조문할 때 주인된 사람은 반드시 관을 등뒤로 하고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봐 그 후 천자가 남쪽을 보고 조문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니 추나라의 뭇 신하들이 말하길

『반드시 이처럼 해야한다면 우리들은 차라리 검 위에 엎드려 죽겠다』

라고 말하니 진실로 감히 추나라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추나라와 노나라의 신하들은 살아서는 군주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고 죽어서는 부조와 수의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이들에게 천자의 예법을 행하려고하자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만승(萬乘:전쟁용 수레가 1만대나 있는 대국)의 나라이고 위나라 역시 만승의 나라입니다. 둘다 만승의 나라이고 각자 왕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한번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제(帝)라고 섬기고 따르고자 한다면 이것은 삼진(三晉:조,위,한을 이르는말로 조양자에 의해 갈라지기 전에 晉 나라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의 대신들을 노나라와 추나라의 하인이나 첩 만큼도 여기지 않는것입니다.

또한 진나라는 제(帝)라고 칭하는데서 그만두지 않고 제후들의 대신을 바꾸고자 할것입니다. 저들은 장차 불초한자들을 현명한자들로 바꾸고자 할것이고 미워하는자들을 좋아하는자들로 바꾸고자 할것입니다. 저들은 또한 장차 그들의 자녀와 질투심 많은 첩으로 하여금 제후들의 비빈이 되게 하여 위나라의 궁전에 살게할것입니다. (만약 이렇게된다면) 위나라왕은 어찌 편안히 있을수 있겠으며 장군은 또한 어찌 총애를 얻을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신원연이 일어나 두 번 절하고 감사하며 말하길

“처음에는 선생을 용렬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내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선생이 천하의 선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청컨대 이곳을 나가서부터 다시는 감히 진나라를 제(帝)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진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50리나 후퇴시켰는데 때마침 위나라 공자 무기가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는데 진나라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평원군이 노중련에게 봉토를 내려주려고 하자 노중련은 세 번 사양하고 끝까지 받지 않았다. 평원군이 이에 술상을 차리고 술기운이 무르익자 천금을 내놓아 노중련의 장수를 기원했다. 노중련은 웃으면서 말하길

“천하에서 선비가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사람됨이 걱정을 떨치게하고 어려움을 풀어주며 분란을 종식시키더라도 가져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져가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장사치의 일입니다. 저는 차마 그런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는 끝내 평원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13.조예가 삼국통일을 누가 할지 물으니 황권이 천문으로 결정된다고 대답하다
 
【위나라 명제(조예)가 황권에게 물어 말하길

“삼국이 세발 솥처럼 섯으니 누가 정통이 되겠는가?”

하니 황권이 대답해 말하길

”마땅히 천문으로 정통을 정해야 합니다. 지난해에 형혹(화성)이 심수(心宿:동양의 28수 별자리 중 하나, 서양의 전갈자리중 일부에 해당)에 머물러 문황제(조비)가 붕어하고도 오,촉이 평안했으니 이것이 증거입니다”

하였다】

황권은 위나라를 정통으로 밀어 올렸는데 반드시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황권은 처음부터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오직 하나 천문으로 결정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감히 알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초4년 3월 계묘일 달이 심대성(心大星:心宿의 별자리를 이루는 별들 중 하나로 서양의 안타레스)을 범했는데 점(占)에서 이르길 

“심성(心星)은 천자의 자리이니 왕자가 이를 싫어한다”

하였다.

4월 계사일에 촉의 선주가 영안궁에서 죽었는데 두 나라는 모두 천도(天道)라고 여겼으니 어찌 쉽게 말할수 있겠는가? 

<진서 천문지>에 칭하길 

“두명의 석씨(석륵,석호)는 비록 참람되게 호칭을 썼지만 그 강약은 항상 묘수(昂宿:황소자리의 일부에 해당하는 별자리)로 점쳐졌고 태미궁과 자미궁(북극을 중심으로 천체를 세 부분으로 나눴을 때 그 중의 2부분을 가리킨다고 합니다)은 관계가 없었다”

하였다. 그러나 기록으로 고찰하건대 유성이 자미궁으로 흘러 들어왔을때 유총이 죽었고 혜성이 태미궁을 빠르게 지나갔을때 부견이 패했으며 형혹(화성)이 제좌(帝座)를 지킬 때 여륭이 격파됐으니 중요한 부분을 추리할줄 안다면 진실로 저절로 도리가 있다. 

진나라 경익과 그의 형 경빙의 책에 이르길

“세성(岁星:목성)이 천관(天关:畢宿에 속하는 별이름)을 범했는데 강동에 변고가 없고 계룡(석호)이 여러해 동안 관문을 닫았으니 이것은 다시 천공(天公:하늘)이 심란하여 옳고 그름이 없다는 증거이다”

하였다.슬프구나!사람이 하늘을 책망함이 너무 상세하니 하늘이 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ps.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에 나오는 석륵,석호에 관한 네이버 백과사전의 내용을 덧붙입니다.
 
석륵: 자 세룡(世龍). 시호 명제(明帝), 묘호 고조(高祖). 산시성[山西省] 우샹현[武鄕縣] 지방에 들어와 살고 있던 흉노족(匈奴族) 갈종(羯種)의 추장 아들로 태어났다. 20세경 동진(東晉) 병사에게 잡혀 산둥[山東]에 노예로 팔렸으나, 그 후 군도(群盜)의 수령이 되었다. 흉노의 유연(劉淵)이 한국(漢國)을 세우자 장군으로 임명되어, 산둥 ·허난[河南]의 경영을 맡았다(307). 진(晉)의 장군 왕준(王浚)을 멸하여 왕위에 올라, 국호를 조(趙)라 하고, 양국(襄國:邢臺)을 도읍으로 삼았다. 328년 전조(前趙)의 유요(劉曜)를 뤄양[洛陽]에서 무찌르고, 329년 전조를 멸한 뒤 세력이 화북 일대에 미쳤다. 석륵은 일국의 통치자로서도 유능하였고, 귀복(歸服)한 한인(漢人)의 통어(統御)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학교도 세우고, 학자도 중용하였으며 관리 등용에도 능하였다. 불승 불도징(佛圖澄)에 귀의하였다.
 
석호:자 계룡(季龍). 시호 무제(武帝). 묘호(廟號) 태조(太祖). 석륵(石勒)의 조카로 성질이 잔인하였으나 무장으로서의 통솔력에 능하여 석륵의 신임을 얻었다. 후조가 화북(華北;화베이)을 통일한 것도 석호의 공이 컸으나 333년 왕 석륵이 죽어 그의 태자 홍(弘)이 조제(趙帝)가 되자 이듬해 그를 죽이고 스스로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이라 칭하였다.
도읍을 양국(襄國:河北省 邢臺縣)에서 업(鄴:臨漳縣)으로 옮기고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는 한편, 원정군을 세 번이나 일으키며 폭정을 자행하였으므로 백성은 완전히 피폐하였다. 349년 재위 15년에 병사(病死)하자, 자식들은 제위(帝位)를 놓고 서로 싸우며 죽이다가 마침내 한인(漢人) 염민(冉閔)에 의하여 그 일족은 소멸(掃滅)되고 후조는 멸망하였다.



14.유비가 유장을 공격하고 연회를 벌이자 방통이 이를 나무라다
 
【선주가 유장을 공격할 때 이르는곳 마다 모두 이기니 부현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크게 연회를 열었다.그리고 방통에게 말하길

“오늘의 연회는 아주 즐겁구려”

하니 방통이 말하길

“다른 사람의 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은 인자(仁者)의 병사가 아닙니다”

하니 선주가 말하길

“무왕이 상나라를 이기고 앞에서는 노래부르고 뒤에서는 춤을 췄는데 인자(仁者)가 아니겠구나!”하였다】

부현의 일은 비루하니 어찌 족히 논할만 하겠는가!다만 즐거워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행동(禮儀)에 이르러서는 할말이 있다.

《전(传)》에 이르길

“군대가 공이 있으면 개선의 노래를 연주한다” 

또 말하길

“전쟁에서 이기면 장례에 처하는 예법으로 거한다”

하였다.이 두가지 행동(禮儀)중에 어떤 것이 옳은가?내가 듣기로 성인은 마음이 없어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전쟁에 있어서는 본래 백성들의 걱정을 걱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승리에 있어서도 백성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가 공이 있다면 개선의 노래를 연주하는 것이니 이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도(道)가 없어진 후에 덕(德)이 생기고 덕(德)이 없어진 후에 인(仁)이 생기며 인(仁)이 없어진 후에 의(义)가 생기고 의(义)가 없어진 후에 예(礼)가 생기는 것이니 도(道)가 예(礼)에 이르러서는 근본에서 아주 멀어지게 된다. 하물며 병사를 일으키는것(兵)에 이르러서랴!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면  장례에 처하는 예법으로써 거하는 것이니 또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그러므로) 즐거워하고 즐거워하지 않고를 말하는 것은 모두 부족함이 있다.

옛날에 이런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은 밖으로는 노래하고 춤췄지만 안으로는 장례의 예법으로 거처했다.



15.위나라 신하들이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고했지만 제갈량이 따르지 않다
 
【황초 4년 사도 화흠, 사공 왕랑, 상서령 진군, 태사 허지, 알자좌복야 제갈탄이 각자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천명과 인사를 제시하고 나라를 받들어 번국을 칭하라고 요구했는데 (제갈량이) 따르지 않았다】

위나라의 뭇 신하들은 가히 배우지 못해 학술이 없고 어두워서 지혜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학술과 지혜가 한나라의 소망지 정도만 됐어도 마땅히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에 호한(呼韩:흉노족 추장)이 변방을 넘어 번국을 칭했는데 소망지가 손님의 예법으로 대하여 훗날 돌아가서 한나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니 선제(宣帝)가 이를 따랐다. 

대체로 당시에 흉노가 비록 쇠약해졌다하나 본래 적국이라고 불렀으니 동구,남월(东瓯,南粤:중국 남방의 이민족)과는 달랐다. 이름이 나뉘어져 한번 정해지면 끝내 바꿀수가 없는것이니 다른날 배반해서 떠난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병사를 파견하여 주살한다고 하면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바가 있을것이고 내버려두어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천하를 호령할수 없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야흐로 부드럽고 유순한 시기에 신하의 예법으로 대하지 않아 겸양의 덕을 보일뿐만 아니라 대체로 후일의 먼 곳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위나라가 자신들을 보는 것이 어찌 선제(宣帝)와 같았겠는가? 오,촉이 비록 약하다 하더라도 호한이 다스리던 흉노만큼은 아니었다. 저들이 찾아와서 신하를 칭하더라도 오히려 신하로서 대하면 안될것인데 하물며 복종하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신하를 칭하게 하는것이랴?

앞에서는 손권에게 봉작을 내려 손권으로 하여금 분노와 모욕감을 느끼게 하더니 지금은 촉으로 하여금 번국을 칭하도록 꾀니 제갈량이 대답하지 않았다. 동서남북으로부터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까닭은 이런 노력 때문이 아닐 것이다.



16.원술과 유표가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지만 한황실이 막지 못하다
 
【흥평 2년 원술이 구강에서 주제넘게 제호를 칭하고 남북 교(郊)를 설치했다.이 때에 형주목 유표 역시 하늘과 땅에 교제(郊祀)를 지냈지만 한 황실이 제어할수 없었다】

오직 천자만이 하늘과 땅에 교제를 지낼수 있고 유독 노나라만이 교제의 예(禮)를 얻었다. 교제의 예법은 성인이 아주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훗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간이 천하를 도둑질하고자 할 때 먼저 그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훔치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니 이것이 장자와 노자의 무리가 말하는

“성인이 죽어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큰 도둑이 끊기지 않는다”

는 말의 의미이다.

양자(揚雄:한나라 유학자)의 논의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지 않다.

진나라가 서치(西畤)에서 제사지냈는데도 주나라는 바로 막지 못해 끝내 천하를 들어다 주게 됐으니 명분이 있는곳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수 없다. 무릇 노장의 말은 유학자들이 진실로 이미 비판한 것이고 양자의 논의 또한 부족한 점이 있다. 양자는 다만 명분을 엄하게하여 천하에 임해야 된다는 것을 알뿐 능히 천하를 보전할 수 있은 연후에야 명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진나라 사람들이 서치(西畤)에서 제사 지낼 때 주나라는 금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금지시킬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그러므로 명분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천하를 보전하는 근본에 힘써야 할 것이다.



17.제갈량이 형주와 익주를 기반으로 삼아 천하를 도모하자고 하자 유비가 좋다고 여기다
 
【제갈공명이 선주에게 형주와 익주에 걸터 앉아 그 험난함을 보전하다가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즉시 상장군을 보내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완성과 낙양으로 진군시키는 한편 (선주는) 몸소 익주의 군대를 이끌고 진천을 공격하자고 말했더니 선주가 좋은 계책이라고 하였다】

한고조가 이미 진희를 격파하고 낙양으로 되돌아와 탄식하며 말하길

“대나라는 상산 이북에 있었기 때문에 조나라가 산 남쪽부터 소유했구나”

하였다. 멀기 때문에 자식을 세워 상 (常:훗날 효문제가 되는 劉恒을 대왕으로 세웠는데 당경이 송나라 진종황제의 이름인 趙恒을 피휘하기위해 의미가 통하는 常을 쓴 것 같습니다)을 대왕(代王)으로 삼고 대군(代郡), 안문군(雁门)으로 이에 속하게 했다. 토지에는 진실로 경계가 있어 비록 접하였다 하여도 세력상 편리하지 않는 것이 있다.형주는 산의 앞에 있어 촉으로부터는 5000여리 떨어져있는데다 촉지방은 산의 뒤에 있기 때문에 그 세력이 진실로 어려웠다. 비단 형주를 지킬수 없을뿐만 아니라 진천을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지켜낼수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양주와 익주는 험하고 단절돼서 대체로 스스로 지킬뿐인 나라이고 다른 지방을 겸해서 가질수는 없다. 무릇 산 밖에 있는 것은 한자 한치도 소유할수 없으니 이것이 고조가 한중을 버리고 삼진(三秦:섬서성 위수 일대의 분지를 일컫는 지명으로 관중이라고도 함)을 취한 이유이다.



18.손권이 장소로 하여금 태자 손등을 가르치게 하다

【손권이 태자 손등으로 하여금 독서하게 하여 근대의 일들을 알게 하고자 하였다. 장소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너무 번거롭고 힘들게하여 곧 장휴에게 명령을 내려 장소에게 가서 배우고 돌아와 손등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유비는 유선을 한서로 가르쳤고 손권 역시 장소로 하여금 한서로써 아들 손등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손권과 유비의 지식이 2제3왕(2제:요,순/3왕:우왕,탕왕,문무왕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을 알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모하는 것이 여기까지 이르게 됐다고 여겼다.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됐다.

이윤이 태갑을 훈계할 때 하나라의 옛 군주를 칭했을뿐 당우(요,순)까지 미치지 않았다. 주공이 성왕을 훈계할 때도 상나라 3명의 군주를 말했을뿐 당우(요,순)까지 미치지 않았는데 어찌 이윤과 주공의 지식이 요,순,우를 알기 부족했겠는가? 역시 가까운 시기의 것과 절실한 일을 취했을 뿐이다.

손권과 유비의 지식이 이윤,주공과 비교하기에 부족하다 할지라도 자식을 가르치는데 이르러서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여 먼 것만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름만을 귀중하게 여겨 실속을 천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 또한 이윤과 주공이 남긴 법도이다.



19.육항이 양호와 더불어 잘 사귀자 손호가 이를 나무라다
 
【《진양추》에 이르길「손호가 양호와 육항이 좋게 사귄다는 것을 듣고 육항을 책망하니 육항이 대답하여 말하길

“신이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그 덕을 드러내줄 뿐이니 양호에게는 어떤 해도 끼칠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혹자가 양호와 육항 모두 신하의 절도를 잃었다고 양쪽을 비난하였다.」】

인자함과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은 국가의 일이고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에게 이기는 것은 장군의 직분이다. 양호와 육항은 장군의 직분으로 국가의 일을 도모했으니 이것이 논자들이 정도를 벗어났다고 비난한 이유이다. 내가 말하는건대 그렇지 않다. 

병사를 지휘하는데는 원래 술수가 많은 법이니 힘으로 겨루는 경우가 있고 지혜로 겨루는 경우가 있고 덕으로 겨루는 경우가 있다. 진한(秦汉)이래 오직 지혜로 힘을 속이는것만 알았으나 한가지 덕으로 겨루는것의 시비가 분연해서 덕으로 겨루는 것 역시 기묘한 계책에서 나온 것 일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찌 절도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진양추》는 양호와 육항을 자산과 계찰의 사귐에 유추했으니 여기서부터 또한 지나쳤다. 병가에서 속이는 방법에 어찌 자산과 계찰의 사귐이 있겠는가? 이런 말에 까지 나아간다면 중요하게 여길것이 없다.왜 그런가? 오나라와 정나라 간의 사신으로서 자산과 계찰의 교분을 쌓은게 아니라 어떤 지역의 임무에 처해서 사사로이 국경 밖의 사람과 사귀었을 뿐이니 이것은 육항과 양호의 훌륭함을 칭한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20.손권이 유성을 정벌하자 유비가 유표에게 허창습격을 권했으나 유표가 듣지 않다
   
【손권(私見:사고전서본을 보면 权자가 操자로 돼있고 당시 유성을 정벌한것도 조조이니 아마 손권은 조조의 오식인 것 같습니다)이 유성(柳城)을 정벌하자 유비가 유표에게 허창을 습격하라고 권했지만 유표가 (그 계책을) 쓸 수 없었다.】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 일은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으로부터 시작했지만 환공과 문공은 일찍이 혜왕과 양왕을 제나라나 진나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난리를 평정하고 끊어진 것을 다시 이은 공효가 현저하니 제후들이 스스로 복종하였다. 

동탁은 한나라 헌제를 장안에 거처하게하고 이무정은 당나라 소종으로 하여금 봉상에 가도록 하여 호령을 발하고 움직일 때 천자의 제조로써 명분을 삼았으나 천하의 제후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이들을 공격했는데 어째서인가? 한자,한치 조차 없는 공로로 천하의 믿음을 얻으려 했고 군주를 협박했다는 이름으로 제후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천하의 제후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공격한것도 진실로 이치에 맞다.

유표로 하여금 능히 제나라 환공,진나라 문공처럼 근왕의 공로를 이루게 한다면 비록 허창을 습격하지 않더라도 제후들을 호령하는데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록 허창을 습격했다하더라도 제후들의 군대를 이르게 하기 충분할 뿐이니 동탁,이무정이 이런 경우 였다.
 
 
21.북벌에 실패하자 제갈량이 서현의 1000여 집을 한중으로 이주시키다
   
【제갈량이 기산에 출정할 때 남안,천수,안정 3군이 호응하였는데 마속의 패배에 이르러 3군을 지킬수 없게 되자 제갈량은 서현(西县)의 1000여 집을 뽑아 한중으로 보냈다 】
 
한나라의 전성기에는 해와 달이 비추었고 눈이 달린 백성(私見:본문에는 日자로 돼있으나 사고전서본은 目자로 돼있는데 후자가 더 맞는 것 같기에 그리 해석합니다)이라면 모두 한나라의 아이 나 다름 없었다.그 뒤에 덕이 엷어지자 백성들을 보전할수 없었으니 곧 강동을 들어 오나라에 투항하는가 하면 위수 이북을 잘라내 위나라에 바쳤으니 이는 백성들이 한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한나라가 백성들을 저버린 것이다. 

제갈량이 기산에 출정할 때 3군은 바람을 보고 향응했으나 제갈량은 (끝내 3군을) 지켜내지 못했으니 이는 제갈량이 백성들을 저버린것이지 백성들이 제갈량을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이 때에 마땅히 잡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통렬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사죄하고 보내줘 효농(崤隴)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자신의 마음을 밝게 알도록 했다면 뒷날에 일을 일으킬 때 (3군의 백성들이 나에게)이르지 않을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잘못은)저쪽에 있는 것이지 이쪽에 있는 것이겠는가.

제갈량은 서현(西县) 1000여가를 뽑아 한중으로 보냈으니 이미 적을 이기기도 부족했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그 종족들과 어긋나게 하고 (조상의) 무덤을 떠나서 떠돌아 옮기게 한것이니 어찌 3군이 호응한 뜻이겠는가!이런 일은 변방에서 항상 일어나는 것 이지만 제갈공명에게는 알맞지 않은 것이다.이것이 내가 (제갈량을) 위해 슬퍼하는 까닭이다.
 

 
22.손기가 어마를 훔쳐탄 죽을죄를 짓자 손량이 궁중에 사면령을 내리다
   
 
【손량 태평 2년,종실인 손기가 어마를 훔쳐 타다 하옥됐는데 시중 조원(私見:삼국지 손패전을 보면 刁玄으로 돼있습니다)이 상주하여 이르길

“손기는 법으로 하면 응당 죽을죄입니다. 하지만 노왕(鲁王:손패)이 일찍 운명했으니 오직 폐하께서 불쌍히 여기십시오”

하니 손량이 말하길

“법(法)은 천하에 같이 적용되는 것인데 어찌 감정으로 접근 하겠는가? 마땅히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맞겠다”

하니 조원이 말하길

“사면령을 내리는데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니 혹 천하에 내릴수도 있고 혹 1000리에 내릴수도 있고 혹 500리에 내릴수도 있는데 뜻에 따라 (사면의 효력이) 미칠것입니다”

라고 했다.(이에) 궁중에만 사면령을 내리니 손기가 형벌을 면제 받았다.】
 
오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가히 위 아래가 모두 분수를 잃었다고 말할만하다. 한나라 때 제후왕이 죄가 있어 마땅히 주살될 형벌에 해당하여 승상,어사,전객,종정,정위가 상주를 올려 법대로 하길 청했다.그러면 황제는 말하길

“짐은 법이 이르는 것을 차마 할수 없으니 여러 제후중 2천석 이상과 의논하시오”

했는데 승상,어사등이 다시 상주를 올려 말하길

“신등이 2천석 이상의 제후들과 의논해봤는데 모두 말하길 마땅히 법대로 해야한다고 합니다”

라하면 황제는 말하길

“짐은 법이 이르는 것을 차마 할수 없으니 그 자를 왕의 자리에서 폐하고 혹 봉토를 약간 깎는 걸로 하라”

고 하였다.무릇 법대로 하자고 청하는 것은 관리들이 법을 지키기 위해서요 법이 이르는 것을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은 군주가 도리를 헤아린 것이다. 지금 손량은 군주이면서 법을 논하고 조원은 관리이면서 정을 논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오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위 아래로 모두 그 분수를 잃었다고 말할 만 한 것이다.
 
 

23.노숙이 손권에게 형주를 빌려주라고 권하자 주유가 반대하다 
  
【노숙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자고 손권에게 권하자 주유가 유비는 효웅이니 마땅히 토지로써 기초를 삼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한나라때 형주의 땅은 7개의 군(郡)으로 구성됐는데 유표가 죽은후 남양이 중원으로 편입되고 형주에는 다만 남군(南郡),강하(江夏),무릉(武陵),장사(长沙),계양(桂阳),영릉(零陵)이 있었다. 유비가 남쪽으로 도망왔을 때 유기가 강하로써 그를 따랐고 그 뒤에 4개의 군(郡)이 잇따라 귀부해오니 이에 유비는 무릉(武陵),장사(长沙),계양(桂阳),영릉(零陵)의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조인이 이미 퇴각하고 관우와 주유가 남군에서 교착하고 있을 때 유비는 형주목으로 공안에 거했으니 6군(郡)의 토지를 이미 모두 장악한 것이다. 빌려줬다고 말한 까닭은 한신이 임시(假)라고 말한것과 같으니 비록 주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수 있었겠는가? 노숙의 의논은 바로 장량과 진평이 (유방의) 발을 밟고 제시한 계책과 부합하는 것인데 주유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여러번 승리한 사람과는 과연 더불어 적을 헤아릴수 없구나.
 
 
24.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려하자 유비가 손권과 화해하고 촉으로 회군하다
  
【건안 12년,선주가 공안에 있으면서 관우를 보내 형주를 다퉜다.조공이 한중을 정벌하려 할때 선주는 익주를 잃을 것이 두려워 오나라와 연합해서 형주를 나누고는 군사를 이끌고 촉으로 돌아갔다】
 
조공이 한중을 정벌한다는 것을 선주가 듣고 오나라와 연합하고 형주를 나눈 것은 잘한 것이다.(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촉으로 돌아간 것은 잘못한 것이다. 

당시에 촉한은 남군을 가지고 있는데다 선주는 5만의 병사로 공안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만약 진군해서 양양을 근거로 하고 관우로 하여금 5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허창을 습격하게 했다면 갑옷을 말고 달렸을 때 5일이면 도착할수 있었으니 일이 성사되면 천하는 (누구에게 돌아갈지)헤아릴수 없었을 것이고 성사되지 못했다하더라도 한중의 군대가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해야 됐을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한 반드시 지켜야 될 곳을 공격하라는 것이다. 

애초에 조공이 유성(柳城)을 정벌할 때 유비가 유표에게 허창을 습격하라고 권했는데 유비가 형주를 장악한 때에 이르러서는 이런 (이치를) 판별할수 없었으니 천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수 있겠구나.
 
 
25.손권이 존호를 칭하자 주위에서 관계를 끊으라고 권했으나 제갈량이 듣지 않다 
  
【손권이 존호를 칭하니 논자들이 사귀어 봐야 이익이 없고 이름과 예법이 불순하니 마땅히 관계를 끊어야 된다고 했지만 제갈공명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혹자가 말하길

“공명이 오나라와 관계를 끊지 않은 것은 올바르지 못한것인가? 올바른것인가?” 

하였는데 (나는 대답하여) 말하길

“잘한것이지 잘못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전국 시대에 제후들은 모두 주제넘게 이름을 칭했는데 맹자는 왕자(王者)가 일어나면 싸잡아 주살하지 않고 반드시 가르쳐주고 나서도 고치지 않은 연후에야 주살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즉 가르치지 못한 죄는 왕자(王者)가 주살하지 않는다.

공명의 세력으로 이미 오나라를 가르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오나라가 주제넘게 비기더라도 바로 그 책임을 물을수 없는것이니 이것이 왕자(王者)의 법도이고 잘못한 것이 아니다.
 

 
26.오나라가 번주를 토벌하려고 하자 반준이 이를 위해 계책을 내다 
 
【오나라는 병사 만명으로 번주를 토벌하려고 했는데 손권이 이를 반준에게 물으니 반준이 말하길 5천명이면 번주를 잡기에 족하다 하였는데 논의에 의하면 번주를 깨뜨릴수 있는 형세였다.손권은 그 말을 믿고 군대 5천을 보내 참수하고 평정하였다】
 
손권이 형주를 공략할 때 관리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나 반준 홀로 굳게 버티며 굽히지 않았다. 손권의 수레가 다다르자 반준은 상위에 엎드려 엉엉 울었는데 스스로의 슬픔을 이기지 못했으니 그 일에 이르러서 얼마나 덕이 두터운것인가! 

이미 번주가 무릉으로써 스스로 뽑아가지고 촉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는데 반준은 손권을 위해 계책을 내서 이로부터 장차 토벌하여 평정했으니 그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또한 어찌 (이리도) 박한것인가! 그 뜻이 군주밑에 있으면 군주를 위하는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인가!

내가 듣기로 악의는 연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는데 조나라가 그와 더불어 연나라를 정벌하고 싶어하자 악의가 울면서 말하길

“옛날에는 연나라를 섬겼지만 지금은 조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잘못을 저질러 다른나라로 쫓겨왔는데 평생 조나라의 종노릇도 감히 생각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나라이겠습니까?”

하였다.악의를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럴수도 있다 (허나) 악의가 조금이라도 군주를 섬기는 방법을 알았다고 한다면 반준은 죄가 없을수 없다.
 
 
27.진나라 신하들이 진수로 하여금 제갈량집 24편을 편찬하여 올리게 하다 
 
【진나라 시중 순욱(荀勖),상서령 화교(和峤)가 상주 하여 저작랑 진수로 하여금 옛 촉한 승상 제갈량의 고사를 정하여 24편으로 하고 이름 붙이길 《제갈씨집》이라하고 올리도록 하였다】
 
위나라 문제가 즉위하고 공융의 글을 구해다 소멸하지 않고 드날리게 하였다. 진무제가 즉위하고 조서를 내려 제갈량의 고사를 정하고 주고(周诰)에 빗대었다. 

공융은 이미 위문제의 원수이고 제갈량도 역시 진선제의 원수인데 두사람의 말이 당연히 당시에 듣고싶어하던 것이 아니었을텐데도 나란히 수록된 것을 보면 아마도 실추되어 흔적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거리낌이 없었던 듯 하니 오히려 선왕의 크게 공정하고 극도로 올바른 도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내가 특히 위진(魏晋)에서 취하는바가 있는 까닭이다.
 
 
28.위나라 명제가 즉위하고 사마의,진군,조휴,조진이 각각 대장군이 되어 부(府)을 설치하다
   
【위나라 명제가 즉위하고 무군대장군 사마의,진군대장군 진군,정동대장군 조휴,중군대장군 조진이 나란히 부(府)를 열었다】
 
한나라가 처음에 승상,어사부를 두고 이후에 삼공부를 두었는데 장군이 출정할때는 막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물리면 즉시 폐했으니 항상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지금 위나라가 이미 삼공부를 두면서도 사마의등이 나란히 대장군이되어 서울에 부(府)를 연 까닭은 무엇인가?공실의 낮음이 대체로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촉한의 장수 이평이 사마의등이 부를 열고 등용됐다는 이야기를 듣자 공명에게 이를 말했는데 공명은 비천하게 여겼으니 이 당시에 중원의 인물중에서는 진장문(진군)을 미루어 최고로 쳤는데 지금 진장문 역시 이와 같은일을 했으니 나머지는 언급할 것도 없다.
 

29. 건안 18년 한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9주를 복원하다
    
【건안 18년,한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14개주를 합쳐서 9주로 복원하였다】
 
삼환(三桓)이 노나라 군주에게 간언하여 삼군(三军)을 만든 것은 주례(周礼:주나라제도)에 합치한 것이었으나 그 뜻은 끝내 공실을 낮추고 권력을 탈취하고자 한것이었다.

조조가 구주를 복원하라고 간언한 것은 우공(禹贡:우임금의 토지구획법)에 합치한 것이었으나 그 뜻은 끝내 기주를 넓히고 그 땅을 돋우는데 있었다.무릇 경술을 끌고와서 고의(古谊:옛 성현의뜻)라고 칭하는 사람은 진실로 모두 간사한 사람은 아니지만 간사한 사람이 (자신의)사악한 모의를 이루고자 한 경우에도 또한 일찍이 경술을 끌고와서 고의(古谊)라고 칭하지 않은적이 없었다.이미 모두다 믿을수도 없고 또한 모두다 의심할수도 없는 것이다.요점은 이곳에 있으니 자세히 본다면 그만일 것이다.
 

 
30.방통이 유비에게 익주를 점령하자고 하니 유비가 거절하다
   
【방통이 선주에게 익주를 취하라고 말하니 선주가 말하길 

“지금의 나와 물과 불의 관계를 이루는 것은 조조이다. 조조가 급박하면 나는 관대하고 조조가 포학하면 나는 인자하며 조조가 꾀를 쓰면 나는 충심을 쓴다. 매사마다 상반되니 이제 이 계획을 받아들인다면 작은 이득 때문에 천하로부터 신의를 잃게되는 꼴이니 나는 할수 없다”하였다】
 
관대한 것은 급박한 것을 이기고 인자한 것은 포학한 것을 이기며 충심은 잔꾀를 이긴다.그러나 조조는 강하고 유비는 약했고 마땅히 이겨야하는데 도리어 그렇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조조는 피(弟稗:정확히 弟자 옆에 벼화(禾)자가 붙어야 됩니다)이고 유비는 5곡이 익지 않은 것이다. 5곡이 익지 않으면 진실로 피만도 못한것이니 관후하고 인자하며 충성스럽고 신의있는 것이 급박하고 포학하며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이기지 못하는것이 아니다. 유비가 조조에게 이기지 못한 것은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라면 도(道)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31.청룡 3년 장액에서 그림이 그려진 돌이 출토되다
    
【청룡 3년, 장액에서 돌그림이 나왔는데 넓이가 1장 6척이고 높이가 1장7척1촌인데 둘레가 5장8척이었다. 

푸른 바탕에 하얀색 잔금이 가있었는데 기린같은 것이 있기도 하고 봉황같은 것이 있기도하고 호랑이 같은 것이 있기도 하고 소 같은 것이 있기도 하고 사람과 말같은 것이 있기도하고 팔괘, 28수의 별자리, 혜성 같은것도 있었는데 그 글자는 읽을수는 있었지만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위진의 부적이라고 여겼다(예언서 따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도, 낙서의 이야기들은 구양영숙이 공격하는데 심히 힘을 기울였다.지금 이 그림을 보니 하도, 낙서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애석하구나 이 당시에 복희(伏羲)나 신우(神禹)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뜻에 통하지 못하고 비루한자들이 위진의 부적이라고 여겼구나.

저 위진의 사람들이야 어찌 족히 말할만하겠는가마는 어떻게 팔괘, 구주의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겠는가! 조화의 도리에는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는것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 한탄할만 하구나.
 

 
32.금성태수 소칙이 헌제를 위해 곡을 하니 손성이 이를 비판하다 
  
【소칙이 금성 태수가 됐을 때 위씨가 한조를 대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옷을 벗고 통곡했다.손성이 이를 비평해 말하길 

“선비는 그 하는 일을 그르다 하지 않고 그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새로운 왕조에 이름을 올렸는데 다시 두 가지 마음을 품었으니 어찌 고상한 군자가 나아가는 분수이겠는가.” 】
 
위씨가 선양을 받았다 하더라도 한나라 황제는 오히려 생존했는데 하얀옷을 입고 슬퍼하는 것은 진실로 경망한 것이다. 그러나 손성은 두가지 뜻을 품었다고 말했으니 여기서부터 또한 지나치다.

기자는 옛날의 은나라 폐허를 지나가면서 궁실이 무너지고 파괴된것에 슬픈 마음을 느껴 곡을 하려했는데 조정을 거스르는 것이라 감히하지 못했다. 계찰은 왕료를 곡하고 합려를 섬겼으며 안영은 장공을 곡하고 경공을 섬겼다.

죽은 사람을 슬퍼하고 산 사람을 섬겨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신하의 본분인데 어찌하여 섬기는 바를 그르다하고 그른 것을 섬긴다고 말하는것인가!손성의 올빼미 같은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워하게 만든다.
 
 
33.제갈량이 장온이 패한 이유를 헤아려 구하다
   
【제갈량이 장온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그 까닭을 몰랐는데 몇일동안 생각하고 나서 말하길“내가 그 까닭을 얻었다.그 사람이 청탁과 선악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하였다】
 
선악이 너무 분명한 것은 진실로 패배하는 길이다. 그러나 사람이 재앙과 패배를 당하는 것은 그 도리에 따라 얻게되는 경우가 있고 그 도리가 맞지 않게 얻는 경우가 있다. 장온의 패배 같은 경우는 가히 도리에 맞지 않게 얻은 패배라고 할수 있는데 오히려 그 까닭을 추론하여 구할수 있었구나.
 

 
34.위나라 문제가 화흠에게 포로를 상으로 내리자 화흠이 풀어주고 시집보내주자 손성이 이를 비판하다
  
【위나라 문제가 군신들에게 잡아들인 포로를 나누어주는데 오직 화흠만이 풀어주고 시집보냈는데 황제가 탄식하였다. 손성의 평에 이르길

“자로가 사사로이 음식을 보내자 공자가 그 그릇을 깨뜨렸고 전씨가 권력을 도둑질해 백성에게 베풀자 춘추에 기록하여 나무랐다. 가문을 노비로삼고 주살하는 것은 국가의 엄숙한 형벌로 오직 슬퍼하고 가련히 여기는 마음(안:纵자는 원본에 若자로 돼있는데 지금 《삼국지주》따라 바로잡는다)이 있을뿐 치우쳐진 관용을 베풀 이치는 없다. 

화흠은 고굉의 책임을 가지고 마땅히 조정에서 공공연히 말해야지 하사품을 말없이 받아놓고 홀로 군자를 자처했으니 가히 필부의 인자함이라고 말할수 있을지언정 도리를 따랐다고는 할 수 없다”하였다
 
손성은 각박한 자질로 초적난신(草窃乱贼)의 세대를 받들어 배웠기에 본성과 습관이 모두 사악하여 논의하는 부류가 모두 이와 같다. 무릇 소를 봤지만 양을 보지 못한 것을 맹자는 인술(仁术)이라고 하였는데 어찌 치우쳐진 관용(偏宥)이라는 이름을 붙인것인가! 

위나라 문제 때에 손성으로 하여금 정위가 되게 하였다면 화흠은 당연히 사사로이 음식을 보내고 은혜를 도적질하여 베풀었다고 주살 당했을 것이니 동진이 손성을 쓰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
 

 
35.진수가 삼국지에 촉한은 사관이 없었다고 기록하다
  
【진수가 이르길

“촉에는 사관을 두지 않아 기록할 관리가 없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일들이 많이 빠뜨려졌고 재이가 기록되지 않았다. 제갈량이 비록 정치에 현달했다고는 하지만 무릇 이런 부류에서는 오히려 두루 살피지 못한 바가있다】
 
예기에서 군주가 말을 하면 좌사가 이를 기록하고 행동하면 우사가 이를 기록한다고 돼있다. 주례에 관직을 세운 일이 구비돼있는데 유독 이른바 좌사,우사가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비록 태사가 있지만 사실을 기록하는것으로써 직무를 삼지는 않았다.이 때에 제후들은 대개 역사가 있었는데 어찌 천자만 홀로 없었겠는가?

춘추시대에 점을 쳐서 밭과 땅을 고르고 점을 쳐서 날씨를 맞추는 사람들도 모두 태사라고 칭했으니 태사는 거의 음양가의 무리였다. 그런데도 조돈이 쓰여있고 최저가 쓰여 있으니 또한 태사라고 칭하더라도 역시 사적을 기록하는것과 비슷한 것을 관장한 것 같다. 대체로 바야흐로 이 당시에 공부하는 사람은 하늘과 사람에 관해 두루 알고 흥망을 점쳤던 사람들이니 역시 순수한 점술가들은 아니었다. 태사 백은 축융의 공으로써 초나라가 반드시 흥할 것을 추론했고 태사 조는 순임금의 덕으로써 진씨의 멸망하지 않음을 점쳤으니 그 증거를 논의함이 다른사람보다 빼어났다. 그러므로 음양가의 학자들도 사적을 기록하는일을 겸하여 관장했으니 한나라의 사마담 부자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사적을 기록하고 논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천관의 일 또한 겸해서 관장했는데 그 효과를 지금도 볼수 있다.

위나라와 진나라의 사이에 새롭게 저작랑이라는 관직을 설치하니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태사의 직분이 나뉘어 두 개가 되었는데 제갈공명의 시기에는 없었다. 내가 보건대 후주 광요 원년에 사관이 주청하길 상서로운 별이 보인다 하니 이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원년을 바꾸었다 라는 말이 있으니 촉한이 사관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36.경초 원년 여러 신하들의 상주로 축월을 정월로 삼다
  
【경초 원년,관리가 상주 하길 “위나라는 지통(地统)을 얻었으니 응당 축월(丑月)을 정월로 삼아야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 해의 3월을 맹하(孟夏) 4월로 고쳤다.】
 
세상에서 말하길 하나라는 인통(人统)을 얻었기 때문에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았고 상나라는 지통(地统)을 얻었기 때문에 축월(丑月)을 정월로 삼았으며 주나라는 천통(天统)을 얻었기 때문에 자월(子月)을 정월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틀렸다. 요전(尧典)의 희화,순전(舜典)의 순수를 보건대 당우(요순)의 시대에도 진실로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고 있었다. 하후의 시대에 이르러 그 법(달력)이 더욱 갖춰지고 그 책이 후세에 전해졌기 때문에 하나라의 소정(小正)이라고 한 것이다.

공자가 기(杞)나라에서 이를 얻고 쓸수 있을것이라 여겼는데 인월을 정월로 삼는 것이 하나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성주(成周)의 시대에 이르러 자월을 정월로 삼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하나라 달력을 폐기하지 않고 정월이라고 불렀다. 후세의 학자들이 하나라가 인월을 정월로 삼았다고 여기고 주나라가 자월을 정월로 삼았으니 그 사이에 있었던 은나라는 응당 바꾼 것이 없지 않았을테니 이런 뜻으로 유추하여 말하길 

“은나라는 축월을 정월로 삼았다”

한 것이다. 그리고 삼통(三统)이야기가 흥하였다.

무릇 하후씨가 인월을 정월로 삼은 것을 나는 논어에서 봤는데 논어에 이르길

“하후의 때(달력)를 행한다”

한 것이다.

주나라가 자월을 정월로 삼은 것을 나는 춘추에서 봤는데 춘추에서 기록하길

“10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시들게 하고 3월에 얼음이 없었다” 한 것이다.

은나라가 축월을 정월로 삼은 것은 경전에서도 볼 수 없고 이치에 있어서도 다시 통하지 않는다. 무릇 자월을 정월로 삼은 것은 24절기의 머리를 취한것이요 인월을 정월로 삼은 것은 4계절의 머리를 취한것인데 축월을 정월로 취한 의미가 어디있는가? 이것으로부터 (축월을 정월로 정할)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37.건안 18년 방통이 쏟아 지는 화살속에서 죽다
  
【건안 18년,선주가 진군하여 낙현을 도모했는데 방통이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죽었다.선주는 말을 하면 곧 눈물을 흘렸다】
 
방덕공이 공명으로써 와룡을 삼고 사원으로써 봉추를 삼았으니 사원의 나이가 마땅히 공명보다 어리다.공명이 죽었을 때 나이가 54세였고 사원이 22년 먼저 죽었으니 사원이 죽었을 때 나이가 오히려 30이 안됐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건안 24년 선주가 한중왕이되고 이해에 관우가 죽었고 다음해에 황충,법정이 죽었고 또 다음해에 장비가 죽었고 또 다음해에 마초, 마량이 죽었다. 기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순간에 공신이 서로 잇따라 죽었으니 마치 (생명을) 빼앗은 자가 있는 것 같았다.

다음해에 후주가 즉위하고 옛사람은 오직 공명,조운 뿐이었다. 7년뒤 조운이 죽고 또 5년뒤 공명이 죽었는데 공훈이 있는 신하는 이때에 이르러 모두 죽었다. 

법정은 45세에 죽었고 마초는 47세에 죽었고 마량은 35세에 죽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죽을 때) 나이가 기록되지 않았다. 

장비전에는 장비가 젊을 때 관우와 같이 선주를 섬겼는데 관우의 나이가 몇 년 많아 장비가 형으로 대접했다고 했으니 장비가 죽었을때의 나이가 약 50세정도 됐을 것이다. 곽준은 나이 40세에 죽었다. 

이런 수많은 호걸들이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초주는 70여년 살다가 죽었으니 하늘이 한나라를 돕지 않은 것이 분명하구나!

<위는 회원이신 dragonrz 님이 번역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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